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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남은 인생을 사시면서 이것 하나는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이것만은 결코 잊으시면 안 됩니다. 또 다른 것은 다 놓쳐도 이것만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천국에 가셔야 합니다. 결코 천국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지옥에 가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천국이 어디 있어! 지옥은 소설에나 있는 거지!” 정말 천국과 지옥이 없을까요? 그들의 말대로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교회 다닌 것이 손해일까요? 아니요.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얻었습니다. 너무 많아서 다 기억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할지라도 신앙생활을 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2004년 조선일보에서는 신앙과 경제의 관계에 대한 의미 있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2000년을 기준으로 188개 국가로 구성된 국제연합(UN) 가운데는 부자 나라도 있고 가난한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가?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미국 미주리 주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연방 준비 은행 연구원들이 연구했습니다. 이들은 이색적인 시각에서 그 답을 설명하는데, 결론적으로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가 생기는 이유는 '지옥을 믿느냐 아니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즉 지옥을 믿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더 잘 살고 덜 부패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제적 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경제적 요인들, 특히 각 나라의 종교가 그 나라의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었습니다. 연구팀이 그 부분을 집중 연구한 결과 지옥의 존재를 믿고 사는 사람이 많은 나라일수록 부패 정도가 약하고, 부패 지수가 낮은 나라일수록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조용기 목사님 설교 중에서). 천국과 지옥을 믿는 사람들이 잘 산다는 연구보고서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어도 기독 신앙을 가졌던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반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의인은 죽는 순간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악인은 죽는 순간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인이라면 죽는 순간 이 세상에서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천국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악인이라면 모든 것을 다 잃을 뿐만 아니라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는 곳인데 살만하지 않겠어!”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지옥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절대로 못 됩니다. 지옥의 고통은 사람들이 상상하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크고 견딜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는 다 가셔도 지옥에는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반드시 천국 가세요.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갈라디아서 3:11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가 되는 구절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신칭의, 이것은 바울이 구약성경 하박국 2장 4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로마서의 주제 또한 이신칭의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작은 로마서>라고 부릅니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키 중앙에 있는 도시로 고대 로마의 한 주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AD 55~58년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3차 전도 여행(53~58년, 행18:23~21:26) 중에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 전도(46~49년, 행13:1~14:28)여행 때 세운 교회인데 바울이 떠난 후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바울은 진짜 사도가 아니며 그가 전한 복음 또한 잘못된 것으로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할례와 율법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변론으로 갈라디아서를 쓰게 됩니다. 3장 11절은 그 변론의 핵심으로 기독 신앙의 핵심 교리입니다. 이 시간 두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매우 확실하고 진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단 하나의 기준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방법은 모두 사람이 세운 법으로 어느 것 하나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의 눈에 그럴싸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전혀 효력이 없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기준만이 효험이 있습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유죄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등록될 것입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서 천국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영적인 생명의 최초의 확실한 표징입니다. 믿음은 인간 속에서 영적인 잠에 빠진 영혼을 깨우는 영혼의 생수입니다.
믿음으로 그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숨겨져 있는 사람(골3:3),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육신에 가려져 하찮게 보인다할지라도 그들은 아주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리스도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3:4) 그렇다면 얼마나 그 생명이 고상할까요? 그래서 저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또 사람들의 신분에 차등을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들을 <천국귀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귀족은 내적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내적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내적 생명의 품위와 원천과 고상함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국귀족입니다.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이라크 남부에 있는 동네 이름입니다. 가장 오래된 고대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하란은 터키 동부의 도시 이름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약 1000km이고, 하란에서 가나안 까지는 약 800km입니다. 1800km, 걸어서 하루에 20km씩 간다면 꼬박 3개월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중간 중간 며칠씩 쉬면서 갔다면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광야입니다. 산적들, 도적떼들이 나오는 때입니다. 여행이 두렵고 걱정스러운 때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흔들림 없이, 어떤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빈둥거리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 광야의 길을 행복하게 동행했습니다. 순례자처럼 고고하고 아름답게 걸어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아름답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남방에 거할 때였습니다. 