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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요14:16-18, 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진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찬송이 되시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리라”(고전12:3)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성령님의 은혜입니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듯이 성령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께는 집중하지만 성령님에 대해서는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등한시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계십니다. 제 3 위 하나님의 명칭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비물질적이며 순수한 영으로, 스스로 계신 분이며 그 하시는 일은 지극히 거룩함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신’이라는 말을 쓰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명칭은 미신적인 의미가 가미된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제 3 위 하나님에 대한 정확하고 구별된 명칭인 ‘성령’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은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입니다. 이 중에 몇 군데를 살펴보면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은 한글 성경에서 보혜사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보혜사는 보호할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자입니다. 이는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스승님이라는 뜻으로 아주 훌륭한 명칭입니다. 하지만 보혜사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보혜사라는 말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의 파라(παρά)는 ‘옆에, 곁에, 나란히’라는 뜻이고 클레토스(κλητός)는 ‘부름을 받은, 초대받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파라클레토스는 “옆으로 부름을 받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 옆에 계시도록 초청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유는 그리스도인 옆에 계시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은 지금 내 옆에 계십니다. 파라클레토스는 파라칼레오에서 온 말입니다. 파라칼레오는 곁에서 부르다, 옆으로 부르다, 호소하다, 위로하다, 격려하다, 훈계하다, 보호하다, 간구하다, 애원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파라클레토스는 ‘옆에서 부르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옆에서 부르실까요?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왜 우리 옆에 계실까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왜 그리스도인 옆으로 초청을 받으셨을까요? 그리스도인을 깨우치시고 훈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 옆에서 그리스도인을 담대하게 하시고 격려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깨닫게 하십니다. 권고하시며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이 외에도 성령님은 만사만물에 역사하십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의미가 아주 광대합니다.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의 한 부분의 의미만을 번역한 말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은 매우 놀랍고 광범위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이 놀라우신 성령님이 항상 내 옆에 계신다는 것은 정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2천 년 전에 제자들 옆에 예수님께서 계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 옆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위로자이셨던 것처럼 성령님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3천 년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치열한 전쟁 속에서 다윗의 보호자이셨던 것처럼 성령님은 오늘 삶의 전쟁 속에서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4천 년 전에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아브라함의 인도자가 되셨던 것처럼 성령님은 오늘 천국을 향해 가는 우리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성령님은 오늘 세상 광야에서 우리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십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교회에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으며 섬김이 있고 봉사가 있으며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교회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으로 찬송하고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오늘 내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찬양할 수도 없고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내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과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성령님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힘도 모두 성령님에게서 나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 같지만 성령님께서 내게 힘을 주셔서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마귀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을 구하고 그 이끄심에 따라야만 합니다. 제자들이 역경으로 좌절할 때마다 이끌어주시는 자의 권능에 의지했듯이 우리 역시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행해야 할 것은 알고 있으나, 그것을 이루는데 약함을 깨달았을 때, 강함을 얻기 위해 주님을 모셨습니다. 우리도 약해질 때 성령의 모든 은총을 마음 속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 드려야 할 사랑스럽고 다감한 존경심을 가지고 성령을 모시십시오. 아내가 옆에 있는 것을 느끼듯이 성령님을 의식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대해 주신 것처럼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대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옆에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6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을 위로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고 전합니다. 성령이 함께 거하신다는 단순한 사실이 성도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거한다는 말을 NIV 성경은 산다(live)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타고난 육신의 영적 무감각 때문에 성령님의 권능과 임재를 느낄 수 없을지라도 성령님은 항상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은 결코 언제나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항상 함께 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성경이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방법이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요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무지에서 옵니다. 익숙한 것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낯선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모를수록 두려움은 커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두려움은 언제나 무지에서 샘솟는다.”라고 했습니다. 윌리엄 거어널은 “모든 죄 중에서도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종이 되게 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무지를 이용해 우리를 종으로 만듭니다. 마귀는 무지를 이용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가르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성령님은 사랑이 많으시며 부드럽고 인자하시며 자비로우신 스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학생들은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선생님이 생각이 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그 분 손에 들려져 있던 커다란 막대기입니다. 그 분은 항상 막대기를 들고 다니셨습니다. 옆 반 담임은 여자 선생님이셨습니다. 가을 운동회를 옆 반과 같이 준비하는 데 그 선생님이 저를 앞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 양손을 잡고 친절하게 손을 언제 어떻게 할지, 발을 어느 쪽으로 언제 내딛을지, 얼굴은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할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틀릴 때마다 혼날까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선생님은 저를 끝까지 혼내지 않으시고 부드러운 손으로 끝까지 이끌어주셨습니다. 이제 너무 오래 되어서 선생님의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의 친절하심과 따뜻한 손길뿐입니다. 그 시절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하늘과 같이 높으신 분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높으신 분이 얼굴이 새까맣고 촌스러운 저를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제 손에는 아직도 그 선생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남아 있고 제 마음에는 그 선생님의 따스한 마음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령님은 커다란 막대기를 든 위협적인 호랑이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 손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잡아 끄시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스승님이십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손을 뻗고 어느 쪽으로 발을 내 딛어야 할지 잘 모릅니다.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님은 모든 것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생각나게 하십니다. 인간은 영적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습니다. 배워도 금방 잃어버립니다. 영적으로 아주 둔감합니다. 영적인 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도 성령님은 막대기로 우리를 내리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령님은 배운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것도 한 번만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스승님이십니다.
