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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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계시록 2:10
주일오전예배 | 2021-02-2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66079, 황산벌에서 계백과 김유신, 백제와 신라 양국의 운명을 건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때 계백 장군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자신의 아내, 아들들, 딸들을 모두 죽입니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계백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병을 맞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하느니 깨끗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하고, 마침내 모두 죽이고 황산벌에 나와 세 곳에 진영을 베풀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5천 명의 결사대 앞에서 가족몰살 공개선언을 한 뒤 이를 실행에 옮기고 나서 전투에 나섰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안정복은 계백 장군이 처자를 죽이는 비장함 때문에 백제군의 사기가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계백은 싸움터에서 군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나라는 망한다. 신라에 패해 노예가 될 바에야 차라리 명예롭게 죽자. 모두 나와 같이 싸우자!”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5천의 결사대는 5만의 김유신 부대를 하루 동안 4번이나 이깁니다. 이로 인해 백제군은 사기가 충천하고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집니다. 하지만 전세는 역전됩니다. 전투 중에 신라의 화랑 관창이 백제군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계백은 관창을 돌려보냅니다. 계백이 관창을 살려준 이유를 <삼국사기 47권 열전 관창>계백이 투구를 벗게 하나 관창이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관창은 신라 진영에 돌아가서 말합니다.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히 싸웠지만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그의 말안장에 매어 돌려보냈습니다. 관창의 아버지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했습니다. “내 아들의 면목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줄을 알았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신라군이 그것을 보고 의지를 다진 다음,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공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각오한 충성이 한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판도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본문은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서머나는 터키의 서쪽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터키의 3대 대도시 중에 하나로 오늘날 이즈미르(터키어: İzmir)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입니다. 몰약은 몰약나무의 껍질에 상처를 내어 흐르는 유액을 건조시켜 만든 약재입니다. 몰약이라는 말의 의미는 쓰다’(아랍어)입니다. 몰약은 맛은 쓰지만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몰약은 고난, 환난, 죽음을 상징하며 으깰수록 향기가 더 많이 난다고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몰약처럼 고난 속에서도 향기가 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보낸 메시지를 살펴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주신 첫 번째는 메시지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교회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칭찬의 메시지와 책망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 네 교회,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는 칭찬의 메시지와 책망의 메시지가 동시에 있습니다.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있습니다. 영적 상태가 매우 심각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책망은 없고 칭찬만 있는 교회가 있는데 그것이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입니다. 두 교회는 예수님께 책망을 전혀 받지 않는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는 장차 올 고난을 당하라고 하셨지만 빌라델피아 교회에는 시련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 <3:9-10>
  •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는 똑같이 믿음을 잘 지킨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왜 한 교회는 장차 올 고난을 당하라고 하시고 다른 한 교회는 시련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두 교회를 차별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두 교회를 동일하게 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시험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말은 시험을 면제해주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시련 중에서 지켜주시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미 빌라델피아 교회는 많은 시험을 받은 것 같습니다. 서머나에 <사탄의 회당>이 있었던 것처럼 빌라델피아에도 <사탄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또 예수님께서 거짓말하는 자들을 네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3:9). 빌라델피아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는 자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빌라델피아 교회는 많은 시련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이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마귀는 절대로 교회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마귀가 가만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은 시련 중에서 보호해주겠다혹은 고통 가운데서 구원해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를 고통 중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장차 있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시련 중에서도 서머나 교회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 <1:12-13>
  •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계시다고 했습니다.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일곱 금 촛대가 무엇일까요? 일곱 금 촛대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입니다.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왜 예수님은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실까요?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교회를 지키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구하기 위해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풀무불 속으로 천사들을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친히 풀무불 속으로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세상 불 같은 시련 속에서도 교회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곱 교회 사이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 모임이 교회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 사이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모임에 지금 함께 하셔서 이 모임을 지키십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왜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고난 속에서 교회를 지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세상에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두 번째로 주시는 메시지는 마귀가 장차 서머나 교회 성도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두 번째 주시는 메시지는 <볼지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볼지어다>보다라는 동사에 ‘~지어다를 붙인 말로 보다의 활용형입니다. ’~지어다마땅히 그렇게 하여라의 의미를 나타내는 명령형 종결 어미입니다. 보통 “~ 할 지어다라는 말은 장엄한 어감을 띱니다. 예수님은 왜 보라는 말을 장엄하게 하고 있을까요? 강조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잘 보고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볼지어다>가 여섯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1:7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꼭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볼지어다는 두 번째 볼지어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두 번째로 꼭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지막 때를 사는 크리스천에게는 시련이 있는데 그 시련의 배후는 마귀라는 사실입니다. 시련은 육적인 고통처럼 보이지만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항상 자신의 하수인들을 통해 일한다는 것입니다. 

