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그리스도의 키까지 자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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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 4:13
주일오전예배 | 2020-09-2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16세기 가톨릭은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합니다. 면죄부(면벌부, 대사부)는 죄에 따른 형벌을 감면해주는 증명서입니다. 교황청은 헌금을 하면 연옥에서의 형벌이 줄어들거나 완전히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사이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돈을 내면 죄가 사해진다는 교황청의 주장을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15171031일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 반박문>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입니다. 이것이 중세의 종교개혁에 도화선이 됩니다. 95개 조항이 인쇄되어 2주 만에 유럽 전역에 퍼집니다. 교황청은 발칵 뒤집힙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내세웠던 3가지 기치가 있습니다.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권위를 성경 위에 두었습니다.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리를 성경보다 우선시 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았습니다. 모든 것을 성경에 비추어 성경에 어긋난다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솔라 피데(오직 믿음)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구원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공덕도 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신칭의, 이신득의는 기독교의 실질적인 원리입니다. 루터는 이 원리에 따라 교회가 설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셋째,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입니다(루터). 가톨릭은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협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개혁자들은 구원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이끌며,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죽음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끌어올립니다.  

이 세 가지 기치에 요한 칼빈이 두 가지를 추가합니다. 첫째, 솔루스 그리스투스(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가톨릭은 구원이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특히 마리아를 예수님과 공동대속자로 추앙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솔리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황과 사제들의 권위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개혁자들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상 다섯 가지는 지금까지 개혁교회의 표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5가지 슬로건을 신앙의 잣대로 삼으시고 마지막 시대에 신앙을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1단계 :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라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도달해야 할 신앙의 목표 3단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믿음(믿는 것)과 지식(아는 일)의 일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성경에서 나옵니다. 바른 지식은 성경에서만 나옵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이 잘 못되면 믿음도 잘 못됩니다.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아는 만큼 믿으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듣고 많이 배웁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머리에 많이 쌓였습니다. 그러면 아는 만큼 믿으십니까? 지식과 믿음이 일치합니까? 지식과 믿음이 하나입니까? 아니면 지식과 믿음이 따로따로 놀고 있습니까? 참된 신앙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지식의 일치는 가슴과 머리의 일치입니다. 믿음의 좌소는 마음입니다. 지식의 좌소는 머리입니다. 신앙은 마음과 머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와 가슴이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따로 놉니다. 듣고 보고 배워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는 아는데 아는 만큼 믿지 않습니다. 현대 크리스천은 아는 일은 500인데 믿는 것은 20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300이라면 믿는 것도 300이어야 합니다. 믿음과 지식이 일치할 때 그 믿음이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이 일치하지 않으면 믿음의 힘이 없습니다. 아는 만큼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계 3대 폭포 중에 하나인 나이아가라 폭포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겨진 사람이 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줄타기 곡예사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 1829-1897)입니다. 찰스 블론딘은 18596월에 다가오는 30일에 외줄타기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겠다는 도전장을 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높이는 48m, 폭은 900m입니다. 떨어지면 그대로 죽습니다. 이 폭포를 38피트 봉을 들고 건너겠다는 것입니다. 블론딘은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찰스 불론딘을 보기 위해 5000여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5천명은 정말 많은 인원입니다. 블론딘은 줄에 오르기 직전 관중들에게 여러분 중 몇 명이나 제가 저 줄에 올라서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관중들은 환호와 박수로 대답했습니다. 모두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외쳤습니다. 블론딘은 무사히 줄타기로 폭포를 횡단했습니다. 외발 자전거를 타고 횡단했습니다. 죽마를 타고 횡단했습니다. 눈을 가린 채로도 횡단했습니다. 블론딘은 줄 위에 앉고, 눕고, 물구나무를 섰습니다. 심지어 배낭에서 프라이팬을 꺼내 외줄에서 불을 피우고 오믈렛을 해 먹기도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곡예였습니다. 블론딘은 관중들에게 다시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등에 업고 저 폭로를 건널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관중들은 다시 함성과 박수로 대답했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관중들을 향해 블론딘은 그렇다면 누가 제 등에 업히시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블론딘의 질문에 관중석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습니다. 관중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고 일순간 적막이 감돌았습니다. 그의 능력을 믿는다며 연신 박수와 환호로 열광했던 관중들 5000명 모두가 일순간에 침묵하고 있는 그 순간, “제가 하겠습니다.”라며 엄숙한 침묵을 깨뜨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블론딘의 친구 워싱턴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폭포 위에 매달린 줄을 타고 800미터 이상을 친구의 등에 업혀 건너갑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봅니다. 건너가는 중에 두 사람은 움찔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가슴을 졸였습니다. 손에 땀이 흘렀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외줄타기에 성공합니다. 관중들은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습니다. 이것은 블론딘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신뢰에 감동한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관중들은 블론딘이 사람을 엎고 외줄타기로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블론딘의 등에 업히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블론딘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아는 일과 믿는 일이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성경을 압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수 없이 믿는다고 말합니다. 믿음, 믿음하며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정말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셨습니까? 믿는 것과 아는 일이 따로따로가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하는데 정말 믿고 있습니까? 생각뿐이지 믿지 않는 것 아닙니까? 참된 신앙은 믿음과 지식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머리와 가슴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머리와 가슴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과 믿음이 하나 되는 곳에 이르러야 합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마시고 정말 믿음을 가지세요. 예수님께 나를 맡기세요.  

