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2 ok!
등대교회 홈페이지입니다.

Sermon

듣도 보도 못한 일이 일어나다

조회수 : 737회

본문 : 민수기 16:27~35
주일오전예배 | 2020-11-08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신학자이며 반 나치운동가였던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라는 루터교회의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를 반대하고 저항하다가 히틀러 제거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다가 194549일에 플로센뷔르크에서 40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합니다. 히틀러 제거 사건은 <작전명 발키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진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탐 크루즈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입니다. 본회퍼가 감옥에서 지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 나는 누구인가?
  • 사람들은 종종 말하길 내가 감방에서 걸어 나올 때
  • 마치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듯 침착하고, 활기차고,
  • 당당하다고 한다.

  • 나는 누구인가?
  • 사람들은 종종 말하길 내가 간수들에게 말을 건넬 때
  • 마치 내가 명령하는 사람인 양 자유롭고, 다정하고,
  • 분명하다고 말한다.

  • 나는 누구인가?
  •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마치 내가 승리에 익숙한 사람인 양
  • 불행한 나날을 견디면서
  • 평화롭고,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 아니면 나는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 그런 사람에 불과한가?

  • 새장에 갇힌 새처럼
  •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가 병들고
  •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 가쁘게 몸부림치고
  • 색깔과 꽃과 새소리를 그리워하고
  • 친절한 말과 인간다운 친근함을 그리워하고
  • 사소한 모독에도 분노에 떨며
  • 큰 사건을 간절히 기대하고 멀리 떨어진 친구를 그리워하다
  • 낙심하며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 글 쓰는 일에 지쳐 허탈에 빠지며
  •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과 작별하려는 그런 존재.

  • 나는 누구인가?
  • 전자인가 후자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 가련한 약자인가?

  • 나는 누구인가?
  • 이 고독한 물음들이 나를 비웃는다.
  • 내가 누구인지를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감옥에서 생활하는 본훼퍼를 보고 사람들은 그의 모습이 영주같이 침착하고 활기차며 확고하다고 했습니다. 간수들과 이야기할 때는 마치 장군이 부하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당당하다고 했습니다. 승리에 익숙하고 고통을 잘 견디는 사람, 환경에 상관없이 늘 평화로운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본훼퍼는 고민합니다. 나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 가쁘게 몸부림치는 사람인데, 작은 일에 화를 잘 내고 슬퍼하고 낙심하는 연약한 사람인데, 진짜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가 진짜 나인가?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내가 진짜 나인가? 그는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누구인지 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말고, 내가 생각하는 나 말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1.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셨다  

아론과 고라, 그리고 250명의 지휘관이 각기 자기의 향로를 들고 여호와 앞에 서 있습니다. 다단과 아비람은 자기 집 앞에서 처자, 유아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론과 고라 둘 중에 누가 하나님이 부르신 제사장일까요? 모세와 250명의 지휘관 중에 진짜 하나님이 부르신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아직 하나님은 누가 진짜 불인지 가짜 불인지, 누가 진짜 향기인지 가짜 향기인지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이 때 모세가 말을 합니다. “이제 이 사건으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고라당 무리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 <28>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말미암아 알리라
  • <29> 곧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같고 그들이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이 당하는 벌과 같으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거니와
  • <30>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모세는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셨다라고 했습니다. 고라가 모세에게 너는 스스로 높이는 사람이고 비난할 때 모세는 단 한 마디의 변론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참고 참았다가 그 대답을 지금 하나님 앞에서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셨다모세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소명의식이 있었습니다.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는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8절의 나의 임의로라는 말은 내 개인의 목적 때문에또는 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라는 의미입니다. 고라는 모세를 분수에 지나도록 많이 가진 욕심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직분을 이용해 많이 챙긴 부패한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내 사익을 위해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나는 하나님이 부르신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찾아와 이렇게 불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이때 세례 요한이 대답합니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이 말은 나는 주님이 이 요단강, 여기로 보내신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이 무서워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은 네가 누구냐는 말입니다. 너의 실존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너는 내 아들인데 왜 숨었느냐는 말입니다. 아담이 다시 대답합니다. “창피해서 숨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십니까? 이 시간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나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자녀입니다. 직장에서는 직원이고 마트에서는 손님입니다. 교회에서는 집사, 권사, 목사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나 말고, 내가 생각하는 나 말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입니까? 아니면 창피해서 숨은 아담입니까? 고라는 사람들이 말에서 자신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여호와께서 보내셨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사세요.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마세요.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2.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나다  

모세는 아주 무서운 말을 했습니다. ‘곧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같고 그들이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이 당하는 벌과 같으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거니와’(29) 고라 무리가 당하는 죽음이 평범한 사람이 당하는 죽음과 같으면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나이, 자연재해, 질병, 사고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고라 무리들은 이런 일반적인 사건으로 죽거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야훼께서 여태껏 너희가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을 하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주께서, 너희가 듣도 보도 못한 일을 일으켜서라고 했습니다. 고라당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역사 속에 한 번도 없는 무서운 일로 고라당이 죽게 되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고라당이 여호와를 멸시한 것을 알게 되리라는 말입니다.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모세의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모세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이 갈라져 고라당과 그들의 집과 그들의 재물을 삼켜버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 <31>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 <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 <33>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말을 마치자마자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마치는 동시에라고 번역했습니다. 모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땅이 입을 벌려 고라당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삼켜버렸습니다. 마치 대왕고래가 입을 벌려 새우 떼를 먹어치우듯이 땅은 고래처럼 고라 일당과 집과 재물을 순식간에 먹어치웠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식구들과 함께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다음에야 땅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무서운 사건입니다. 모세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세상 끝에 있을 심판의 모형입니다.  