  • <9-10>
  •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마귀의 행동대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인임을 자청하는 자들로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며 모함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탄의 하수인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사탄의 회당>이라는 말은 <사탄의 졸개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박해 주범은 사탄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박해하는 주동자는 사탄입니다. 사도행전13:10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자식, 의의 원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3: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마귀가 있고, 그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있습니다. 마귀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영적인 자식들을 통해 일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9절에서는 사탄이라고 했는데 10절에서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금방 말이 바뀌고 있습니다. 사탄, 마귀, 큰 용, 옛 뱀은 모두 귀신의 왕을 가리키는 다른 말들입니다. 그런데 약간씩 강조점이 있습니다. 사탄은 악의 존재 양상을 나타낼 때 주로 쓰이고 마귀는 악의 행동자로 쓰입니다. 사탄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사탄은 실체입니다. 상상이 아닙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마귀는 실제로 우리 가운데 활동을 합니다. 마귀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주범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전쟁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옥에 던진 것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박해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중세 유럽에 마녀 사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녀를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 초자연적인 마력을 얻어, 이 마력으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1484, 교황은 마녀의 존재를 공인하며 이를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교서를 발표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86년에는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중 하인리히 등이 마녀와 관련한 책을 내서 마녀란 마술을 사용하고 악마와 계약한 사람으로 악마의 주장을 따르며 사람들과 공동체를 파괴한다고 정의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15세기의 마녀사냥은 16~17세기에 정점에 달해 유럽 전역을 광기로 몰아넣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북부에서만 300명 이상이 마녀재판에 세워졌고 그중 절반이 처형당했습니다. 독일 등의 지역에서도 수십만 명이 마녀라며 죽임을 당했고, 에스파냐에서는 100만 명 정도가 처형당했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재판 기록도 없이 처형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실제 희생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봅니다. 16세기 네덜란드를 여행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녀를 매달기 위한 말뚝이 숲을 이루었다고 하니 마녀로 희생된 여성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공공장소에서 마녀를 불에 태우는 것이 집행자들에겐 질서의 유지를 대중에겐 재미난 유흥거리였습니다. 한 마디로 마녀 재판은 죽음의 잔치였습니다.  

그러면 마녀는 어떻게 구분할까요? 가장 먼저 마녀는 악마의 상징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체에 난 자국을 찔러도 출혈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마귀나 점을 악마의 흔적이라고 믿었고, 의심되는 곳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러댔습니다. 일부 재판에서는 피의자의 옷을 모두 벗긴 채 수백 군데를 찌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출혈하지 않는 부위를 찾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66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활동한 마녀사냥꾼인 존 킨케이드는 칼날이 쑥 들어가는 칼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갖고 다니던 이 칼로 찌르면 절대로 피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밖에도 마녀 감별법은 다양했습니다. 여성의 몸무게를 재서 성경책보다 무거우면 마녀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리고 독방에 가둬놓고 거미나 쥐가 피의자의 방향으로 달려가면 마녀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마녀 감별법은 물에 빠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손발을 묶은 채 물에 빠뜨린 다음 가라앉으면 사람이고 떠오르면 악마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며 마녀라고 몰아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었습니다. 또 펄펄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고 붕대로 감쌌다가 며칠 있다 풀어 나아있지 않으면 신의 은총을 받지 못했으니 마녀라고 처형했습니다. 또 불에 달군 쇠판 위를 걷게 해서 사망하면 무죄이고, 살아나면 유죄입니다. 아무튼 죽습니다. 이 책을 쓴 가톨릭 수도사들과 마녀사냥꾼들이 마귀인지 헷갈립니다. 

왜 중세에 이런 광기어린 마녀재판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가들이 그 중에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종교적 원입니다.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신교가 등장하면서 가톨릭은 구교가 되어버립니다. 구교가 되어버린 가톨릭은 내외적으로 흔들리는 교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런 배경에서 행해진 것이 마녀재판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는 마녀 사냥의 표적이 됐습니다. 여러분! 마녀사냥은 중세 유럽에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마녀사냥은 지금도 역사 속에서 계속 진행 중입니다. 세상에는 음모가 있습니다. 그 음모는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음모의 목적은 사람들의 영혼을 삼키고 교회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 기독교가 중세 기독교처럼 누군가의 의해 마녀사냥의 표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표적이 저와 여러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시 그 표적이 되거든 불같은 시련 속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이 말씀은 열흘 후에 환란이 끝날 것이라는 뜻일까요? 그래서 열흘만 잘 참으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하실 때 종종 숫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수에는 하나님의 어떤 암시가 있는 것입니다. 열흘의 환난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큰 환난입니다. 십은 전체성, 충만, 편만, 완전, 모든 존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흘의 시험>은 완전한 환난,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환난은 그냥 환난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환난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시험입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을 할 때 라반은 야곱을 속였는데 열 번 속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궁에 끌려갔습니다.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유대인은 먹으면 안 되는 우상의 음식을 주었습니다. 다니엘은 우상의 음식을 거부하며 환관장에서 10일 동안만 우리를 시험해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9장에 예수님께서 열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열 므나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 열 므나일까요? 열은 주인이 없는 동안 종들을 시험하는 표식입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연단받은 기간이 40년입니다. 4010의 네 배입니다. 10은 시험, 연단의 의미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열흘 동안 시험을 통한 연단을 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시험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연단합니다. 세상은 10일 동안 우리를 시험합니다.

