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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의 제1조(목적)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 법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서 헌법상의 평등권을 보호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차별금지법의 목적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차별 금지법 제2조(정의) 1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별’이란 여성, 남성,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 여성, 남성 그리고 표시할 수 없는 제 3의 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헌법에 성이 남성과 여성, 양성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의 첫 번째 조항은 남성 여성 외 제3의 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별금지법의 법안의 원래 목적은 사람들의 차별의 금지가 아니라 동성애 합법화입니다. 제2조 두 번째 조항은 장애에 관한 법입니다. “’장애‘란 신체적·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를 말한다.” 2항은 꼭 필요한 법안입니다. 하지만 2조 1항은 아닙니다. 1항이 통과되면 창조질서가 무너집니다. 또 정상적인 성을 가진 사람들이 역차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항과 2항을 나란히 놓고 함께 통과를 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를 하면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나쁜 사람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을 합법화하기 위해 다른 약자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만을 통과시키기 어려우니까 다른 여러 가지 좋은 법안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프레임> 전략입니다.
프레임(frame)은 ‘구조, 조직, 기구, 뼈대, 모양, 체격, 액자, 목조의, 틀을 잡다, 짜 맞추다, 틀에 끼우다’ 등등의 뜻입니다. 뼈대는 하나의 재질입니다. 그런데 여러 개의 재질로 프레임을 짜서 자신의 목적이 따라 교묘하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 나쁜 것을 함께 묶어놔서 나쁜 것이 좋은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선과 악을 함께 묶어 놓고 악을 선처럼 보이게 합니다. 악을 선에 짜 맞추어 악의 사악한 본질을 흐려버립니다. 마귀의 프레임 전략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배고픔,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리고 떡덩이를 만드는 능력,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연결해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프레임을 짰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입니다. 아주 사악한 프레임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프레임을 말씀을 박살내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공생애 내내 프레임을 짜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마귀와의 전쟁은 프레임 전쟁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프레임으로 공격합니다. 영적 전쟁은 프레임 전쟁입니다.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말씀을 가시기 바랍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고라는 그 불만을 해소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프레임을 짰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그 프레임을 씌어 당을 만들고 하나님과 모세를 반역했습니다. 고라당의 규모는 아주 컸습니다. 고라당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당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물밑 작업을 통해 이스라엘 중에 형성된 아주 큰 조직입니다. 이스라엘을 둘로 쪼갤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이었습니다. 이 시간 모세가 이스라엘 사회를 큰 혼란에 빠뜨린 고라의 프레임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불만 프레임이 불공정 프레임으로 변장하다
먼저 고라는 불공정 프레임을 짰습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만은 사람들을 규합할 수 있는 매력적인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불만을 불공정이라고 했습니다. 고라는 불공정 프레임을 짜서 같은 부류의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불만이 정당한 것처럼 꾸몄습니다. 이것이 고라당입니다. 그러면 고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고라는 자신이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1절>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고라는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로 이스라엘 중에 아주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의 계보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레위는 야곱의 셋째 아들로 게르손, 고핫, 므라리,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출애굽 후 레위의 후손들은 성막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영광스러운 직무를 맡습니다. 장남 게르손의 후손들은 성막의 양장, 회막과 덮개, 해달의 가죽, 뜰의 휘장, 단 사면의 문장 등을 담당했습니다(민4:25). 차남 고핫의 후손들은 성소와 지성소에 있는 법궤, 떡상, 등(잔)대, 분향단 같은 지성물과 성물들을 담당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에 있는 물건들은 순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고라는 고핫 자손들이 하는 모든 일에 총책을 맡았습니다. 중요성을 따질 때 고라가 하는 일은 제사장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3남인 므라리의 후손들은 장막의 널판, 띠, 기둥, 받침, 말뚝, 줄 같은 기구들을 담당했습니다. 레위의 세 아들들의 후손이 성막을 세 구분해서 그 일을 하나씩 맡은 것입니다.