가나안의 북방 5개 나라 왕들이 연합군을 결성해 가나안 남방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하고 많은 포로들을 끌고 갔습니다. 그 포로들 사이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다른 곳은 다 약탈을 당했는데 아브라함이 있는 곳은 약탈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평안하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키운 318명의 용사로 연합군을 무찌르고 조카 롯을 구했습니다. 그는 왕이 아니었지만 왕들을 정복한 왕보다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위와 권위와 용기는 하나님을 강하게 의탁한 믿음에 그 원천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름다운 믿음의 순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 품위와 용기와 담대함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그것은 그가 믿음을 잃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름다워 힘이 있는 사람들이 사라를 빼앗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아내 사라로 인해 무서워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불신, 믿음 없음의 화살이 아브라함의 가슴을 꿰뚫었고 그 순간 그의 입에서 “그 여자는 내 여동생이다.”라는 거짓말이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고귀함이 어디 갔습니까? 아브라함의 용기와 품위가 어디 갔을까요? 믿음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과 그토록 품위 있게 동행하던 아브라함은 이전에 가졌던 신앙의 고상함을 잃어버렸고 그의 용기는 거짓과 비열함에 짓밟혔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따라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며, 고귀해지거나 비천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에 의지한다면 하나님과 더불어 자신 있게 걸어가고, 하늘의 천사들에 의해 둘러싸인 천국의 왕자가 될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여호와 앞에서 행복하고 거룩하고 그리고 또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신하는 순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순간 나쁜 방법을 따르려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이며, 또 많은 슬픔으로 나 자신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나를 고상하고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믿음이 나를 품위 있고 담대하게 할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의 고상함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활의 에너지도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의 에너자이저입니다. 믿음이 건강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모든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항상 우리 영혼의 심장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심장에서 떨어져나가는 순간 우리는 무기력해집니다. 믿음은 삼손의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삼손의 머리에 붙어 있을 때 삼손은 괴력을 발산했습니다. 젊은 사자를 맨손으로 찢고 자신을 결박한 밧줄을 불에 탄 풀처럼 끊어버렸으며 성문의 문짝을 뜯어 산으로 옮겼습니다.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없는 힘이 머리카락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믿음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머리에서 잘려나가는 순간 그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은 삼손의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믿음은 우리 영혼의 심장에 반드시 붙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서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가나안 북방 5개 나라 연합국의 왕들이 가나안 남방을 약탈하고 롯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갈 때 아브라함은 집에서 키운 318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쫓아가서 연합군을 무찌르고 롯을 구해서 돌아왔습니다. 5개국 연합군과 병사 318명은 비교가 안 되는 숫자입니다. 남방의 왕들이 모두 북방 연합군에 패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군대와 적군의 군대를 비교하며 적군을 무찌를 수 있을지 없을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남방 왕들이 모두 당했는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전혀 두려워한 기색이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약탈자들을 추격했습니다.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고 다만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기대했습니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나안 남방을 점령한 점령군들을 318명이 격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에너지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 믿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믿음은 활동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성령의 권능을 믿으십시오.
더 나아가서 영적인 삶의 모든 기쁨은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기쁨은 믿음 안에 있습니다. 믿음 밖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믿음 밖에는 불안, 두려움, 걱정, 근심 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믿어보십시오. 아내가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아내가 변할 때마다 흔들릴 것입니다. 돈을 믿어보십시오. 돈이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변할 때마다 그 기쁨도 오락가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처럼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기쁨의 뿌리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싹이 나면 기쁨의 싹이 날 것입니다. 그 싹에 꽃이 피면 기쁨의 꽃이 필 것입니다. 그 꽃에 열매가 맺으면 기쁨에도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기쁨은 믿음에 비례합니다. 믿음이 커질수록 기쁨이 커지고 믿음이 작아질수록 기쁨이 작아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만큼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 매달려 있습니다. 기쁨은 예수님 매달리기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12년 동안 인생의 모든 기쁨을 혈루증에 다 빼앗겼습니다. 삶이 처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자락에 매달리는 순간 그녀의 영혼 속으로 예수님의 기쁨이 확 들어왔습니다. 그 기쁨이 여인을 압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많이 매달릴수록 기쁨은 커집니다. 믿음이 예수님께 매달리기를 멈춘다면 기쁨도 사라질 것입니다. 기쁨은 예수님의 옷자락 매달리기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해서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기쁨을 자기가 찾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봅니다. 저는 이것을 <행위기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이 <행위기쁨>은 잘 못하면 쾌락에 빠질 수 있습니다. <행위기쁨>의 끝은 파멸입니다. 하지만 믿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저는 이 기쁨을 <믿음기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믿음기쁨>을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믿음기쁨>을 소유하세요. 이 기쁨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기쁨, 마르지 않는 기쁨, 흔들리지 않는 기쁨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기쁨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인 기쁨은 낙원의 새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의 가지에서만 그것의 둥지를 만들 것이다. 