또 본문에서 열의 의미는 정해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열흘 동안의 환난은 환난이 크더라도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발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무시해 음식을 달라는 다윗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요구는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발은 악한 자라 그 합당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발이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열흘 주셨습니다(삼상25:38). 하지만 나발은 그 정해진 시간을 몰랐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열흘 동안만 시험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시험은 계속되지 않습니다. 시험은 정해진 기간이 있습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23절에 하늘에 붉은 용이 있는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라고 했습니다. 131절에는 한 짐승이 있는데 이 짐승도 뿔이 열이라고 했습니다. 173, 12, 16절에 계속 열 뿔이 나옵니다. 왜 하필 열 개일까요? 이것은 절대 권력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모두 다 열입니다. 열한 개, 열두 개가 되지 못합니다. 열을 넘지 못합니다. 제한된 권력, 정해진 권력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상은 넘어가지 못합니다. 열흘 동안 시험 받는다는 말은 시험이 크지만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은 기간과 그 힘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끝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넘지 못할 선이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10일 동안만 시험합니다. 그 이상은 못합니다. 마귀는 10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세 번째 메시지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을까요? 충성은 헬라어로 피스토스(πιστός)입니다. 이 말은 믿을 만한, 신실한, 신뢰할 만한, 미쁜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헬라어로 피스티스입니다. 헬라어에서 믿음과 충성의 어원이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충성이 에메트입니다. 에메트는 진리, 진실, 신실, 충성이라는 뜻입니다. 에메트의 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는 중간 글자이고 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충성은 처음과 과정과 마지막이 한결같은 것입니다. 에메트는 아만에서 왔는데 이 말은 지속하다, 지탱하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신뢰하다, 믿다는 뜻입니다. 아만에서 아멘이 왔습니다. 히브리어로도 믿음과 충성의 어원이 같습니다. 충성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 성공? 명예? 권세? 사람? ? 가정?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충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충성할 수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한결같이 믿으라는 말입니다. 충성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신용카드><크레딧카드>라고 하죠? credit은 라틴어 credo에서 왔습니다. 라틴어 크레도는 헬라어 크레도스에서 왔습니다. ‘크레도심장이라는 뜻의 코르바치다는 뜻의 의 합성어입니다. 라틴어에서 믿음은 심장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심장을 바치는 것입니다. 충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내 심장을 드리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인간은 누구나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거나 후보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생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마귀는 크리스천을 마녀사냥의 표적으로 삼을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촛대 사이에 계십니다.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풀무불 속에서 우리는 아주 진한 은혜의 맛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이론가 막스 셀러는 세계 어디서나 위대한 신앙가나 사상가들의 가르침에는 고통과 고난의 의미가 그 핵심을 이룬다.” 성경은 고난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고 합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 드린다면, 역경은 비길 데 없는 그분의 위대하심을 세상에 온전히 전하는 통로가 됩니다. 바울은 고난이 우리의 영광도 된다고 했습니다. 

<고후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구소련 당시 크리스천들은, “우리는 못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망치로 세게 내리칠수록, 우리는 더 깊이 박힌다!” 악인들을 망치로 내리치면 죄악 세상에 더 깊이 박힙니다. 더 마귀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더 지옥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가 망치로 우리를 내려치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 깊이 박힙시다. 고난이 와도 의에 더 깊이 박하시기 바랍니다. 중국 성도들은 우리는 대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밑 둥을 잘라내면 낼수록, 우리는 더 빠르게, 더 높이 성장한다!” 대나는 자르면 자를수록 더 번식합니다. 모슬렘 권의 이란 성도들은 우리는 고무공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땅바닥에 세게 내리치면 칠수록, 더 높이 튀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우리는 꽃과 같다고 합니다. 꽃잎은 눌러 짜면 짤수록, 더 깊은 향내를 피어냅니다. 꽃은 바람에 흔들릴수록 향기가 더 날립니다. 고등학교 때 학교 교정에 후박나무가 있었습니다. 야간 자습을 하고 집에 가다 보면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꽃향기는 밤이 될수록 더 짚어집니다. 오늘날 인도에서도 많은 핍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도는 차 수출로 유명합니다. 인도의 박해받는 성도들은 우리는 티백(tea bag)과 같다고 합니다. 티백은 물이 뜨거울수록 차의 엑기스가 더 잘 우러나옵니다. 크리스천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 녹아질 때, 비로소 강한 능력이 우러나옵니다(폴 이스타브룩스). 고난이 와도 끝까지 믿음을 지킵시다. 끝가지 충성합시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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