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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있는 불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나라마다 민족마다 불에 관한 굉장히 많은 신화들이 있습니다. 그 신화들의 공통점은 신이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거나 인간이 신에게서 불을 훔쳤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의 불을 프로메테우스가 훔쳐 사람들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고대 신화들은 하나같이 불의 신적인 기원을 말합니다. 그러면 과학에서는 어떻게 말할까요? 자연과학에서는 불의 기원을 하늘의 벼락이나 화산 폭발 또는 건조한 날씨 때문에 생기는 산불 같은 자연재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불에 대한 기원설은 신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두 가지가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불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요? 지구 최초의 자연환경은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해 불이 필요 없었습니다. 추위와 더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각종 실과만으로도 영양이 충분해고기를 먹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때는 추위나 더위를 대비할 필요가 없었고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불이 필요 없었습니다. 인류에게 추위(겨울)와 더위(여름)가 생긴 것은 노아 홍수 이후입니다. 창세기 8장 22절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신 것도 노아 홍수 이후입니다. 창세기 9장 3절에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고 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부터 사람들에게는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불과 고기를 익혀먹기 위한 불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열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열납하셨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사른 것으로 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드리는 제사에는 하늘의 불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최초의 불은 하늘의 불입니다. 물론 아벨 이전에 아담 때에도 불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불이 있었고 삶에 필요한 불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두 가지 불, 생활의 불과 하늘의 불이 있습니까?
고라당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땅이 입을 벌려 삼켜버렸습니다. 순식간에 그들과 관계된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회막 앞에서 향로를 들고 서 있던 지휘관 250명은 성소에서 나온 불이 태워버렸습니다. 정말 끔찍한 심판입니다. 성경은 이 심판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들의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38절) 누가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자기의 죄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 생명을 해한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 자리에 자기 생명을 죽이고 있으신 분 없으십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면의 진리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그 사람을 죽입니다. 여러분! 죽기 전에 반드시 회개하세요. 죽기 전에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하세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250명이 불에 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하나는 제사장 엘르아살을 시켜 불 속에서 250명이 들고 있던 향로를 꺼내 향로 속에 있는 불을 다른 곳에 가서 쏟아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향로들이 거룩해졌으니 그것으로 제단의 철판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250명이 들고 있던 향로는 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놋을 잘 펴서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을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이 두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향로 속에 있던 불을 다른 곳에 쏟아버리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37절에 “불 가운데에서 향로를 가져다가 그 불을 다른 곳에 쏟으라”고 했습니다. 성막에는 두 가지 제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번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분향단입니다. 제사장은 이 두 제단에서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동물의 제사와 향기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불을 처리하는 곳이 이스라엘 진영 바깥에 있었습니다(레4:12). 다른 곳에 쏟으라는 말은 성막에서 나오는 재를 처리하는 곳에서 250명이 들고 있던 향로 안에 있는 불을 처리하지 말고 다른 곳에 쏟아버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250명의 불을 왜 다른 곳에 쏟으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250명이 들고 있던 향로에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번제단에 있는 숯불로만 드려야 합니다. 다른 불은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만든 후 아론이 이스라엘의 1대 제사장이 되어 첫 번째 제사를 드렸을 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에 제물을 태웠습니다.
이때부터 제사를 드릴 때는 이 불로만 드렸습니다. 다른 불은 안 됩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불이 번제단에서 꺼지지 않게 했습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불로 항상 제단을 밝혔습니다. 제사에 사용된 불의 시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제사의 불은 사람이 밝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밝혔습니다. 이때부터 성막에서 드리는 모든 제사는 이 하나님의 불로만 드려야 했습니다. 다른 불은 안 됩니다. 다른 불로는 제사를 드릴 수 없고 설령 드렸다 해도 그 제사는 무효입니다. 다른 불이란 사람이 피운 불을 말합니다. 다른 불이란 인본주의적인 불입니다. 다른 불이란 세상의 불입니다. 이 세상의 불로 하나님의 제단을 밝히면 안 됩니다. 그런데 250명은 여호와의 불이 아니라 자기의 불로 향로를 채우고 그 불로 향기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인본주의적인 불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세상의 불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집에서 사용하는 아무 불이나 사용한 것입니다.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면 여호와의 불에 의해 죽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여호와의 불에 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250명이 들고 있던 향로 속에 있는 불을 다른 곳에 쏟아버리라고 하신 이유는 그 불이 여호와의 불이 아니라 다른 불이었기 때문입니다.