야고보서 2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여기 떨다는 말이 소름끼치다, 털이 곧추서다’(, 프릿소)는 뜻으로 아주 극심한 공포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귀신들이 하나님을 지적으로 받아들여 입으로는 시인하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믿음과 지식의 불일치를 의미합니다. 귀신은 원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왜 귀신이 됐을까요?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압니다. 지식이 발달했습니다.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지식의 첨단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없습니다. 귀신같이 알면 뭐합니까? 귀신처럼 믿지 않는데, 여러분!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없는 귀신이 되지 맙시다. 귀신 크리스천이 되지 마세요. 머리는 있는데 가슴이 없는 크리스천이 되지 마세요. 가슴이 뜨거운 크리스천이 되세요. 가슴과 머리가 하나인 크리스천이 되세요.  

유대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히틀러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공산주의 혁명으로 2천만 명을 죽인 레닌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1000만 명을 죽인 스탈린도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린이 성가대를 했고 신학교에서 공부도 했습니다. 공부를 잘해 신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칼 마르크스, 모택동, 김일성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살인자가 됐을까요? 왜 악마가 됐을까요? 머리와 가슴이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에 마음이 따라지주리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바리새인들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23:33)라고 책망을 하셨을까요? 아는 일과 믿는 것이 일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기만 하고 믿지는 않아 입만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은 없고 머리만 큰 크리스천은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귀신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이르러야 할 첫 번째 신앙의 단계입니다.

 

2단계 :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  

그리스도인이 이르러야 할 신앙의 두 번째 단계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온전한 사람을 완전한 사람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사람완전한 사람은 다릅니다. ‘온전하다완전하다는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두 단어는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완전하다는 말은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어 부족함이나 결함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완전하다는 말은 이럴 때 씁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간의 무역 분쟁이 완전히 끝났다.” 이 말은 두 나라가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문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두통이 완전히 나았다.”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깨끗하게 치료되었다는 뜻입니다. 완전하다는 말은 어떤 부족도 없다는 뜻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본바탕대로 고스란하다또는 잘못된 것이 없이 바르거나 옳다라는 뜻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이럴 때 씁니다. “그 사람이 2층에서 떨어졌는데 아무데도 다치지 않고 온전했다.” 상황을 볼 때 다리나 팔이 부러져야 합니다. 어디가 깨져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이 온전하다라고 합니다. 또 이럴 때도 온전하다는 말을 씁니다. “차에 쳤는데 어디 다치지 않고 몸이 온전했다.” 그러니까 온전하다는 말은 어떤 큰 충격을 받았는데 변형되거나 상하지 않고 원래 그 상태 그대로 있다는 뜻입니다. 상태가 멀쩡하다는 뜻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변형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잘못된 구석이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전혀 흠이 없이 모든 것이 다 갖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사람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어떤 외적인 충격을 받아도 그 사람의 본바탕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는 작은 일에도 울고불고 짜고 투정을 부립니다. 하지만 어른은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대로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온전한 사람은 세상의 환란이나 시험이 와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바탕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사람은 장성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NIVNASB 성경은 온전한이라는 말을 성숙한, 숙성된, 나이든’(matur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온전한이라는 말이 다 자란, 성숙한, 목표에 도달한, 끝에 도달한’(텔에이오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는 말은 성숙한 사람이 되라, 다 자란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 견고한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나이 값을 하는 사람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어떤 외부적인 충격에도 그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시험이 와도 믿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포항에 가면 포항 병원이 있습니다. 원장님이 교회 장로님입니다. 장로님에게는 고등학생 외동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으로 원장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장로님은 진료 중이었습니다. 간호사가 원장님에게 조심스럽게 아드님이 죽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원장님이 그냥 진료를 하더래요. 간호사는 원장님이 못 들었나 싶어서 조금 더 큰 소리로 아드님이 죽었다고 다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원장님이 계속 진료를 하는 거예요. 간호사가 이상해서 더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대요. 그랬더니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말하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간호사가 안 가보시냐고 물었더니 이미 죽은 걸 어떻게 하냐고 살아 있으면 내가 할 일이 있겠지만 죽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그냥 진료를 끝까지 보더래요.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 거예요. 저 같으면 그 자리에서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진료고 뭐고 다 팽개치고 뛰어갔을 것입니다. 울고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난리를 피웠을 것입니다.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장로님은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 앞에서 여전히 신앙의 평정을 유지하는 거예요. 물론 속은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바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두 번째 단계입니다.

 

3단계 : 그리스도의 키까지 자라가라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이르러야 할 단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한 이 목표는 너무 높아 매우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르러야 할 신앙의 목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아니면 다윗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54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산에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무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크리스천에게 바라는 성도상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도 어려운 아주 높은 경지입니다.  