고핫 자손 중에서도 하는 일이 나누어졌습니다. 고핫에게는 아므람, 이스할, 헤브론, 웃시엘,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출6:18, 민3:19). 모세와 아론은 고핫의 장남 아므람의 후손이었고 고라는 고핫의 차남인 이스할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 두 사람과 고라는 사촌 형제지간입니다. 같은 고핫 자손인데 장남 아므람의 후손인 아론은 제사장이 됐고 차남 이스할의 후손인 고라는 이스라엘이 행진할 때 지성물을 운반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지성물을 담당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 하는 일 다음입니다. 고핫은 아론을 1인자, 자신을 2인자로 생각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고핫 자손인데 장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아론이 고라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고라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자신도 얼마든지 제사장을 잘 할 수 있는데 아므람의 후손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제사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억울했습니다. 이것이 고라당이 만들어진 이유입니다. 고라당은 불만당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연 중심 사회가 아닙니다. 직분,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의 가치, 중요성을 따지기 전에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아무리 크고 중요해 보이는 일이라도 나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 일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지 일의 중요성이 가치가 아닙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세요. 요즘은 교회 안에 집사라는 직분이 보통 명사처럼 됐습니다. 그 직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성직입니다.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을 작게 여기지 맙시다.
그런데 르우벤 자손들에게 고라와 비슷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첫째입니다. 고대의 장자 우선권대로라면 르우벤 지파가 이스라엘 중에 지도적 위치에 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도적 위치에 선 것은 레위 지파와 유다지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을 할 때 선두에는 항상 유다 지파가 섰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두 번째였습니다. 최고 지도자의 자리도 레위지파인 모세가 가지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이었던 다단, 아비람, 온은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고라는 자신과 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르우벤 지파 장로들에게 접근했습니다. 민수기 26장 9절에 따르면 다단과 아비람은 이스라엘의 유력한 장로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불만을 불공정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거룩한 백성인데 무슨 자격으로 모세와 아론이 계속 최고 지도자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제사장도 될 수 있고 최고 지도자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라는 공정사회 프레임으로 르우벤 지파를 규합했습니다. 불공정 프레임으로 그들을 자신과 묶어 버렸습니다.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당을 짓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라카흐입니다. 라카흐는 ‘받다, 취하다, 손을 잡다’는 뜻입니다. ‘당을 짓다’는 말은 ‘뜻이 같은 사람들을 취했다, 뜻이 같은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고라에게는 아론에 가려 항상 2인자라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다단, 아비람, 온도 유다 지파에 가려 항상 두 번째라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최고 지도자 자리가 탐이 났습니다. 두 부류가 손을 잡았습니다. 불만과 불만이 손을 잡았습니다. 불만이 같은 종류의 불만을 취한 것입니다. 거기에 또 다른 불만 세력이 붙었습니다. 그 불만은 광야 생활 중에 계속 쌓여 갔습니다. 고라는 불만 위에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고라는 그 불만을 불공정이라고 속였습니다. 그 불공정 프레임을 사람들에게 씌었습니다. 하지만 불만의 끝은 멸망입니다.
불만을 불공정이라고 부른다고 불만이 불공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을 손이라고 해서 발이 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을 아무리 손이라고 해도 손은 손입니다. 발을 손이라고 해서 발이 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만이 불공정의 프레임을 써도 불만은 여전히 불만입니다. 불만이 불공정 프레임을 쓴다고 불만이 불공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불만을 불공정이라고 합리화하지 마세요. 불만은 불만입니다. 불의는 불의입니다. 거짓은 거짓입니다. 자신의 불의를 정의라고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거짓을 정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공의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반드시 망합니다. 마귀는 불만을 불공정이라고 속입니다. 왜요? 망하라고요. 마귀는 우리가 거짓으로 망하기를 바랍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속지 마세요.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서든지 손을 잡으려거든 감사와 기쁨과 손을 잡으십시오. 불만, 원망, 반역과 손을 잡지 마십시오. 그 끝은 멸망입니다. 어디서든지 당을 짓지 마십시오. 혹 당을 만들려면 정당한 당을 만드십시오. 불의한 당을 만드는 것은 자신도 망하고 조직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라는 불만 프레임으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변장하지 마세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위장하지 마세요. 정직하세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세요.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길입니다.