저는 6주째 고라의 반역 사건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이어서 하면서 이 본문은 설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건너뛰어 다른 곳을 설교하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나는 모세와 같이 말과 행실의 열매가 있는 사역자가 못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모세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바닥이 갈라졌다.”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삶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모세와 비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두 번째는 고라당의 멸망당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땅이 입을 벌려 사람들을 산채로 삼켰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생매장 된 것입니다. 너무 무시무시한 사건을 성도들에게 설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설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양심에 가책이 됐습니다. ‘목사가 성경 그대로 설교를 하면 되지.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안 한다면 목사가 아니지.’ 이런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새벽에 일어나서 회개하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민수기 16장을 열었습니다.  

성경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완벽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기록한 사람의 해석이 들어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기록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보는 사람의 성향이 역사 기록에 반영된 것입니다. 기록한 사람에 따라 역사가 왔다 갔다 한 것입니다. 누가 기록한 것이 진짜일까요? 모릅니다. 사람이 기록한 역사는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입니다. 완전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고라반역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하기 부담스럽다고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고라와 다단, 아비람의 죽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잇을 세상 심판의 모형입니다. 세상 끝에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물러갈 것입니다. 이 말씀이 3천 년 전에 실현된 것처럼 미래에도 다시 실현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라당 사건을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고라당의 멸망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1615절은 성도의 죽음은 주님께 귀하다라고 했습니다. 귀중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카르입니다. 야카르는 보배롭다, 무겁다는 뜻입니다. 악인들의 죽음은 무가치합니다. 하지만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복입니다. 무디(1837-1899) 목사님은 인생 마지막 순간에 기뻐하면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날 무디가 죽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보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말을 하나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나는 지금보다 더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고라는 땅이 물러가는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지옥이 열리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미국 포틀랜드의 회중 교회의 목사인 에드워드 페이슨(1783-1827)40대 초반의 나이게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페이슨은 몇 달 동안 신음하며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사지가 마비되어 침대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도성이 완전히 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영광이 나를 비추고 그 향기가 내게 풍겨오며 그 소리가 내 귀를 때리고, 그 기운이 내 마음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구나!”  

의인에게 죽음은 올라가는 극치인 영원한 승진의 순간이고 승리의 순간이며 화희의 순간이고 영원한 안식의 하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순인입니다. 하지만 악인의 죽음은 내려가는 좌천의 극치인 지옥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가는 좌천 중의 좌천입니다. 악인의 죽음은 저주 중에 저주이며 멸망 중에 멸망입니다. 고라의 죽음은 멸망 중의 멸망이었고 저주 중에 저주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죽음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죽음이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죽음은 인류 역사 마지막에 있을 악인에 대한 심판의 모형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서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까?

3. 불이 250명을 먹어버리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땅이 삼켜버렸습니다. 삼키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발라입니다. 발라는 삼키다, 먹어치우다, 감추다, 비밀로 하다는 뜻입니다. 땅이 삼켰다는 말은 땅이 먹어 치워버렸다는 뜻입니다.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250명의 지휘관은 여호와로부터 나온 불이 태워버렸습니다.  

<35>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불살랐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칼입니다. 아칼은 먹다는 뜻입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땅이 먹어버렸고 250명은 불이 먹어버렸습니다. 땅가 불의 먹이가 됐습니다. 지옥의 밥, 마귀의 밥이 됐습니다. 여러분은 마귀의 밥이 되지 마세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다가 성전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 죄 때문에 죽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죽음을 직감하고 화로다 내가 죽게 되었다면 탄식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하늘 제단의 숯불을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고 선언합니다. “네 죄가 사해졌다.” 네가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네가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이사야 선지자를 구원했습니다. 하늘에서 온 불이 이사야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하늘의 불이 250명에게는 죽음의 불이었고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구원의 불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늘의 불은 구원의 불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엘리야가 쌓은 제단의 번제물과 나무의 흙을 태워버렸습니다(왕상18:38). 심지어 그 불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물까지 태워버렸습니다. 하늘의 불이 엘리야의 예배를 뜨겁게 했습니다. 하늘의 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타오르게 했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단에 향을 사를 때였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태워버렸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이 어떤 사람에게는 응답의 불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재앙의 불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영적인 숯불이 있습니다. 그 불은 거룩한 불이고 신령한 불입니다. 그 불이 어떤 사람에게는 죄를 제거하는 용서의 불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의 불이 됩니다. 그 불이 어떤 사람에게는 응답의 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재앙의 불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불은 어떤 불입니까? 구원의 불입니까? 은혜의 불입니까? 식어진 가슴을 뜨겁게 하는 성령의 불입니까? 아니면 심판의 불, 저주의 불입니까? 하나님의 불이 공포의 불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불이되기를 바랍니다. 혼란한 세상을 밝혀주고 인도하는 불이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장차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죽음이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죽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이, 사고, 질병 등 평범한 죽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듣도 보도 못한 죽음이 되면 안 됩니다. 단 예수님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늙어서 죽든 젊어서 죽든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복입니다. 집에서 죽든 병원에서 죽든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그 죽음은 은혜입니다. 평안히 죽든 사고로 죽든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그 죽음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취해가십니다. 단 예수님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나 내가 아니라 성경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으세요. 친구들, 직장 상사나 부하 직원이 말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세요.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실수로 누락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불안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평안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평안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훗날 여러분의 인생 마지막에도 하나님의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지만 하늘 평안으로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길 것임이라.”(12:13)

이전글 너희를 위하여 이튿날까지 남겨두지 말라(추수감사절)
다음글 하나님의 심판을 막은 기도의 중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