그 경지가 어떤 정도인지 보겠습니다. 여기 장성한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헬리키아(ἡλικία)입니다. 헬리키아는 , 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키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키까지 자란다.’ 또는 그리스도의 나이까지 이른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키가 얼마나 될까요? 3m? 50m? 100m? 아닙니다. 예수님의 키는 자로 잴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이라는 말을 헬라어 성경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충만함의 키(나이)의 분량입니다. 예수님은 충만한 키를 가지고 계십니다. ‘충만함의 키라는 말은 더 이상 클 수 없을 만큼 큰 키라는 뜻입니다. 키가 넘쳤다는 말입니다. 더 큰 존재가 존재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구보다 더 크십니다. 예수님은 우주보다 더 크십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키의 목표는 5m, 50m, 100m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지구보다도 우주보다도 더 크신 예수님의 키입니다.  

주디라는 18세 소녀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위고 고아원에서 자랍니다. 고아원 규정상 16세에 나가야 하지만 주디는 고아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조건으로 2년을 더 머물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디가 고아원을 신랄하게 비꼰 작문을 썼는데, 그게 평의원 눈에 들어 후원을 받게 됩니다. 덕분에 주디는 대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원자는 후원해주는 조건으로 주디에게 매달 한 번씩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편지를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주디는 후원자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주디는 자신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지내온 친구들을 보며 상대적인 박탈감과 열등감을 갖습니다. 게다가 두 과목을 낙제하면서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주고 언제나 변함없이 후원해주는 키다리 아저씨 때문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게 됩니다.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로부터 자립하고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작품을 써 결국 연재를 하게 됩니다.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로 사소한 일상부터 자신이 생각, 아픔, 그리고 연애걱정까지 털어 놓습니다. 하지만 키다리 아저씨는 단 한 번도 주디에게 답장을 쓰지 않습니다. 주디는 줄리아라는 친구의 삼촌친 저비스 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저비스 씨는 주디에게 청혼을 하지만 주디는 거절을 합니다.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왜 저비스 씨의 청혼을 거절했는지 씁니다.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멋진 사회계층인 저비스 씨와 고아인 자신은 어울리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도중 줄리아를 통해 저비스 씨가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편지를 합니다. 주디는 자기가 사랑했던 저비스 씨가 바로 키다리 아저씨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키다리 아저씨는 늘 주디 근처에서 주디를 바라보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주디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말없는 상담자였고 버팀목이었습니다. 잘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끝까지 믿어주고 변함없이 후원해주는 후원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우주에서 가장 키가 크신 키다리 아저씨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변함없는 키다리 아저씨 아닐까요? 말 없으신 상담자이시고 유일한 의지이십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후원해주시는 은혜로운 후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주에서 가장 키가 큰 키다리 아저씨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되는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시간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영원하신 분입니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충만하게 나이를 먹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나이는 인간의 수로 셈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 예수님 보다 나이가 더 많은 존재는 없습니다. 요즘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철부지 어린 아이 같은 어린 아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이를 먹은 만큼 나잇값을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많은 예수님의 나이에 이르러야 합니다. 키라는 말은 외적인 성장입니다. 나이라는 말은 내적인 성장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도 예수님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불량까지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학문이라고 하는 철학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철학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가치들을 묻는 학문입니다. BC 6세기 서양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습니다. BC 5세기에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 , 공기, (4원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어느 날 한 제자가 소크라테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시는 선생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아십니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습니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바로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고의 철학자의 대답입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잘 안다.” 2500년이 흘렀습니다. 철학은 지금도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철학이 시작된 지 2500년이 지났지만 철학의 시조들이 찾던 그 진리를 아직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지식이 발달했지만 아직도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누구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수 천 년 전에 이미 답을 다 해놓았습니다. 성경은 보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나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인도에는 33천만 개의 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를 신들이 나라라고 합니다. 33천만 개의 신이 있다는 말은 33천만 개의 종교가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인도 종교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해탈입니다. 해탈은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33천만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해탈입니다. 해탈을 위해서 고행을 합니다. 수도를 합니다. 외로움과 아픔과 고통을 참고 참선을 합니다. 그런데 해탈을 이루지 못합니다. 지구상에 수 없이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 종교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잘 사는 것! 우환이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의 종교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독수리처럼 아주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풍이 불면 새들은 나무 밑으로 피합니다. 동굴로 바위틈으로 몸을 숨깁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더 높이 올라갑니다. 폭풍우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는 바람도 불지 않습니다. 고요합니다. 독수리 중에는 한 번 날갯짓으로 540km를 날아가는 종류가 있습니다. 다섯 시간 동안 단 한 번 날갯짓을 한다고 합니다. 높이 올라가 기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갑시다.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복음을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사도 요한은 독수리처럼 높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입니다. 복음은 높은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이 높은 이상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높은 곳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정말 높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말 고상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 , 더 높이 바라봅시다. 그리스도의 높은 키까지 자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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