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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터는 히브리어로 솨트인데 이 말은 “기초, 지주, 버팀, 토대, 규율, 기강”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솨트는 국가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법, 정의, 질서, 도덕 등을 가리킵니다. 터가 무너진다는 말은 국가 기강이 무너진다는 의미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해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기강이 바로 선 나라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안정적입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두려움이 없습니다. 반면에 법과 질서가 무너져 사회의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악인이 활개를 쳐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11편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다닐 때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붙은 귀신을 음악으로 내쫓을 정도로 탁월한 영성의 사람입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손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입니다.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용사 중에 용사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지혜롭게 행하는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다윗은 왕과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그는 도망다녀야 할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아무런 잘못이 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 시대에 다윗처럼 억울하게 쫓겨다니며 숨어사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숨어 있을 때 환난 당한 사람들, 빚진 사람들, 원통한 사람들 400명가량이 다윗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삼상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들이 다윗에게 몰려든 이유는 이들도 다윗처럼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 시대는 악인에게 의인이 쫓기고, 빼앗기고, 박해를 받고, 도망치며 숨어 사는 사회였습니다. 왕이 올곧으면 충신이 많아져 간신들이 설자리가 없어지지만 왕이 불의하면 간신들이 득세하고 충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사울 왕 시대가 그랬습니다. 다윗과 그의 신하들은 한 목소리로 불의한 사회를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인은 인생과 공동체와 공의의 터가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말성경은 “기초가 무너지고 있는데 의인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KJV 성경은 “만약 기초가 무너진다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If the foundations be destroyed, what can the righteous do?) 이 물음 속에는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이 감돌고 있으며, 또한 무력감이 담겨 있습니다. 무슨 소용이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악인이 아무리 득세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의 터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으로 도망하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어떻게 변할지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로 우리 사회의 근간과 우리 시대 교회의 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만약 터가 무너진다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우리 사회 터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이 시대에 교회의 터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기초는 흔들리면 안 됩니다. 터가 견고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 우리나라, 교회, 그리고 우리 개인의 인생과 가정의 기초가 결코 흔들림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간 저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무너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반면에 반드시 무너질 터들이 있습니다. 그런 터들이 무너졌을 때 의인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결코 무너질 수 없는 터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곳의 터는 견고합니까? 하나님은 하늘의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고 땅 아래에 있는 어떤 것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기초를 하나 세우셨습니다. 이 기초는 세상 왕의 권세도 지옥의 권세도 흔들 수 없습니다. 이 터는 우리가 서 있는 땅이 종잇장처럼 말리고 저 우주의 별이 우박처럼 떨어지며 저 우주 공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해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것입니다. 이 터는 하나님 외에 보이는 이 세상이나 보이지 않는 저 영원한 세계의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 터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그 터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쌍용동 2103번지는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터입니다. 여러분은 그 터 위에 서 있습니다. 이 터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터는 지옥의 권세도 흔들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터가 되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21:33, 마24:35, 막13:31)고 하셨습니다. 또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눅16:17)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터가 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터가 아님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터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터의 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성경은 <터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이 터를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바울 사도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딤후3:16).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데오프뉴마토스”입니다. 데오는 하나님, 프뉴마는 영, 호흡, 바람, 성령,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데오프뉴마토스는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호흡이 불어넣어진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생명이 불어넣어진 책이라는 뜻입니다. 왜 성경이 터가 될까요? 그것은 성경에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신앙의 터를 삼기 위해 당신의 호흡이 들어간 책을 만드셨습니다. 터의 책에 변칙이 있을까요? 터의 책에 거짓이 있을까요? 터의 책에 위선이 있을까요? 거짓, 위선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만약 성경이 가짜라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경은 사람들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했다(벧후1:21)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졌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진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하나님의 뜻만을 기록한 책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뜻이 단 일점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외엔 그 어떤 인간적인 것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순수한 하나님의 책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해서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걸러낸 은과 같다’(시12:6)라고 했습니다. “일곱 번”이라는 말은 “완전히”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서 100퍼센트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 조금의 의심도 없이 순전하고 고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의인은 바로 이 순결한 말씀 위에 서 있습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성경말씀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천지가 없어져도 이 성경 위에 서 있는 의인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성경 말씀 위에 서기를 제안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이 성경 말씀 위에 건축하기를 요청합니다. 이 성경 위에 서십시오. 터의 책에 서십시오. 성경 위에 선다면 이 세상 어떤 권세도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저 지옥의 권세도, 하늘의 대천사장도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터가 흔들린다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만약 이 <터의 책>이 무너질 수 있다면 인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 보다 인류를 더 참혹하게 하는 일이 있을까요? 만약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면 인류는 절망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많은 일들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 최고의 소망, 최후의 소망은 오직 성경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참된 것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 터를 흔들고 싶어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만약 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면 성경을 남자와 여자와 제3의 성을 만드셨다고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불온서적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시대의 금서가 될 것 될 것입니다. 가장 거룩한 책이, 가장 완전한 책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생명의 책이 불온서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보다 더 큰 인류의 재앙이 있을까요? 이것보다 큰 혼란이 있을까요? 생명의 책이 불온서적이 된다는 것은 인류가 침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터입니다. 성경은 <터의 책>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 된 터를 찾는 구도자를 위하여 터의 책인 성경을 사수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터의 책을 지켜주십시오. <터의 책>으로 인생의 터를 삼으십시오. <터의 책> 위에 서십시오. 터의 책에서 결코 터나지 마십시오. 이 터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기독교의 <터의 책>에 기록된 사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터의 책>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누가복음 1장 1절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했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의원 누가가 기록한 사실은 무엇일까요?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터의 책>에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입니다. 죄인을 대신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과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놋뱀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영적인 놋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놋뱀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영혼에 있는 놋뱀의 독이 해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터의 책>의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산산이 부서지되 조각마다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터는 사실입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원 누가의 증언처럼 우리 중에 이루어진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무너지지만 사실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터의 책은 사실입니다. 터의 책은 진실입니다.
