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똑바로, 앞으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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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3:13-14
주일오전예배 | 2021-01-0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 나의 주인으로 믿으십니까? ! 반드시!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 구원은 완벽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불완전하거나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내가 무엇을 보탤 수도 없고 보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은 완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용납하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믿는 자는 어떤 정죄도 받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도 할 수 없습니다. 마귀도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정죄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은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령님의 사역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계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진행 중이며, 우리는 영광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항상 발견되어야 할 상태는 항상 진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자의 좌우명은 똑바로, 앞으로, 그리고 위로!”이어야 합니다. 성경 속에서 기독교인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거의 대부분의 비유는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똑바로, 앞으로, 그리고 위로!” 우리는 하나님의 밭의 식물들입니다. 우리들은 자라도록 뿌림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428절에 예수님은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어린 아기가 있고, 청년이 있으며 장년이 있습니다. 계속 자랍니다. 성경은 기독교인을 순례자로 묘사합니다. 순례자는 세상에 뿌리박고 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순례자는 힘을 얻고 더 얻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군사, 씨름하는 자에 비유됩니다. 이들은 대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고 집중시켜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달리기를 하는 경주자에 비유됩니다. 이것은 오늘 읽은 본문 속의 비유입니다. 경주자는 자기 자리만 지키고 자기 위치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매순간 목표에 다가서도록 앞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진보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건강한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은혜 가운데 자라가며 믿음에 덕을 더하고” “주를 알기 위해 계속 좇아가며그리스도 안에 저장된 풍성함에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매일 받는 동안에 자신의 가장 나은 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 중에 나타난 바울의 진술을 통해 우리는 네 가지 측면에서 그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현재적 상태를 공정히 평가한다는 점에서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둘째는, 자신의 과거를 적절한 위치에 둔다는 점에서 -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셋째로, 보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향하여 간절히 동경한다는 점에서 -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넷째로, 자기가 소원했던 것들을 얻기 위해 실제적으로 진력한다는 점에서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첫째, 자신의 현재적 상태를 공정히 평가하고 있는 바울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의 창고에 있는 것들에 대해 재고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가 계산을 해보았을 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후회하는 불만족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은혜의 표시였고 성도들이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하면 항상 도달하게 되는 결론입니다. 크리소스톰이 한 말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아주 무게가 있는 말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달성한 것들에 대해 만족했더라면 좀 더 나아가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에 그만이라고 외칩니다. 자만은 진보의 종지부를 찍는 죽음의 종소리를 울리게 합니다. 현재까지 이룬 업적에 대해서 조금도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서 사도 바울처럼 위대하게 살다간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최고의 순교자였고,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에 으뜸가는 사도였습니다. 계시에 대해 말한다 해도 바울 같은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13권의 성경을 기록했고, 3층천에 끌려 올라가 거기서 가히 말로 할 수 없는 일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신학자, 최고의 선교사, 최고의 사도, 최고의 순교자, 최고의 그리스도인. 바울은 최고라는 말이 그의 이름 앞에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다간 사람을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저는 찾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탁월한 이 크리스천이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보잘 것 없는 크리스천이 잡은 줄로 여긴다면 얼마나 허영적이고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했는데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기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요? 자만심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적인 상처는 측정하기 힘들 만큼 큽니다. 그것은 사람을 약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중에는 이미 잡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자신들의 입술로 자기들을 칭찬하고 자기들의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은 은혜의 고상한 자리에 이르렀고 현재는 놀라운 영적 상태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자신의 현재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선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이 많이 있고, 다른 사람의 찬사를 받을만하며 높이 처들 수 있는 장점이 굉장히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영적 상태를 스스로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신의 영적 상태가 굉장하다며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7:18)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니이다.”(18:11)라고 기도했지만 예수님께 가장 많은 꾸중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라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너는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3:17). 자아도취는 영적 타락의 어머니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인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말로 높이기보다는 진심으로 낮춥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기 때문에 결코 자아도취의 감정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입에서 나온 말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입니다. 욥은 세 친구 앞에서 쉬지 않고 무죄함을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욥은 무죄했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5-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는 인간이 얼마나 미천한지 깨닫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칭찬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것은 악한 냄새뿐입니다. 