2. 고라가 명성 프레임을 쓰다
두 번째로 고라는 자신이 만든 조직에 그럴듯한 명성 프레임을 짜서 씌었습니다. 고라는 고라당을 사회의 명망있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포섭해 자기 당에 가입하도록 했습니다. 명성 프레임을 짜서 자기 조직에 씌운 것입니다. 평판이 있는 사람들을 규합해 자신의 역성혁명이 선한 것처럼 꾸민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불의한 일에 아주 쉽게 빠집니다. 많이 배워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쉽게 동조합니다.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은 사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는 사람이 옳지 않은 일에 쉽게 빠져듭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어리석습니다.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 어느 순간에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합니다. “내가 왜 그랬지? 뭐에 씌었었나봐!”,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한 없이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아주 어이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고라의 반역에 이스라엘 중에 이름이 있는 지휘관 250명이 가담한 것입니다.
<2절>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이름 있는’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쉠’입니다. 쉠은 ‘이름, 권위, 명성, 평판,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있는 지휘관’은 ‘권위가 있는 지휘관, 명성 있는 지휘관, 평판이 있는(평판이 좋은) 지휘관’이라는 의미입니다. 지휘관은 천부장을 가리킵니다. 천 명 중에 한 명을 이스라엘의 지휘관으로 뽑았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천부장이 600명이 있었습니다. 천부장은 오늘날로 말하면 연대장 정도 되는 실력자입니다. 그냥 아무나 뽑은 것이 아니라 1000 명 중에서 고르고 골라 선택한 사람입니다. 1000 중에 한 명이니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겠습니까? ‘이름 있는 지휘관’이라는 말에서 이들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실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총회>는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와 같은 기관으로 최고 지도자인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는 기관입니다. 지휘관 600명은 이스라엘 총회에서 검증한 후 선택한 실력과 덕을 겸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12지파에는 최고 지휘관이 1명씩 있었습니다. 모두 합하면 지휘관이 612명입니다. 이 612명 중에 250명이 고라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군부의 약 42프로입니다. 반 가까운 세력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고라가 얼마나 많은 세력을 장악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둘 로 쪼개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것도 이름이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질 판이 되었습니다. 고라는 명성 있는 사람들을 규합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불만이 정당한 것처럼 프레임을 짰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갔습니다.
제가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장로님들 중에 꽤 성공한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업을 크게 했습니다. 거부이었습니다. 부인은 교회에서 정말 존경받는 권사님이었습니다. 정말 귀하게 보이는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교회 안에서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스캔들이 폭로되자 그 장로는 당회 일부 장로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당회원의 권위를 내세워 교회 안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치리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담임목사님이 구체적인 사항을 알아보자며 보류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실이 하나씩 밝혀졌습니다. 그 장로는 부끄러웠는지 부인 권사님과 함께 교회를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쪽 편에 섰던 장로들이 끝까지 그 장로 편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말이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이름도 있는 사람이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담임목사님을 오히려 내쫓으려고 공금횡령으로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목사님에게 전혀 혐의가 없자 다른 것으로 또 고발했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결국 교회는 둘로 쪼개졌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고요? 이름이 있는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사람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똑같습니다. 많이 배웠다고 더 낫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이라고 절대로 더 낫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저 사람은 그 자리에 어떻게 올라갔지?’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합니다. “줄 잘 서서 그래요.” 세상에는 어쩌다가 줄 잘 서서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많습니다. 지위, 명예, 부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을 보세요. 인류대 출신들입니다.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뒤로 온갖 나쁜 짓을 다 합니다. 250명의 이름 있는 지휘관은 어처구니없이 고라당에게 넘어갔습니다. 모두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덕망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고라에게 어처구니없이 넘어갔습니다. 높은 지위, 부, 명예를 무조건 따르지 마십시오. 우러러 보지 마세요. 대단하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그냥 똑같은 사람입니다. 조금 더 가졌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게는 우리가 따라가거나 본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따라가십시오. 지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3. 고라가 모세와 아론에게 씌운 프레임
고라는 자신의 역성혁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모세와 아론을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라는 악한 프레임을 짜서 모세와 아론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 프레임은 3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욕심쟁이 프레임입니다.
