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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평화로운 토끼나라에 아주 커다란 뱀이 나타났습니다. 뱀은 날마다 토끼를 한 마리씩 잡아먹었습니다. 토끼 나라의 평화는 하루아침에 깨졌습니다. 토끼들은 무서워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하루하루를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뱀에게 사랑하는 짝을 잃고, 자신의 왼쪽 발까지 물어뜯긴 토끼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토끼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살아 있지만 산다고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저 뱀을 물리치고 이전의 평화로운 토끼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까? 평화를 되찾으려면 저 흉악한 뱀을 없애는 방법 밖에 없다.’ 토끼는 오랜 고심 끝에 결심을 하고 밖으로 나가 형영색색의 예쁜 독버섯들을 마구 뜯어먹고 뱀의 굴로 갔습니다. 가는 중에 독이 몸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은 마비되기 시작했습니다. 토끼는 비틀거리며 뱀의 굴에 도착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고약하고 흉악한 놈아! 나와 봐라!” 뱀은 기가 막혔습니다. “저게 죽고 싶어 미쳤나!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잘 됐다.” 뱀은 굴에서 스르륵 나와 토끼를 단숨에 꿀꺽 삼켜버리고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습니다. 뱀은 그 굴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토끼나라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절름발이 토끼가 자신을 희생함으로 토끼나라의 평화를 회복한 것입니다.
뱀이 에덴의 평화를 깼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류는 수많은 세월 동안 뱀의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도 뱀의 공포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뱀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전염병으로 세상이 참 불안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강하고 담대하세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뱀의 먹이로 내어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에 평안을 빼앗기지 마세요.
이 시간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방금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쉽게 망각해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에 총체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을 때 모세가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셋째, 우리는 간혹 기도조차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수 없을 때 모세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며 영적 교훈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두려움에 대해 치매에 걸린 사람들
먼저 방금 있었던 하나님의 고라당 심판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이스라엘의 망각증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모세는 고라당의 반역 사건을 처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도들이 일반사람들처럼 죽으면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지만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삼켜버리면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한 것임을 알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말대로 땅이 입을 벌려 역도들과 그들의 처자와 유아 그리고 그들의 전 재산을 삼켜버렸습니다. 전무후무한 재앙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심판이 있은 후에도 후회나 회개는커녕 여전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41절에 ‘이튿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튿날’이라는 말은 ‘곧바로’, ‘바로 이어서’라는 의미입니다. 자 보세요. 고라가 자기를 따르는 회중들을 회막 앞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지휘관 250명이 자기 향로를 들고 회막 앞에 모였습니다. 땅이 갈라져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삼켰고, 성소에서 불이 나와 250명을 살랐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 속에서 향로 250개를 꺼내 이스라엘 진 밖에 나가 향로 속에 있는 불을 쏟아버렸습니다. 이 모든 일에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요? 하루 온 종일 걸렸을 것입니다. 저녁이 되어 회중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날이 밝자 다시 모여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41절 끝에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라고 했습니다. 42절에는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을 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침에 갑자기 모였을까요?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위해 무리를 지은 것입니다. 이들의 원망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은 후 바로 시작되었고 밤사이에 이스라엘 가운데 두루 퍼져 이튿날 해가 뜨자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한 것입니다. 이들은 전날 밤부터 모임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그 다음날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은 직후 곧바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튿날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방금 전에 땅이 갈라져 고라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통째로 삼켰습니다. 그들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또 성소에서 불이 나와 250명을 태워버렸습니다. 이 심판의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목격했습니다. 이 심판이 진행될 때 그들은 아주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심판 후에 거의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다시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금방 잊어버린 것입니다. 뒤돌아서자마자 잊어버린 것입니다. 집에 가자마자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의 두려움에 대한 치매에 걸린 사람들 같았습니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은 자식이 밥을 주면 먹고 돌아서서 한두 발짝 가시다가 돌아서서 왜 밥을 주지 않느냐고 화를 낸다고 합니다. 자식들과 방금까지 웃으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화장실에 갔다 오더니 놀란 얼굴로 자녀들에게 당신들이 누군데 남의 집에 와있냐고 한답니다.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들과 가족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것이 치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 치매에 걸려 있었습니다. 방금 무서운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의 기도로 그 심판에서 제외됐습니다. 방금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도 잊고, 심판의 두려움도 잊고 다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저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종종 기도하다가, 또 성경을 보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좋습니다. 그 은혜를 깨달을 때는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깨달은 직후에 바로 화도 내고, 짜증도 낼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보고 기도하다가도 아내에게 짜증을 냅니다. ‘은혜 받고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짜증을 중지하지 못하고 계속 짜증을 냅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요. 이런 저를 보면서 ‘어떻게 받은 은혜를 이렇게 금방 잃어버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받은 은혜가 오래 가십니까? 주일 예배드리고 나가자마자 짜증내고 신호위반하면 안 됩니다. 찬송하고 기도한 후에 집에 가서 싸우면 안 됩니다. 은혜 받고 바로 죄 지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오랜 후에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 받은 말씀, 받은 사랑, 오래오래 기억합시다. 영적 치매환자, 은혜 치매환자, 하나님 치매환자가 되지 맙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 치매환자였습니다.