믿음이 반드시 피리를 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은 춤추지 않을 것이다.” 기쁨은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양에 비례해서 인생의 짐은 가벼워질 것이고, 하늘의 기쁨은 더욱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며, 여러분의 모든 존재는 더욱 고귀해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믿음은 신앙생활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말씀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믿음은 모든 날과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항상 신자의 삶에 작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특정한 날과 특정한 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날과 모든 시간에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주일 예배시간인 주일 오전 11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일 24시간 모든 시간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 전 교회 올 때도 필요하고 예배 후 집에 가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함께 모이는 주일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월요일에도 필요하고 화요일에도 필요하며 수요일과 목요일, 그리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도 필요합니다. 믿음은 교회 예배 시간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과 모든 시간에 항상 작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시간에만 믿음으로 살고 나머지는 불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예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을 광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광신자가 아닙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예배하지만 삶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특정한 장소에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에 다 가져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화장실에서도 필요하고 아침 식탁에도 필요하며 거실과 주방에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아침에 출근할 때 직장에도 가져가야 하고 마트와 시장에서 쇼핑이나 장을 볼 때도 가져가야 하며 친구들이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식당이나 커피숍에 갈 때도 가져가야 합니다. 믿음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필요하지만 잠자리에 들 때도 필요합니다. 믿음은 교회에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내 집 소파에도 가져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시간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자리에 믿음을 가져가는 것을 광신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믿음은 아주 평범하며 일상적인 생활의 문제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산다는 말은 일상이라는 말입니다.
친구 목사님 한 분이 사모님과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가려고 역에서 표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오는 중에 사모님과 사소한 다툼이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모님이 개표구 앞에서 표를 끊고 있을 때 목사님은 지갑을 개표구 선반에 툭하고 던졌습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지갑을 집어서 다시 던지고 또 다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교회 집사님이 목사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 목사님은 역에 갈 때 믿음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부부 싸움할 때 믿음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마트 계산대 위에도. 식당 계산대 위에도, 기차표를 끊는 개찰구 위에도 올려놓아야 합니다.
믿음은 특정한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삼손의 머리카락 같은 것입니다. 삼손은 머리카락을 하나님의 일을 할 때만 달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달고 있다가 친구들을 만날 때는 잘라서 집에 놓고 다닌 것이 아닙니다. 잠을 잘 때도 걸어갈 때도 삼손의 머리에는 긴 머리카락이 항상 달려 있었습니다. 믿음은 모세의 지팡이와 같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항상 여호와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홍해를 가를 때도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길을 갈 때도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섬길 때만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항상 들고 다녔습니다. 믿음은 삼손의 머리카락이고 모세의 지팡입니다. 믿음이라는 머리카락은 항상 내 영혼의 머리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별일이 없는 때에도 필요하지만 혼란스러울 때도 필요합니다. 기쁠 때도 필요하지만 슬플 때도 필요합니다. 좋을 때 찬송한다면 나쁠 때도 찬송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돈을 잃어버렸을 때도 작동해야 하고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때도 작동해야 하며 남에게 욕을 먹었을 때도, 화가 날 때도 작동해야 합니다. 믿음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순간에도 작동해야 합니다. 믿음은 특정한 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항상 작동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예배시간에만 작동시키지 마시고 삶 속에서도 작동시키십시오. 믿음은 항상 작동해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길에도 작동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팔을 작동시키는 힘입니다. 믿음은 비록 이 세상에 있지만 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립니다. 믿음으로 푸십시오. 믿음은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이며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미스터리, 수수께끼는 설명할 수 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느냐?”라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예, 저는 과거에 하나님의 기적들을 기대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하나님의 기적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내가 개척하면 하나님이 불치병도 고쳐주시고, 죽은 자도 살려주시는 기적을 막 일으켜주셔서 교회를 금방 부흥시켜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계속 기적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망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와 우리 교회에 기적을 주시지 않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속에서 계속해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일정한 방향으로 쉬지 않고 굴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시면서 당신의 역사를 여전히 진행하시는 중에도 아무도 모르게 저와 우리 교회에 계속해서 기적을 베풀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기적을 <고수의 기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참 구원자시라면 역사의 수레바퀴의 진행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믿음의 눈이 아니면 결코 볼 수 없도록 신자들의 삶을 이끌어 가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참다운 기적이며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고수이셨습니다. 그 고수가 일으키는 기적은 믿음의 눈이 아니면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하수였습니다.