<3절>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너희가 분수에 지나다’는 말은 ‘너희가 너무 많이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욕심쟁이라는 말입니다. 고라의 눈에는 모세와 아론의 사역이 권력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무 많이 가졌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직분은 권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직분입니다. 섬기는 직분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많이 가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권력을 분산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의 총회를 만들어 중요 사항을 의논했습니다. 총회에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만히 잃어 보세요. 모세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한 것이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모세는 종이었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아론의 네 아들 중에 두 아들이 직분을 잘 못 수행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잘 못하면 죽는 직분이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라는 모세와 아론이 너무 많이 가진 것처럼 <욕심쟁이프레임>을 짜서 사람들 앞에서 씌었습니다. 고라가 짠 프레임으로 모세와 아론은 욕심쟁이가 됐습니다.
둘째, 거룩한 프레임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이 모두 거룩하고 여호와께서 그들 모두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9장 5절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의 조건은 순종에 있는데 그들은 불순종도 아닌 반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거룩한 백성 프레임>을 짜서 모세와 자신들, 그리고 이스라엘 회중을 한 곳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동일하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민주적인 프레임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라가 자신의 정치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악한 프레임에 불과합니다.
셋째, 교만 프레임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3절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이스라엘 회중이 모두 보았습니다(출19: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중이 보는 앞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스스로 높인 적이 없습니다. 아론도 스스로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 첫 직무를 수행할 때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살라버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보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고라는 교만 프레임을 짜서 모세와 아론에게 씌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교만한 사람이 됐습니다.
이 삼중 프레임은 아주 교묘하게 짜여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지금 감당하고 있는 직분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욕심쟁이에 거만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겸손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고라가 만든 프레임은 겉으로 보면 아주 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민주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은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는 인본주의 프레임입니다. 이 프레임은 아주 마귀적입니다.
고라는 자신이 만든 프레임으로 아주 의롭고 공평하며 정의로운 사람으로 변장했습니다. 반면에 모세와 아론은 아주 사악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프레임에 나라의 반가량이 넘어갔습니다. 여론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식, 덕, 세상 명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상 명예 권세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프레임의 천재입니다. 마귀는 프레임을 짜서 교회를 공격합니다. 성도를 공격합니다. 마귀의 프레임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프레임을 깨뜨렸습니다. 또 마귀의 프레임은 기도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기도로 마귀의 프레임을 무너뜨렸습니다. 모세는 고라당의 말에 한 마디도 대구를 하지 않습니다. 전혀 토론이나 변론을 하지 않습니다. 뭐라 한 마디 할 만한데 일체 말이 없습니다. 고라와 그 일당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모세는 고라당의 짜놓은 프레임을 깨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4절>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엎드렸다가’라는 말에 앞에 우리말 성경에는 ‘그의 얼굴’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엎드리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떨어뜨리다’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라는 말을 원어 성경으로 직역하면 ‘모세가 듣고 그의 얼굴을 떨어뜨렸다.’가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떨어뜨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말은 고라당 앞에서는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세상 앞에서 얼굴을 아래로 떨어뜨리지 마세요.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떨어뜨리지 마세요. 세상 부, 세상 권세 앞에서 기죽지 마세요. 당당하세요. 그거 별 거 아닙니다. 고개는 하나님 앞에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세상 앞에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기도가 마귀의 프레임을 깨뜨리는 무기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세상의 프레임을 무너뜨려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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