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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가을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외체라는 사람이 집 앞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가지치기 하다가 떨어져(1.8m)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찧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구급차가 출동했습니다. 구조대원은 길에 쓰러진 주인 위를 감싸 안은 반려견 토니를 발견했습니다. 구조대원이 주인의 목에 보호대를 해주는 동안에도 반려견은 계속 주인을 끌어안고 지켜봤습니다. 주인을 몸으로 보호한 거예요. 구조대원이 토니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토니는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조대원이 외체를 구급차에 실으려고 하자, 반려견 토니는 구급차에 같이 타려고 했습니다.
2018년 5월에 콜롬비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길 한 가운데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화가 난 운전자들과 지나가던 시민들이 남자를 깨우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자의 옆에는 아주 충성스러운 개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는 누구든 주인의 몸에 손을 대려 하면 큰소리로 짖었고 여차하면 물 수도 있을 것 같은 위협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개는 경찰관이 다가와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개는 오로지 주인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개는 사람들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주인의 얼굴을 핥고 앞발로 주인을 끌어안았습니다. 잠시 후에 남성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습니다. 개는 정신을 차린 주인의 얼굴을 연신 핥아댔습니다. 개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주인을 몸으로 보호한 스토리들입니다.
사람도 몸으로 재난을 막고, 몸을 던져 사고를 막고, 몸으로 자식을 보호합니다. 본문에는 몸으로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막은 스토리가 나옵니다. 이 시간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막은 모세와 아론의 중보기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교단은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중재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모세가 회중에게 악인의 물건을 어떻게 하도록 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중보기도자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막은 모세와 아론의 중재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론과 고라를 비롯한 250명의 지휘관이 각각 자기의 향로를 들고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모세도 그들 중에 있습니다. 모두 253명입니다. 고라 뒤에는 고라를 추종하는 회중들이 고라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광이 모인 무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나타나셨는지 아니면 불 가운데 나타나셨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253명과 회막 앞에 모인 회중들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21절>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한 순간에 반역하는 무리들을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즉시로 회중을 떠나는 것을 원하실까요? 그래서 회중이 한꺼번에 다 멸망당하기를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어떤 상황에서도 중재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회중은 고라와 함께 모세와 아론을 손가락질하며 정죄했습니다. 역성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중보자가 되어 그들을 위해 기도해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기를 원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은 두 도시의 멸망을 아브라함에게 먼저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아브라함에게 알리지 않고는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불구경하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재기도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고 그곳에 사는 롯과 두 딸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임할 심판을 기도로 막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언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음행을 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버립니다. 고대에 언약을 깬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계약대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멸하시면 되지 왜 모세에게 알리셨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원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임할 진노를 기도로 막고 그들을 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모세는 이때 자신의 영혼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생명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의 영혼으로 막은 것입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 가슴에는 12개의 보석(홍보석, 황옥, 녹주옥,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 호박, 백마노, 자수정, 녹보석, 호마노, 벽옥)이 달려 있습니다. 모두 구하기도 힘든 보석들입니다. 이 12개의 보석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왜 보석으로 12지파를 상징하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 앞에 보석처럼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을 제사장의 등이나 어깨가 아니라 가슴에 붙이게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보석처럼 귀한 이스라엘 12지파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제사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고라당이 나라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온갖 모욕을 당했습니다. 정말 억울해요. 하는 꼴이 정말 화가 나요. 확 쓸어버리고 싶어요. 마침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모세와 아론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 됐다면 손뼉을 쳐야 할까요? 꼴좋다며 손을 흔들며 회중을 떠나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떠나면 회중은 끝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하지만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벧전2:9).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위해 죄악으로 세상에 임할 수 밖에 없는 심판을 우리가 기도로 막아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내 기도 때문에 우리 사회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넘어가도록 기도합시다. 기도의 중재자가 되세요. 나의 집과 하나님을 중재하는 기도의 중재가 되세요. 내 딸, 내 아들의 기도의 중재자 되세요. 내 자녀에게 임할 수도 있는 죄의 저주를 기도로 막아서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일터에서 기도의 중재가 되세요. 하나님은 우리 사회에 임할 죄의 저주를 우리가 모세와 아론처럼 기도로 막아서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기도의 중재자, 이것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역할입니다. 이 세상은 기도의 중재자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중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이 중재자가 사라질 때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사59: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상히 여기셨다’는 말의 히브리어 어의는 아연실색할 정도로 아주 크게 놀랐다거나 완전히 폐허가 되고 황량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성경해석가는 ‘이상히 여기셨다’는 말을 ‘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중재자가 없음을 가슴이 황량해질 정도로 슬퍼하시면서 안타까워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세계 만국에 제사장의 나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는 많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나라에 제사장이 없어졌어요. 중재자가 없어졌어요. 사람이 없어졌어요. 이스라엘에 중재자가 없어졌을 때 하나님이 너무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중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중재가가 없을 때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2. 자신을 멸망당할 무리와 분리시켜라
두 번째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고라당을 멸망시키겠다며 회중에게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회중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중보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회중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회중이 고라와 다단 아비람에게 떠나게 하라고 다시 하셨습니다.