성령은 진리를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요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가운데’라는 말이 헬라어로 엔(ἔν)입니다. 엔은 “안에,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안으로, 진리 속으로 인도하십니다.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이 유익하지만 진리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가면 진리 속에서 진리를 경험적으로 알고, 진리를 맛보며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배워보십시오. 그러면 진리를 머리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을 따라가면 진리를 가슴으로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후에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진리를 맛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진리를 알려드릴 수는 있지만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지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리의 설교자입니다. 하지만 이 설교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여러분은 진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역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일은 오직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진리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진리 주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진리는 딱딱한 견과와 같습니다. 호두를 그릇에 담아 거실 탁자에 두고 보기만 해보세요. 호두 맛을 알 수 있을까요? 호두의 겉 표면을 손으로 만지고 혀로 핥아보세요. 호두 맛이 나겠습니까? 호두의 겉 표면만 번질번질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호두를 깨서 먹는다면 호두의 맛이 입안 가득하게 됩니다. 호두의 성분이 폐와 신장과 혈관을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성령님을 따라서 진리 속으로 들어가서 진리의 맛을 보세요.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진리의 겉과 속을 압니다. 저는 이미 진리의 호두 알맹이 맛을 알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저에게 실재적이며 실질적입니다. 진리가 제 가슴 속에서 녹아 제 영혼에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저는 진리와 떼려야 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뛰어난 철학적인 논리로 제 마음을 흔들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들이 교회를 헐뜯고 예수님이 없으며 천국이 없다고 떠들어대도 저는 머리털 하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평안합니다. 저는 평안합니다. 저는 평안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진리의 알맹이를 깨물어 그 맛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진리 속으로 인도해 초콜릿처럼 달콤한 진리의 맛을 보게 하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진리 속으로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작년 10월 31일 토요일에 이천에서 결혼주례가 있었습니다. 1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일찍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고속도로가 막혀 제 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혼주에게 여러 차례 전화해서 도저히 못 갈 것 같으니 거기에 주례할 다른 사람이 없는지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해보니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범칙금을 낼 생각하고 비상등을 켜고 갓길과 버스전용차로로 번갈아가며 달렸습니다. 이천에 들어가서도 신호를 다 위반했습니다. 결혼식장 주차장에 도착하자 7분전이었습니다. 옷매무새를 살피고 뛰어 들어갔더니 4분전이었습니다. 그때를 빼고 저는 지난 수개월 동안 운전을 하면서 신호위반을 하거나 속도위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지난 수개월 동안 무단을 횡단을 한 적도 한 번도 없습니다. 당연한 것을 뭘 그리 자랑삼아 말하느냐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전에는 신호위반을 종종 했고 무단횡단도 종종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제 마음에 하지 말라는 거리낌을 계속 주셨지만 저는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신호위반을 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하지 않다보니 안 하는 맛을 알게 됐습니다. 술을 마시는 맛이 있으시죠? 안 마시는 맛도 있습니다. 안 마시는 맛을 경험하세요. 신호위반을 하지 않는 맛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모여 뒤 담화하는 맛이 있다면 뒤 담화하지 않는 맛도 있습니다. 훔친 사탕 맛이 있지만 정직한 사탕 맛도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맛도 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 맛도 있습니다. 불의의 맛이 있지만 공의의 맛도 있습니다. 내 속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따라가셔서 진리 속으로 들어가 진리의 맛을 보세요. 진리의 맛이 있습니다. 은혜의 맛이 있습니다. 그 진리의 맛은 진리의 저 반대편에 있는 맛보다 훨씬 달콤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장래의 일까지 알게 하십니다. 우주 역사의 완성 프로젝트는 하나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다 통달하여 꿰뚫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장래, 인류의 장래, 우주의 장래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성령님 안에는 완성된 지식이 있습니다. 그 미래의 완성된 지식으로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인도하심은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완벽합니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에 저는 모르는 길을 가게 되면 지도를 보고 그 지역을 자세하게 공부한 다음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가다 보면 지도에 없는 도로가 나옵니다. 새로 난 도로입니다. 지도에 없는 건물도 있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또 지도에는 있는데 실제로는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없어진 도로나 건물입니다. 지도와 지형이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헤맬 때가 많았어요. 어떤 지역은 지도와 완전히 달라요. 없었던 것이 생긴 곳이 있어요. 지도가 처음 나올 때는 그 지도가 맞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다음에는 지도가 맞지 않아요. 지도가 지도 역할을 온전히 해주지 못합니다. 시간이 많이 흐를수록 그 지도는 쓸모가 없어집니다. 지금 서점에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인류의 경험이 축적된 아주 귀중한 지식 자원입니다.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지식입니다. 과거의 지식을 참고해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맞을까요? 다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과거의 지도로 현재의 도로를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냥 참고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과거의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지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인도하심은 완전합니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막히는 도로와 막히지 않는 도로를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막히지 않는다는 도로로 갔는데 가서 보면 막히고 있습니다. 왜 그렇죠? 내가 가는 사이에 도로가 막히게 된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은 5분 후의 도로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현재만 압니다. 