심판의 두려움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할 때 야레라는 히브리어를 습니다. 야레는 ‘두려워하다, 존경하다, 순종하다’는 뜻입니다. 이 두려움은 존경하는 두려움입니다. 순종하는 두려움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하고 아름다운 두려움입니다. 사악한 두려움이 아니라 의로운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삽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람을 멸망시킵니다. 히브리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바로 왕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남자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가 태어나면 살리라고 명령을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 산파들은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해 남자아이를 죽이지 않고 살립니다. 산파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때문에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을 더 번성하고 강하게 하셨습니다. 나라를 살린 것이 두려워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의 집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사람을 살리고 나라를 살립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고라는 자기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게 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대통령, 총리, 장관, 시장, 도지사 등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른다면 적어도 하늘이라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합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지도자는 오만해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결국 자기도 죽고 나라도 망하게 합니다. 고라 반역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2의 심판을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판의 두려움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두려움을 잊지 맙시다. 영적 치매환자가 되지 맙시다. 인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삽시다.
<벧전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2. 심판이 선언되었을 때
두 번째로 이스라엘에 총체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었을 때 모세가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고라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망각하고 다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식간에 멸하려 하니 너희는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 또는 몇몇 사람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심판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신 사건이 모두 네 번입니다. 그때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어떻게 중보기도를 했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출애굽 직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이라며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하고 축제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진멸하시겠다고 선업하십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지 않으시려면 내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달라며 중보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두 번째,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12 정탐꾼 중 10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에 대해 악평하는 말을 듣고 밤새도록 통곡한 후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전체를 전염병으로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근거로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해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그 자리에서 즉시로 사하십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고 누군가의 중보기도로 이스라엘이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우 중에 누군가의 잘 못을 보면 눈을 감거나 정죄하시고 그 사람이 깨닫고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그를 위해 중재의 기도를 하십시오. 제가 잘 못하면 저를 정죄하지 마시고 뉘우치고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 고라가 다단, 아비람, 온, 세 장로와 함께 당을 만들고 군 지휘관 250명을 끌어들여 자기들이 제사장도 하고 최고 지도자도 하겠다며 모세와 아론을 반역했습니다. 반역 중에 온은 회개하고 돌아섭니다. 하지만 고라는 회개하지 않고 회중을 모아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체제전복을 꾀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회중 전체를 심판하시겠다며 모세에게 그들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 때 모세는 범죄한 한 사람만 심판하시고 회중은 용서해달라고 중보기도를 드려 하나님의 심판을 막습니다.
<민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이르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네 번째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총체적인 심판 선언 네 번 중에 두 번이 고라의 반역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라의 반역이 광야 40년 역사에서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땅이 입을 벌려 역도들을 순식간에 삼켜버리고 성소에서 불이 나와 반역자들을 태우는 심판을 보고도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여전히 원망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다 멸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때도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그런데 이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는 했지만 어떤 기도도 올리지 못합니다. 앞의 세 사건은 모두 모세의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중보기도 내용이 없습니다. 그냥 엎드리기만 합니다.