욥이 자신의 무고함을 고백했을 때 일어난 것이 무엇입니까? 친구들과의 말싸움뿐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끊임없이 말다툼을 했습니다. 옆에서 네 사람을 보고 있던 엘리후는 견디다 못해 욥과 세 사람에게 화를 냈습니다. 자만하는 사람에게서는 악한 냄새가 날 뿐입니다. 그에게서 선한 것은 결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영적 상태에 스스로 만족한다거나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높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 신앙에 결코 만족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현재 영적 상태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초대 교회 이단 중에 율법폐기론(도덕률폐기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구약의 율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이단 사상입니다. 이들은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불신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단 사상은 지금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일명 구원파(기쁜소식선교회)라고 합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나올 때 완전한 나비가 되어서 나오지 애벌레가 고치에서 나와 서서히 나비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믿는 순간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실 때 즉시로 사하셨지 조금씩 사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에 믿는 자는 더 이상 죄와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서서히 받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많은 부분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속죄는 완전한 속죄로 우리가 믿을 때 완전히 구원받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아멘? 그렇다면 구원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결코 떨어지거나 변개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는 순간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에는 불신앙의 악한 심령이 있고, 우리 밖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부르짖어야 하고 아직 잡지 못한 것을 소유해야 합니다. 자아로 가득한 사람은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2021년이 시작됐습니다. 나태한 속박을 벗어버리십시오. 자만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영적 상태에서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둘째, 자신의 과거를 아주 적절하게 조망하고 있는 바울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뜻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늘 찬송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지난 날 자신이 지었던 죄들을 잊었다는 말일까요? 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잊은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같은 반에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분이 있었습니다. 오래 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게는 40, 많게는 50대 정도 정도 되신 분이었습니다.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좋아 보이는 분이였습니다. 동기들은 그 분을 큰 형처럼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분이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전도 한다고 술집에 갔다가 술에 빠져 신학교를 그만 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니기 전에 가졌던 나쁜 습관을 은혜 받고 모두 이겼다고 생각하고 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술집을 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분의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큰 자만입니다. 옛 습관이 그 분 속에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가 방심한 틈에 다시 나와 그 분을 물어버린 것입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신학교에 왔지만 결국 1년도 못돼 옛 습관이라는 뱀에 물려 자신을 비관하며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연약한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험담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 게임이나 술 담배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 죄악의 쓴 뿌리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자신의 육신적인 것들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그것은 정말 잘 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거나 우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나쁜 기질이 어느 순간에 다시 올라와 사자처럼 물지 모릅니다. 부패한 기질은 언제든지 다시 올라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잊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지금 자신을 달리기를 하는 경주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경기를 하는 어떤 경주자가 반 쯤 갔을 때 뒤돌아보고 그가 이미 앞선 것을 기뻐한다면 그는 그 경주에서 패하고 말 것입니다. 달리는 중에 앞과 뒤를 살펴보며 자신이 중간쯤에 있는 것에 낙심한다면 반드시 경기에서 지고 말 것입니다. 경주자에게 유일한 목표는 자기가 달려온 길은 모두 잊어버리고 앞에 남은 분량만을 생각하고 앞으로 앞으로 계속 달려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달려온 것은 잊어버리십시오. 잘한 것을 생각하며 자만에 빠지지 마십시오. 잘 못한 것 때문에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나의 인생의 나머지 분량만을 생각하며 앞으로 달려가십시오. 바울이 잊어버렸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달려온 지난날입니다.  

지난 날 많은 시간 동안 주님을 위해 달려오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슴 속에 주님을 위한 뜨거운 열정이 가득 찼던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능력 있게 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힘들게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잘 한 것입니다. 너무 잘 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자만하거나 낙심하거나 우울해하지 마십시오. 이제까지 달려온 것은 잊어버립시오.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멈추지 마십시오. 앞에 나에게 맡겨진 분량을 생각하시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또 다른 봉사를 위해 계속 나아가십시오. 과거에 얽매여 과거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앞으로 달려가는 일에 결코 멈춰서는 안 됩니다. 멈출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앞으로, 위로, 위로, 계속, 계속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폴레옹에게 왜 계속 전쟁을 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그는 나는 전쟁의 자녀라오. 승리는 현재의 내가 되게 하였어요. 또 승리는 반드시 나를 지탱해준다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영적인 전쟁의 자녀입니다. 교회는 오직 싸울 때에 그리고 승리하며 앞으로 달려가고 또 승리하기 위해 나아갈 때 살아 있습니다. 지난날에 은혜 받은 것에 만족하지 맙시다. 지난날에 봉사한 일은 잊어버립시다. 더 나은 하나님의 일, 더 큰 하나님의 뜻을 향해 더, , 더 계속 앞으로 위로 나아가십시오.  

이제 세 번째 문제점을 다뤄보겠습니다. 현재와 과거에 대해 올바로 조망한 바울은 미래가 영광스럽게 되기를 간절히 동경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놓아버렸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것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뒤에 있는 것을 동경하지 마시고 앞에 있는 더 나은 것을 동경하십시오. 그것을 잡으려고 하십시오.  