앞으로 내비게이션이 주변 도로의 차량 통행을 분석해 5분, 10분 후 쯤에는 어느 도로가 막힐 것이라고 예견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견입니다. 그것이 꼭 맞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에게 장래의 일을 알게 해줍니다. 성령님은 앞으로 다가올 일들, 하나님의 역사 완성 프로젝트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인도하시되 완벽하게 인도하십니다. 진리의 성령님을 따라가십시오.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야할 목적지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하나님께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들어 그의 목적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한 발자국씩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는데 가장 완벽한 길로 갔습니다. 장래의 일을 모두 알고 계시는 성령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 장래의 일을 아십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분을 따라가세요. 그래서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요16:14에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그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중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있는 곳에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갖고 사세요. 그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곳에 성령님의 기쁨과 감격과 회복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치유하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에 계세요.
또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것이 무엇일까요?’ 하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 신령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것은 은혜롭고 복되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과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것, 신령의 것을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것, 자기의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의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때로 여러분에게 모세의 것, 다윗의 것, 다니엘의 것, 베드로의 것, 믿음의 사람들의 것을 소개합니다. 그런 것들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것과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것은 슬픔의 병을 치료하는 양약이며 상처에 시달리는 심령의 위로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 것 외에 다른 것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은 위로자이십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위로 활동 그 자체만을 목표로 삼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14:15-16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죄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회개하는 자를 위로 하십니다. 성령님의 위로를 원하신다면 죄에서 나오십시오. 그리고 명령을 따르십시오. 불순종하지 마십시오.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요즘 최고의 화두 중에 하나는 배구계의 학교 폭력인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A씨와 B씨는 친구들을 때렸습니다. 흉기로 위협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전직 배구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배구계의 내로라하는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A씨와 B씨에게 든든한 힘이었습니다. 배구부는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을 위한 배구부처럼 운영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때문에 감독도 두 사람을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덕에 두 사람이 가는 길은 탄탄대로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곪고 곪다가 터졌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후원자였고 보호자였으며 힘들 때의 위로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딸들을 잘 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제가 그 어머니를 욕하거나 두 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십시오. 지금은 예배 시간입니다. 제가 죄인인데 세상의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저는 인간의 위로와 인도는 잘 못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사람의 인도는 잘 못될 수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라 할지라도 자식을 잘 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위로와 인도는 자신과 자식의 기쁨과 만족만을 위해 자식을 잘 못된 방법으로 인도하는 사람의 인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 어머니는 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깨끗케 하거나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들을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힘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마음대로 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는 이렇게 어리석지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성령의 위로는 진리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은혜롭습니다. 이 위로는 육체의 강함과 힘, 부, 지위, 우정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진리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며 이 진리는 변치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어갈 때도 원기 왕성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때처럼 우리의 위로는 살아있습니다. 통장의 잔고가 완전히 비게 되어 부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적인 부와 기쁨이 우리에게 가득 차 있는 것보다 우리의 위로가 훨씬 더 가득 찰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위로는 예나 지금이나 크리스천을 지탱해주는 대들보입니다. 여러분이 보혜사 성령님의 위로를 알 수 있다면 어떤 다른 위로도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육신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여러분 옆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의 집입니다.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상관없이 성령님께서 우리의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이 안에 없는 것처럼 삽니다. 성령님이 안 계신 것처럼, 성령님을 모르는 자처럼 살지 마십시오. 성령님을 거슬러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나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치 마십시오.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하십시오. 성령께 변함없는 찬미를 드리십시오. 성령님을 공경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그분께 순종하십시오. 그분께 예배하십시오. 신앙심으로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이나 문화가 아니라 성령님입니다. 차보다 집보다 성령님이 더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가장 큰 위로이시며 가장 큰 힘이십니다. 허무한 시절을 이길 힘은 성령님으로부터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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