BC458년, 학사이며 제사장이었던 에스라가 유대인 1774(1775명)명과 함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의 일입니다. 에스라는 왕에게 길에서 적군을 막고 도와줄 보병과 마병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은보석과 많은 재물을 갖고 1800km를 여행해야 합니다. 아무런 군사적인 도움 없이 가는 것은 매우 큰 모험입니다. 그럼에도 에스라는 기도 후에 아무런 군사적인 도움 없이 출발했습니다. 1775명은 4개월 만에 아무 일이 없이 예루살렘까지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포로가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에게는 어떤 해로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에스라와 그 일행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사회의 많은 부분이 마비가 됐습니다. 교회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교회가 마치 코로나19의 진원지처럼 됐습니다. 사람들이 교회가 지긋지긋하다고 말을 합니다. 왜 하나님이 교회를 도와주시지 않는가? 너무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며 괴롭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셔서 이 상황을 끝내주시고 한국교회에 반전을 주시지 않으시나?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이 정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정확하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변동이나 요동도 없습니다. 코로나19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이 가만히 계신지 그분의 자녀들이 답답해 하지만 일상의 평범한 속에서, 역사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당신의 뜻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고수이십니다. 사람은 모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그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잠21:30>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
사람은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바꾸거나 알 수 없습니다. 사악한 자들은 꾀를 부리고 음모를 꾸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역사를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뜻대로 역사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음모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하나씩 이루어가십니다. 역사는 절대로 악인들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끌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마치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때로 억울해도 때로는 분해도 의인은 이것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수이십니다. 하나님은 고수 중에도 고수이십니다. 하수인 인생이 고수인 하나님의 뜻을 몰라 불평하고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시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예수님께 음식이 매우 급했습니다. 얼마나 음식을 빨리 드시고 싶으셨을까요?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탄의 유혹처럼 예수님 발에 밟히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 그 자리에서 드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초보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초보가 아니라 고수이십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처소로 돌아가셔서 음식을 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서 먹이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떡을 벌 수 있는 힘과 건강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평범함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기구를 방해하지 않으시면서 그가 계획하신 목적을 이끌어내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평범한 수단을 통해서 그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잘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일 속에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보실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90년대 중반에 전도사로 사역할 때 한 달 사례비로 300,000만원을 받았습니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후배가 여기서 가까운 대기업에 취직을 했습니다. 입사 첫 해 12월에 성과급을 일시불로 1천 만 원을 받았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제 사례가 얼마나 적었는지 아시겠죠? 제가 2003년에 서울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입니다. 서초동에 있는 주상복합아파트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아파트 한 달 관리비가 130만원이었습니다. 그때 제 한 달 사례비가 120만원 정도였습니다. 정말 많지 않은 사례였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나 부목사 때나 그리고 지금이나 저는 항상 똑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전도사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부러운 게 없었습니다. 저는 전도사 때도 부요했고 부목사 때도 부족함이 없었고 지금도 마음이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 제 잔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게 베푸신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닐까요? 저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제 믿음은 지금도 하나님의 팔을 움직이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팔을 움직이셔서 저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교회와 여러분과 저를 위해 당신의 보이지 않는 팔을 펴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진행하는 것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짜 기적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고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십시오. 성령님의 권능을 믿으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사 살리라” 이 예언의 말씀을 최초로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은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할 때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받은 것은 BC 7세기 말입니다(BC 612-605년경). 신흥제국 바벨론이 급부상할 때입니다. 바벨론은 당시 근동 북부 지역의 패권자였던 앗수르를 BC612년에 함락해버립니다. 근동의 남부 지역의 강자인 이집트는 BC605년에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에 패합니다. 유다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불안 정국이 계속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BC605년에 유다를 점령하고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유다는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통치자들은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압제했습니다.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힘 있는 자들의 횡포로 선량한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하박국 선지자는 망루에 서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마치 우리 시대 같지 않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굽었습니다. 거짓이 진실처럼 위장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이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들이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불의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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