‘떠나다’는 말이 21절, 24절, 26절, 27절에 반복해서 계속 나옵니다. 떠나라. 떠나라. 떠나야 할 것이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네 번이 모두 ‘떠나라’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은 단어가 다 다릅니다. 21절의 ‘떠나라’는 말은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여기 떠나라는 말은 ‘분리시키다, 구분하다, 선별하다’(빠달)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라당을 떠나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고라당과 분리시켜라’는 의미입니다. 멸망당할 무리들과 자신을 구분하라는 말입니다. 24절의 떠나다는 말은 회중들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여기 떠나라는 말은 ‘철수하다’(알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죄가 여전히 있지만 그 자리에서 철수라도 하면 심판을 면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중들이 모세와 아론처럼 자신을 죄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을 아신 거예요. 그래서 그 수준에 맞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나쁜 버릇이 고쳐지지 않으면 죄의 자리에서라도 벗어나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안 되면 몸이라도 분리시키세요. 죄 짓을 것 같은 곳에는 아예 가지를 마세요. 26절의 ‘떠나다’라는 말은 모세가 회중들에게 한 말입니다. 26절의 떠나라(쑤르 나)는 말은 “제발 떠나 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 청유형이 붙어 있습니다. 모세가 회중에게 제발 돌이키라고 애원하듯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의 떠나다는 말은 출발하다(야차)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이 세상 죄악과 나를 분리시켜야 합니다. 자신을 죄와 분리시키지 못하면 죄의 자리에서 철수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크고 작은 여러 번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두 개입니다. 첫 번째가 물 심판입니다. 창세기는 노아 시대 죄악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6:11)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그 땅이 타락하였고 그 땅이 맹폭으로 가득 찼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가득 차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마레인데 이 단어의 뜻은 ‘완성하다’입니다. 노아 시대는 한 마디로 죄악이 완성된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 세상을 물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입니다. 왜 노아의 가족이 물 심판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노아의 가족이 세상 죄악에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세상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죄악과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떠나라는 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불 심판입니다. 두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에 들어갔을 때 롯이 그 둘을 자기 집에서 묵게 했습니다. 밤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몰려들어 두 사람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상관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상관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다입니다. 야다는 ‘알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남녀간에 성적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날 밤에 롯의 집에 소돔성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19:4) 젊은이와 늙은이가 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성의 사람, 젊은이와 노인들과 그 모든 사람들, 그리고 남자까지 그 집을 포위하였다.” 남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천사는 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남성의 모습에 가깝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소돔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하려고 모인 것입니다. 천사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좀 다른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소돔성에 들어온 좀 다르게 보이는, 어떻게 보면 특별한 외지인과 쾌락을 즐기기 위해 소돔성의 젊은이에서부터 노인까지 다 모여 롯의 집을 에워싸 두 사람을 끌어내라며 롯을 위협했습니다. 문을 잠그자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소돔 성 사람들이 얼마나 동성연애로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소돔 성은 동성연애로 무법천지였습니다. 동성애는 한 번 빠지면 그 쾌락 때문에 잠을 못잡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오직 그 생각밖에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습니다. 두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을 예언하며 롯에게 떠나라고 합니다. 롯은 아내와 두 딸과 두 사위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라고 합니다. 롯이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떠났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떠나라는 말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죄악과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길입니다. 크리스천을 바다를 향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배는 바다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꼭 물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물 속에 잠기면 안 됩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침몰하는 것입니다. 배는 꼭 물에 떠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이라는 바다에 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잠기면 안 됩니다. 침몰하면 안 됩니다. 크리스천은 꼭 물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바다에는 바람이 있습니다. 배는 바람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바람이 불어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바람이 너무 세서 잠시 멈출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바람 따라 가면 침몰합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에 부는 바람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똑바로 항해해야 합니다. 바람에 지면 안 됩니다. 세상 조류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바다에는 파도가 있습니다. 배는 파도에 떠밀리면 안 됩니다. 