37절에 ‘다른 곳에 쏟으라’고 했습니다. 다른 곳은 하나님의 불을 처리하는 곳 이외의 장소입니다. 250명의 인본주의적인 불이 하나님의 불과 섞이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두 불은 재도 섞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은 서로 섞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 ‘쏟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자라입니다. 자라는 ‘흩어버리다, 키질하다, 해산시키다’는 뜻입니다. 고라당의 불씨를 넓게 흩어서 광야에 뿌려버리라는 말입니다. 불씨는 모아두면 다시 타고 흩어버리면 꺼집니다. 흩어버리라는 말은 불이 다시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고라당이 피운 불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는 하나님의 불만 있어야 합니다. 인본주의적인 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세상의 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불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불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불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는 하나님의 불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불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구약 시대의 모든 제사에는 항상 하나님의 불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 하나님의 불이 있었다면 신약의 예배에는 성령의 불이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있는 예배가 진짜 예배입니다. 성령의 불이 있는 예배가 아벨의 산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의 불이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는 지금 성령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여러분 속에 성령의 불이 타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계십니까? 만약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다른 불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불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 불은 버려질 것입니다. 그 예배는 허무한 예배입니다. 예배처럼 보이나 예배가 아닙니다. 불은 불처럼 보이지만 불이 아닙니다. 여기 강단에 포인세티아라는 꽃이 있습니다. 빨간색 잎은 꽃처럼 보이지만 꽃이 아닙니다.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잎이 변형된 것입니다. 진짜 꽃이 아니에요. 포인세티아의 잎은 불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포인세티아를 Mexican Fire Plant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불은 아닙니다. 꽃처럼 생겼지만 꽃이 아니고, 불처럼 생겼지만 불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불처럼 보이는 다른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처럼 보이지만 불이 아닙니다. 영혼들을 유인하기 위한 가짜 불에 불과합니다. 가짜 불에 속지 마세요. 진짜 불은 하나님의 불뿐입니다. 진짜 불은 교회에만 있습니다. 우리는 가짜 불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 불은 흩어질 것입니다. 버려질 것입니다. 바람에 날아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불로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다른 불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불이 있을까요? 믿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속에 성령의 불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아! 목사님 나는 확실히 예수님을 믿는데 성령의 불이 내 안에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 이런 생각이들까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고 기도해야 성령의 불이 타 오르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불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세요. 그 불이 더 활활 타게 하세요. 그 불을 꺼뜨리지 마세요. 이 불을 지키세요. 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성막이 처음 만든 때는 BC 1445년경입니다(출40:33). 성막을 건축하고 아론이 첫 번째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의 불이 제단의 불을 살랐습니다. 이때부터 레위인들은 1년 365일 이 불을 지켰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이 불을 지켰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와도 이 불을 지켰습니다. 성막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도 레위인들은 제단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습니다. 레위인들의 사명은 제단 밑에 있는 제사의 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불은 이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BC 586년까지 859년 동안 한순간도 꺼지지 않고 계속 탔습니다.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을 때 이불은 꺼졌습니다. 이 불이 왜 꺼졌을까요?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허물어뜨려서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불이 꺼졌기 때문에 성전의 불이 꺼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성전의 불을 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불을 꺼뜨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불을 지키세요. 예배의 불, 기도의 불, 교회의 불을 지키세요. 이 불을 지키면 이 불이 우리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불을 지키면 이 불이 우리 가정과 자녀와 우리 삶을 지킵니다. 코로나가 우리 신앙을 위협합니다. 그래도 이 불을 지키세요. 이 불을 꺼뜨리지 마세요. 하나님의 성전에는 하나님의 불만 있어야 합니다. 다른 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로 향로가 거룩해졌으니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게 하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겉을 놋을 쌌습니다. 250명이 들고 있던 향로로 이 번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37절, 3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향로 안에 있던 불을 이스라엘 진 밖으로 가서 쏟아버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향로는 거룩해졌으니 불 속에서 그것을 꺼내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해진 향로들이 다른 불 속에 계속 타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붙는 불 가운데에서 향로를 가져다가”라고 했습니다. 붙는 불이라는 말은 불이 지금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꺼지는 불은 약합니다. 하지만 지금 타오르는 불은 거셉니다. 250개의 향로라면 꽤 큰 불이었을 것입니다. 거세고 큰 불이 타고 있습니다. 불이 다 꺼진 다음에 향로를 꺼내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이 붙어 한 참 타고 있는 불 속에서 향로를 끄집어내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를 하나님은 향로가 거룩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 향로는 거룩함이니라.”(37절) “그 향로는 거룩하게 되었나니”(38절) 하나님께서 다른 불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드려 거룩해진 향로가 잠시라도 타고 있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성막에서 사용하는 도구가 하나님의 불이 아닌 다른 불 속에 타는 것을 싫어하셨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불이 아닌 이 세상의 불 속에 있는 것은 얼마나 싫어하실까요? 우리 자신을 이 세상의 다른 불에서 구별합시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세속적인 불 속에 있지 맙시다.
지휘관 250명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죽였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불은 하나님의 불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불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쾌락의 불, 중독의 불, 정욕의 불, 욕심의 불, 명예의 불, 시기의 불, 정죄의 불, 미음의 불, 물질의 불, 죄악의 불, 불신앙의 불, 등 각종 불이 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불을 붙들고 그 불 속에서 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불 속에서 죽어가는지도 모릅니다. 그 불에 타면 안 됩니다. 그 불을 들고 있지 마세요. 그 불을 버리세요. 그 불에서 나오세요. 하나님은 250명에게 그 불을 버릴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장로 중에 하나인 온은 그 불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심판에서 제외됐습니다. 하지만 250명은 끝까지 붙들고 있었습니다. 땅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삼킬 때고 그대로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라도 붙을 버렸으면 살았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목전에서도 다른 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목전에서 그 불을 붙들고 죽어갔습니다. 세상의 불을 버리세요. 세상의 불에서 나오세요.