본문에서 바울은 한 경주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경주자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전력을 다해 앞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달려가고 있는 그 사람은 몸을 앞쪽으로 비스듬히 내밀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앞에 있는 목표 지점에 가 있습니다. 아직 목표 지점에 발이 닿지도 않았지만 그곳에 몸을 던져 놓은 것처럼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저 미래에 하나님이 주신 더 나은 것에 쏠려 있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목표 지점에 가 있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것 때문에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지난 날 무엇 때문에 억울해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습니다. 앞에 있는 것 때문에 흥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2021년입니다. 이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십시오. 기억하지 마세요. 앞으로 몸을 내밀고 손을 앞으로 쭉 뻗으십시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향해 자신을 내 던져야 합니다. 여기 잡다는 말이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 손을 앞으로 내밀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두 손을 다 내밀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끝까지 앞으로 손을 내민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 한 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병은 중풍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손이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니요?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누구를 향해 내밀었을까요? 주님을 향해 내밀었습니다. 성경은 손을 내밀었을 때 손이 온전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손은 마른 채로 그대로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손을 내밀었을 때 온전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잡을 수 없습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민 손을 거두지 마세요. 끝까지 손을 내밀고 계세요. 손을 내밀어 주님 주시는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할 수 있는 한, 경건하고, 열심이 있고, 또 유익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할 뿐만 아니라, 보다 더 나은 것을 소망하고 옛 육체에 박차를 가하고,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연약한 영과 싸워야 합니다.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에서 아시안 게임이 있었습니다. 태권도 여자 57kg 급 결승전에 한국의 이아름 선수와 중국 뤄쭝스 선수가 맞붙었습니다. 4초 남겨놓고 경기가 중단됐습니다. 이대로 끝나면 이아름 선수가 금메달입니다. 그런데 1초를 남겨 놓고 이아름 선수가 손을 치켜들어 우승 세레모니를 하다가 가슴에 킥을 허용해 역전이 됐습니다. 남은 시간이 1초였습니다. 이아름 선수는 2014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은메달을 땄습니다. 체조 남자 도마 결승선에서 김한솔 선수가 완벽한 착지를 했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김한솔 선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심판에게 경기를 마쳤다는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고 승리의 세레모니를 하는 바람에 감정이 되어 은메달을 땄습니다. 지난 104일 베를린에서 사이클 경기가 있었습니다. 10m 남겨두고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승리의 세레모니를 하는 순간 2위였던 선수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측정결과 바퀴가 15cm 정도 먼저 들어갔습니다.  

넷째로, 바울이 자신이 소원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이라고 말을 합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오직 한 일이라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NIV 성경은 내가 하는 오직 한 가지 것’(But one thing I do)이라고 했습니다. KJV내가 하는 오직 이 한 가지 것’(but this one thing I do)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부가 됐습니다. 바울도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장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는 전쟁이 많던 시대였기 때문에 장막을 만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습니다. 전해는 기록에 따르면 바울은 아주 바쁘게 장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벌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당대에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장막을 만들고, 책을 쓰고, 설교를 하고, 사람들을 방문하고, 밤낮 쉬지 않고 갖가지 일을 많이 했지만 이 모든 일은 그가 하는 오직 한 가지 일을 추구하는데 부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오직 한 가지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 <13-14>
  •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하나님이 위에서 자신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여기 부르다는 말이 헬라어로 클레시스입니다. 클레시스는 소리쳐 부르다, 호출하다, 소환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에서 큰 소리로 호출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땅에서 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아래에서 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났다고 합니다. 바울을 부르는 소리는 지옥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라 천국에서 들린 소리입니다. 저 위에서 난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구원의 소리입니다. 하늘의 상급의 소리입니다. 생명의 소리입니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 하늘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 위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늘에서 부르셨습니다. 아래에서 난 소리가 아닙니다. 땅에서 난 소리가 아닙니다. 그 소리는 지옥에서 난 소리가 아닙니다. 그 소리는 천국 생명의 소리입니다. 혹시 나는 귀로 들은 적이 없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늘에서 우리를 불렀다는 증거는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부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들려진 소리입니다. 교회는 위에서 들려진 소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증거입니다. 여기에 우리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바울이 하늘의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부름을 향하여 달려갑시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를 잊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일명 없다시리즈라는 것이 있습니다. 10대에는 이 없다. 10대는 철이 없는 때입니다. 20대에는 이 없다. 30대에는 이 없다. 40대에는 이 없다. 50대에는 이 없다. 60대에는 이 없다. 70대에는 가 없다. 80대에는 가 없다. 90대에는 시간이 없다. 100대에는 다 필요없다. 우리는 지금 많은 것을 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가진 것,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것이, 다 필요 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하나만은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에서 불렀다는 그 믿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꼭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향해 달려갑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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