파도가 밀려와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물결이 세서 잠시 방향을 돌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파도에 떠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파도가 있습니다. 세상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파도에 밀리면 안 됩니다. 세상 파도를 거슬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동화되면 안 됩니다. 세상의 죄악과 분리되어야 합니다. 떠나세요. 머뭇거리지 마세요. 그래야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3.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세 번째로 모세가 악인의 재물을 회중들이 어떻게 하게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회중을 고라, 다단, 아비람에게서 떠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회중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과정에서 회중이 악인의 물건에 일체 손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26절> 모세가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 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 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매
“그들의 물건은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 왜 그랬을까요? 어차피 주인이 없어질 물건 갖다가 쓰면 좋지 않을까요? 그런데 모세는 악인의 물건을 만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물건에는 그것을 쓰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선한 사람의 물건에는 선한 흔적이 있습니다. 악인의 물건에는 악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의 물건은 고통이 됩니다. 잠언15장 6절에 “ …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말 성경은 “… 악인의 소득은 고통을 가져온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 악인의 소득에는 문젯거리가 많다.”고 번역했습니다. 악인의 재물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악인의 물건은 삶에 많은 문젯거리를 만들어냅니다. 악인의 물건에는 절대 손대지 마세요. 그것이 내 삶에 문젯거리가 됩니다.
레위기는 부정한 사람, 부정한 짐승, 부정한 물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부정한 것에 접촉하면 부정해진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거룩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것에 접촉하면 거룩해진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것에 손을 대십시오. 부정한 것에 손을 대지 마십시오. 부정해집니다. 눈을 밟으면 눈이 묻습니다. 껌을 밟으면 껌이 붙습니다. 변을 밟으면 묻습니다. 물건에는 그것을 사용한 사람의 영향력이 남아 있습니다. 악인의 물건을 만지지 말라는 말은 더러움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이 악한 방법으로 잘 되는 것 때문에 분내지 마세요. 억울해하지도 마세요.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인은 악인이 가진 어떤 것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악인의 재물은 그 재물도 악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그 형통도 악입니다. 악을 보면서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부러워하면 어느 순간 나도 그 악을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것은 죄를 마음에 묻히는 것입니다. 죄를 생각에 뭍이면 그 악이 나를 지배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도 그 악을 따라하게 됩니다. 죄를 마음에 묻히지 마십시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악인의 방법을 사용하는 순간 망하기 시작합니다.
모스크바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고르바초프 정권이 불안하게 새로운 소련의 역사를 책임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무너진 공산당에 향수를 지닌 친 공산주의자들이 과거 공산당으로 회귀하기 위한 반혁명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군부의 세력들은 탱크를 몰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진입했습니다. 그때 탱크 앞에서 한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무런 무장도 없이 맨 몸으로 탱크를 막아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하는 청년을 탱크가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딱 한 사람입니다. 그냥 밀고 지나가면 됩니다. 옆으로 지나가도 됩니다. 그런데 탱크가 그 한 사람을 넘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참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반혁명군의 지도자들의 긴급한 회의가 수도 없이 열린 끝에 결국 이 반혁명 사건은 하루 이틀 사이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반혁명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선교적 관점으로 소련을 주목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치열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과거의 공산당 정권으로 회귀하면 소련에서의 선교의 자유나 복음의 영향력을 기대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도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 때 찍힌 젊은이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진이 워싱턴포스트지 표지에 실렸습니다. 크리스천 투데이도 그 사건에 대해 기사를 실었습니다. 당시 소련에는 복음주의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소련의 정교회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복음주의교회의 젊은이였습니다. 개신 교회들은 소련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이 청년은 자기 몸을 던져 기도해서 엄청난 사건을 막아보기 위해서 공동체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탱크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감행한 것입니다.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기도였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막아서는 기도였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기도했겠지만 이 반혁명 사건이 실패하고 소련 속에 복음의 자유, 선교의 자유가 결정적으로 지켜진 데는 이 청년의 기도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기도로 탱크를 막은 거예요. 기도로 혁명군을 막은 거예요. 기도로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절박한 운명 앞에서 몸을 던져 기도하는 이 기도자의 모습, 이것이 중보기도자의 모습일 것입니다(이동원, 중보기도 파티). 중재기도자가 됩시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사회의 중재기도자가 됩시다. 우리가 이 땅에 임할 심판을 기도로 막아서는 중재의 기도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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