<터의 책>에 기록된 기독교의 터가 되는 교리를 하나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교리는 무너지지 않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터의 교리>라고 하고 싶습니다. <터의 책>에는 <터의 교리>가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수 천년 동안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말하는 기독교의 교리 하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신칭의>는 <터의 책>에 기록된 인류의 <구원 공식>입니다.
이 <구원 공식>은 너무나 쉽습니다. 믿으면 구원, 이신칭의. 혹시 구원 공식이 너무 쉬워서 하찮게 보이십니까? 저는 구원 공식이 너무 쉬워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쉬워서 저 같은 사람이 구원받았습니다. 만약 구원공식이 미적분이나 확률 통계처럼 매우 어렵다면 저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공식이 더하기 보다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두 자리, 세 자리 덧셈이 아니라 한 자리 수 덧셈입니다. 1+1=2, 2+2=4,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치원을 나오지 않아도 압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쉬운 공식이 이신칭의, 구원공식입니다. 이것은 뺄 셈 보다도 쉽고, 곱셈과 나눗셈보다는 훨씬 더 쉬우며 인수분해, 미분적분, 확률, 통계 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쉽습니다. 만약 <터의 교리>가 미분적분, 확률, 통계 보다 더 어렵다면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9/10는 지옥에 가지 않겠습니까? 천국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등 명문대를 나오거나 머리가 좋은 사람들의 차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지옥은 머리 나쁜 사람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구원의 기준이 머리가 아님을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구원공식을 1+1=2 보다 더 쉽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인류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심지어 학교를 다니지 않은 베드로 같은 사람도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래서 저는 베다니의 어떤 죄인이었던 여인처럼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주님 발에 입 맞추고, 머리털로 발을 씻기며 무릎으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믿으면 구원, 이신칭의, 하나님이 구원 공식을 아주 쉽게 만드신 이유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원공식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의인과 선지자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된 복음이 이곳까지 오기 위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공식을 위해 자기를 버리며 희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이신칭의, 구원 공식은 쉽지만 결코 쉽게 만들어진 공식은 아닙니다. 이 공식을 감사함으로 내 것으로 받읍시다.
그런데 만약 이 <터의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면 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신칭의, 이것이 아무 효험이 없는 망상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될까요? 이 구원 공식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어떤 방법으로도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불안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고뇌하다가 인생의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신칭의 구원공식은 무너질 수 없는 터의 책에 기록된 <터의 교리>입니다. 이 구원공식은 진실입니다. 이신칭의는 사실입니다.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 구원공식으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영혼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공식으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가톨릭 사제였습니다. 루터는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 온갖 수행을 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고해성사를 했지만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를 순례하던 중에 라테란 성당에 가게 됩니다. 라테란 성당은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성당 중에 첫째가는 지위를 가진 곳입니다.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는 성당입니다. 이 성당 맞은편에 <거룩한 계단>(스탈라 상타)라는 곳이 있습니다. 28개의 나무로 덧씌운 하얀 대리석 계단입니다. 예수께서 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나갈 때 밟았던 계단이라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들이 예루살렘에서 라테란으로 옮겨놨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1세)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와 라테라노 궁전에 설치했는데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 때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이 계단을 무릎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9년간의 속죄를 보증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에 온 순례자들이 이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순례 중에 루터는 라테란 성당의 미사에 참석하고 싶었으나 순례자가 너무 많아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는데 그의 마음 한 편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계단을 올라갔을까? 그들은 진정 속죄를 받았을까?"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계단 중에 하나가 몹시 닳아서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 계단은 바로 그리스도가 무릎을 꿇은 계단으로 여기에는 십자가 표시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계단만은 속죄의 기간이 2배로 18년이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미신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십자가 표시를 바라보던 루터에게 문득 로마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거의 외우다시피 익숙해진 구절인데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성경말씀인 것처럼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이 말씀을 거듭 되뇌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새파랗게 되어서 계단 중간에 벌떡 일어서 뒤에서 올라오는 순례자들을 밀치듯이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 계단 끝까지 올라가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인의 대신이 되신 것만 믿으면 충분하다!"