하나님은 250명의 지휘관은 불 속에 그대로 두셨지만 그들이 들고 있던 향로는 불 속에서 끄집어내게 하셨습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향로는 놋 몇 백 그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냥 쇳덩어리입니다. 250명은 하나님 앞에서 쇳덩어리 향로보다 가치가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250명은 천부장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대장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행정병이었는데 사무실이 연대장실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연대장이 출근할 시간이 되면 주임상사와 당번병이 연대본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병소가 300m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연대장 차가 위병소를 통과하면 경례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가 들리면 주임상사가 경례할 준비를 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습니다. 연대장이 퇴근할 때 따라 나옵니다. 연대장이 나가면 연대장실 병사가 위병소에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문을 열어놓습니다. 이것이 지휘관이 세상에서 받는 대우입니다. 250명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높은 대우를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놋그릇 보다 가치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불 속에서 꺼낼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놋향로보다 가치가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마이크, 강대상, 의자들은 성전의 기구들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입니다.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이 도구들보다 얼마나 존귀합니까? 우리와 이 도구들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도구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존귀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시49:20).
하나님은 제사장 엘르아살을 지켜서 불에 타고 있는 향로를 꺼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꺼내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 엘르아살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타고 있는 불 속에서 향로를 꺼냈습니다. 어떻게 꺼냈을까요? 갈고리로 꺼냈을 것입니다. 엘르아살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이 세상 온갖 불에 타고 있는 놋그릇 같은 인생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됐다면 세상 불에 타고 있는 영혼들을 끄집어 내야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의 불은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꺼지지 않습니다. 불 속에 들어가서 꺼내야 합니다.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요? 기도의 갈고리를 사용합시다. 말씀의 갈고리를 사용합시다. 그래서 세상 불 속에서 인생들을 끄집어냅시다.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놋향로를 펴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단은 성막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첫 번째로 있습니다. 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오트입니다. 오트는 징조, 징표, 신호, 상징, 기호, 기준, 증거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에 들어갈 때마다 보고 신호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신호입니까? 제사장만이 하나님 앞에 분향할 수 있다는 증표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말라는 신호입니다. 다른 불로 제단에 제사를 드리면 타 죽는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의 불로만 예배할 수 있다는 신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영적 제단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다른 불은 받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다른 이름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음세요. 다른 이름은 안 됩니다. 다른 믿음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 믿음, 예수 이름뿐입니다.
250명의 지휘관이 반역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습니다. 250명은 모두 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250개의 가정에 처자와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으며 형제와 친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라당 반역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막을 출입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출입할 때마다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죽은 자신의 아버지의 향로, 자신의 자식의 향로, 자신의 형제의 향로가 붙어 있는 번제단을 성막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제단에서 송아지, 양, 염소를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자기 아버지가 반역하다가 죽은 표가 성전에 있으니 자식들은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요?
고라 아들들은 어떠했을까요? 고라는 레위 지파입니다.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반역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도왔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의 제사가 드려집니다. 고라의 아들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버지가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죽은 흔적이 있는 제단 앞에서 서야 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반역하다가 죽은 고라라는 것을 다른 레위인들이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을까요?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까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고라의 아들들은 그 아픔을 가지고 계속해서 번제단 앞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반역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가족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250명의 향로를 제단에 붙여 표를 만들었을까요? 볼 때마다 그들의 가슴에 못이 박히라고 그들의 향로로 제단을 쌓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후손이 다시는 같은 일로 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라자손들은 이것을 표를 삼아 후대에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를 남겼습니다. 시편 42편, 44~49편, 84, 85편이 모두 고라 자손들의 시입니다. 50편, 73~83편까지는 다윗 시대에 성가대 지휘자이며 천재 시인으로 알려진 아삽의 시인데 아삽 또한 고라자손입니다. 고라자손은 시편 84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라 자손은 성전에서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보금자리를 얻었습니다. 고라 자손에게 성전은 끔찍한 상처가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증표가 있는 너무 사랑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고라는 멸망당했지만 고라의 후손들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인물들이 됐습니다. 그것은 번제단을 하나님이 주신 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6장8절에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오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여 기호(표)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고라자손이 번제단을 표로 삼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표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늘 기억합시다. 이 표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마지막 때에 우리는 롯의 처를 생각해야 합니다. 롯의 아내가 왜 죽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천사가 롯과 그 가족에게 뒤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롯의 처는 도망을 가다가 뒤돌아보아서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됐습니다. 롯의 아내는 왜 뒤돌아보았을까요? 소돔 성에 있는 좋은 집이 생각이 났을까요? 집에 둔 보화가 생각이 났을까요? 아니면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롯의 아내는 몸은 소돔에서 나왔지만 마음은 소돔성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롯의 처를 생각합니다. 고라당의 멸망을 기억합시다.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표로 삼읍시다. 그래서 롯의 처처럼, 고라당처럼 멸망당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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