<45절>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
엎드렸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팔입니다. 나팔은 ‘떨어뜨리다, 굴종하다, 간구하다’는 뜻입니다. 엎드렸다는 말 앞에 히브리 성경에는 얼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말은 기도했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문맥상으로 볼 때 고개를 떨어뜨린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위기 순간에 제대로 기도를 올리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는 왜 기도를 올리지 못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이어지는 원망, 쉬지 않는 불평, 계속되는 죄악으로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됐을 때마다 중보기도를 올려 그 심판을 막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사죄의 은총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기도로 용서를 받은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세가 하나님께 어떤 기도도 올리지 못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서 이스라엘을 위해 어떤 기도도 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사악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영혼의 거울입니다. 우리는 7번씩 70번, 490번이 아니라 7번씩 700번 4900, 49.000번, 490,000만도 더 용서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은 지도 몰라요. 내가 잘나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기도와 하나님의 극진한 자비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씻기며 살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3. 향로를 들고 전염병을 막으라
세 번째로 어떤 기도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모세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어떤 기도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이 퍼져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있는데 기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 모세가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 제사입니다. 모세는 대제사장 아론에게 향로에 하나님의 제단의 불을 넣고 그 위에 향을 피워 이스라엘 회중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46절>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이런 때 관례대로라면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위중하고 급박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습니다. 모세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번제와 화목제를 생략하고 향기의 제사만을 드리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향기의 제사를 드린 장소가 특이합니다. 원래 향기의 제사는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에서 드립니다. 하지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들고 성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전염병이 퍼지고 있는 회중 속으로 아론을 보낸 것입니다. 그 때 전염병이 멈추었습니다.
어떤 기도도 할 수 없을 때 모세가 붙든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우신 대제사장 제도와 제사 제도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말대로 향로를 들고 전염병이 퍼지고 있는 회중 속으로 들어가 향기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아론이 회중 속에 섰을 때, 향연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퍼질 때 전염병이 멈추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기도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워놓으신 제도를 붙잡읍시다. 그 제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표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십자가를 붙잡읍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십자가 앞에 섭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결박을 푸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이 말씀을 읽다가 ‘나도 아론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교회 현관에 섰습니다. 그리고 아론처럼 향로를 드는 마음으로 두 손을 들고 전염병이 이 문을 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출입하는 모든 이들에게 평안과 형통함과 강건함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새벽에도, 낮에도, 밤에도 여러 차례 기도했습니다. 집에 가서 현관 앞에서 아내와 제 아이들 신에 손을 얹고 이 아이들과 등대교회 속한 믿음의 권속들의 발걸음이 천사의 발걸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현관문과 성도들의 가정의 현관문을 전염병이 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목사가 참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을 가졌다. 무슨 기도를 문에 서서, 신발을 잡기 하나? 그냥 교회에서 하면 되지!’라고 하지 마세요. 저 미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제 마음에는 사탄이 예배의 불을 끄려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예배를 지키고 싶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아주 절박했습니다. 아론이 향로를 들고 전염병이 퍼져 사람들이 한참 죽어나가고 있는 회중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자신에게 전염병이 옮아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이 들어가면 죽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생명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아론이 드린 속죄 제사는 생명을 건 제사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그 죽음 속으로 천천히 걸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달려 들어갔습니다. 모세는 아론을 서둘러서 빨리 회중 속으로 들어가도록 재촉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견줄 바는 아니지만 저에게도 간절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잘 나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편안히 잘 사는 것 아닙니다. 내가 용서받은 것은 죄가 다른 사람보다 적어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한 누군가의 중재의 기도가 있었고 그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겸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이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전에 회개하며 삽시다. 베드로가 권면한 것처럼 우리의 나머지 인생을 두려움으로 삽시다. 베드로전서1장 1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벧전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성경은 아론이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전염병이 그쳤다고 했습니다. 아론을 기준으로 죽은 자와 산 자가 나누어진 것입니다. 한쪽은 죽은 자들이 있고 다른 한 쪽은 산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는 순간에도 여전히 죽은 자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쪽에 서지 마십시오. 산 자 쪽에 서십시오. 그러면 어느 쪽이 산 자의 편이고 어느 쪽이 죽은 자의 편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이쪽은 산자의 편이고 저쪽은 죽은 자의 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저쪽에 서지 마시고 이쪽에 서십시오.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는 한 편 강도처럼 죽은 자의 편에 서지 마십시오. 죽어가면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던 다른 한 편의 강도처럼 산 자의 편에 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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