1545년 라틴어로 출간된 루터 전집 제1권 서문에는 영혼의 기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로마서 1:17)는 말씀에 집중하였다. 그 순간 나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새로운 느낌을 받았으며 성경 전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갔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란 말을 굉장한 혐오를 가지고 배척했으나 이제는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그야말로 가장 말씀인 사실을 발견했다. 바울이 말한 로마서 말씀은 나를 천국으로 이끌었다." 루터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은 오랜 수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말씀입니다. 루터는 터의 책에 기록된 터의 교리로 구원과 확신과 평안을 얻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수도생활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영적인 터가 아닌 결국 이 세상의 무너질 터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세상 정부의 터, 사업의 터, 재물의 터, 세상 재미의 터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믿음의 터들은 언젠가 반드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 육적인 터들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무너짐은 쉬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의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때 이 세상에 우리의 믿음을 보입시다. 육신의 터가 무너질 때 이 세상의 많은 속물들이 하는 것처럼 말하거나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이 나는 머리에 손을 얹고 나는 이제 망했다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망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구나!”라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우리의 견고한 터이십니다.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연결해주는 사닥다리입시다. 이 사닥다리는 육적인 터가 무너진다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부러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육적인 우리의 터들이 무너질 때 그 불행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욥처럼 육적인 터가 무너졌을 때 세상에 우리의 믿음을 보입시다.
<욥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만일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우리의 육적인 터가 무너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의인은 옳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 유복하고 평안할 때는 비교적 정직하고 경건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과 가정이 위기에 처해져 밝은 전망이 전혀 없을 때는 정직해진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육적인 터들이 흔들릴 때는 경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미혹의 때입니다. 사탄이 한 손에는 부귀영화를, 다른 한 손에는 고통이라는 창을 들고 자신을 섬기면 부귀영화를 주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고통을 주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왕과 무서운 계약을 맺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왕의 협박에 무릎을 꿇습니까? 그들은 세상을 얻었지만 영혼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천국을 팔고 지옥을 샀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어떤 터가 무너져도 영원을 잃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잃는 사람들은 바보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영혼 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을 잃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무릎을 꿇지 마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믿고 의를 행하십시오.
만약 육적인 터가 무너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의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터가 무너진다면 사람들은 매우 이기적이고 포악해질 것입니다. 그때 의인들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를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사기 범죄가 더 늘었다고 합니다. 육적인 터가 무너져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멕시코에서는 코로나19로 마약조직이 더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합니다. 육적인 터가 무너지면 세상이 더 패역해져갑니다. 코로나19 이후 이혼이 더 늘고 아동학대와 가정 폭력이 더 늘었다고 합니다. 육적인 터가 무너지면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더 식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세상 조류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더 사랑합시다.
만약 터가 무너진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더 분명하고 더 뚜렷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대낮에는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가 지고 밤이 돼야 별이 보입니다. 반딧불은 낮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아주 선명하게 개똥벌레의 불빛이 보입니다. 성경의 빛은 캄캄한 고난의 밤에 성도들의 심령의 눈에 잘 보입니다. 노아는 방주에 노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터가 무너졌을 때 노아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육적인 터가 무너질 때 우리 인생의 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십시오. 4-5년 전입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의 남편이 암에 걸렸습니다. 권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얼마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헌금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육적인 터가 흔들리자 하나님을 더 의지한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아는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악성 뇌종양인데 전에는 하나님을 잘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프니까 하나님이 자꾸 생각이 난다며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육적인 터가 무너질 때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멀어지지만 의인에게는 하나님이 더 가까이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뚜렷하게 들릴 것입니다. C. S. 루이스라는 사람은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터가 무너진다면 의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기초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이 마당에, 의롭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말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로운 것이 소용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터가 무너질지라도 의롭다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의인은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곳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초가 무너지고 있는데 의인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터가 무너져도 의인은 별 수 있습니다. 터가 무너질 때 의인은 할 일이 있습니다. 터가 무너질 때 하나님은 의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터가 흔들릴 때 사람들은 시인에게 산으로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께 피하였기 때문에 산으로 도망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우리의 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터는 영원한 터입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합니다. 악한 사람들이 나라의 터가 흔들고 있습니다. 거짓이 진리처럼 변하고 정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악한 세력들이 영적인 터를 흔들고 있습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터가 흔들리는 때에 의인들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역사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시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이 민족의 운명을 책임져달라고 기도합시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의 터가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때 욥처럼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보입시다. 이 세상의 터가 무너질 때 영원한 터가 들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터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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