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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제가 어렸을 때 먹어본 음식 중 잊지 못하는 영혼의 음식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조청입니다. 설이 가까이 오면 어머님은 집에서 직접 조청을 만드셨습니다. 이 조청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 흰떡을 찍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었습니다. 다른 집에 가서 조청을 많이 먹어봤습니다. 하지만 저의 어머님 조청하고는 비교가 안 됐어요. 그 조청이 정말 맛있었어요. 요즘도 가끔 어린 시절 설에 먹던 어머님 조청이 생각이 납니다. 맛은 조청 맛입니다. 그런데 그 맛이 달아요. 다시는 맛볼 수 없는 맛입니다. 두 번째는 밀가루 반죽 구이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이 칼국수를 해주셨습니다. 칼국수를 하려면 홍두깨로 반죽을 밀어서 넓게 폅니다. 그것을 다시 여러 겹으로 접습니다. 그리고 한쪽부터 써는데 양쪽 맨 끝은 3-4센티 잘라내고 그 다음부터 칼질을 했습니다. 저는 그 잘라낸 부분을 숯불에 구워먹었습니다. 자투리를 넓게 펴서 숯불에 올려놓으면 노릇노릇하게 구워집니다. 약간 탄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밀가루 반죽이 어떤 부분은 그대로 구워지고 어떤 부분은 빵처럼 부풀어 올랐는데 이 빵처럼 부풀어 오른 부분이 아주 맛있었습니다. 불 냄새까지 나서 정말 맛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전기화덕에 굽는 빵이 아니라 정말 천연화덕에 굽는 빵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칼국수를 하실 때면 옆에 앉아서 “엄마! 크게 잘라줘. 크게 잘라줘.”라며 졸라댄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먹기 어려운 밀가루 구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먹게 된 영혼의 음식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입니다. 저에게 힘든 일을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성경을 폈습니다. 여호수아 1장을 읽게 됐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다. 네 평생에 너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말씀을 다 지켜 행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말씀을 읽는데 이 말씀이 제 속으로 쭉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이 말씀이 제 속으로 쭉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또 제가 말씀 속으로 쭉 들어가는 거 같아요. 이 말씀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말씀을 빨아들인 건지 제 영혼이 말씀 속으로 빨려 들어간 건지 분간이 잘 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너무 큰 은혜가 절 감싸는 거예요. 제 온 몸이 아주 뜨거워졌어요.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콤한지 정말 꿀보다 더 달더라고요. 그건 말로 설명이 안돼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로 성경을 읽다보면 말씀이 아주 달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꿀보다 더 달콤합니다. 성경 말씀에는 맛이 있습니다.
어떤 방송사의 예능프로그램 중에 <아내의 맛>이란 코너가 있습니다. 유명인 부부들이 식탁에서 소확행(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라이프를 찾는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이름이 “아내의 맛”입니다. 타이틀이 아주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의 맛이 있습니다. 남편의 맛이 있고 자식의 맛이 있습니다. 음식에 맛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맛이 있습니다. 쓴 맛이 나는 사람, 떫은 맛이 나는 사람, 신 맛이 나는 사람, 독한 맛이 나는 사람, 소금 맛이 나는 사람, 단 맛이 나는 사람, 감칠맛이 나는 사람 등등 사람에게도 맛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맛이 나는 사람이세요. 고약한 맛인가요? 좋은 맛이 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맛을 경험하라
다윗은 하나님에게도 맛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맛일까요? 8절에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맛이 납니다. 다윗은 그 맛을 알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맛을 언제 봤을까요? 시편 34편에는 이렇게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이스라엘 여자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노래를 했습니다. 이 노래를 들은 사울 왕이 그 때부터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왕이 죽이려하자 다윗이 여기저기 도망을 다니다가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자 옆 나라 블레셋 땅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몸을 피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적대관계에 있으니까 이스라엘 왕에게 쫓기는 사람이 가면 반겨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보자마자 골리앗 장군을 죽인 적장이라며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아기스 왕 앞에 있습니다. 블레셋의 군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습니다.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다윗은 그대로 죽게 생겼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이때 다윗이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위기의 순간입니다.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해서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련 것이 사람의 지혜로움 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아기스 앞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자 다윗은 갑자기 행동을 바꾸고 미친 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염에 침도 질질 흘렸습니다. 행동을 바꾸었다는 말은 그 이전에 가졌던 장군다운 풍모를 버리고 사람들 앞에서 수염에 침을 흘리며 이상한 짓을 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아기스 왕과 그의 신하들 그리고 자신의 수하 장수들 앞에서 이상한 짓을 하며 미친 체를 했습니다. 그러자 아기스가 깜짝 놀라며 웬 미친 사람이냐며 다윗을 내쫓았습니다. 다윗이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다윗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해요. 사람들 보기에 얼마나 민망해요. 저 같았으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신세한탄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나와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립니다. 이 찬양이 시편 34편입니다.
시편 34편은 22절까지 있습니다. 히브리어 자음이 22개입니다. 시편 34편은 그 자음의 순서에 따라 지은 시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가나다시입니다. 다윗이 아기스 앞에서 나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웠는지 히브리어 자음을 순서대로 나열하며 그 순서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새겼습니다. 이때 다윗이 고백한 것이 “하나님의 맛”입니다. 하나님의 맛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선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토브(טוב)입니다. 토브는 ‘좋다, 아름답다, 즐겁다, 기쁘다, 사랑스럽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좋았더라는 말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하나님도 사람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너무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조금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최상급입니다. 이 말이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토브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가장 좋은 것으로 대하시는 의지를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맛이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맛은 최고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의 맛은 최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맛은 최고입니다.
다윗은 잘 못된 판단으로 아기스 앞에서 그냥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미친 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이없는 행동에 아기스 왕과 그 신하들이 그대로 속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어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라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에게 순간순간 최고의 방법으로 인도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해보라는 뜻입니다. 음식의 맛을 보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맛보아 알라는 것입니다. 알라는 말은 하나님의 맛을 직접 경험해보라는 것입니다.
과일의 황제라고 불리는 두리안을 드셔보셨습니까? 어떤 신문기자는 두리안을 ‘냄새는 지옥, 맛은 천국이라는 별명을 가진 열대과일의 황제’라고 했습니다. 외국의 요리평론들은 두리안의 향은 “돼지 변과 테레빈유 그리고 양파를 체육관용 양말에 넣고 뒤섞었다고 하겠다. 몇 야드(1야드는 91.44㎝) 떨어진 곳에서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지독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막상 입에 넣어 맛을 보게 되면 너무 맛이 있어 다시 찾게 되는 중독성 강한 맛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두리안의 맛과 향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론적으로 두리안의 맛과 향에 대해 연구를 해도 한 번 먹어본 것과는 앎에 대해서 전혀 다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이에요. 하나님의 맛에 대해 설명을 아무리 해도 몰라요. 그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알아요. 그래서 다윗이 먹어보라는 거예요. 음식을 먹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먹어보라는 거예요. 사람의 맛은 떫고 시고 짜고 맵지만 하나님의 맛은 최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신 맛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맛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2. 기도와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맛을 경험하라
먼저 기도가 하나님의 맛을 알게 합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맛을 보는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첫째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맛은 기도할 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얻는 하나님의 맛은 어떤 맛일까요? 그것은 기쁨과 평안입니다. 성도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의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물론 그 기도는 마음 속으로 했습니다.
<4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즉각 응답하셔서 다윗을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셨습니다.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어쩌면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이 한순간에 몰살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죽음 앞에서 떨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마음 속을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5절>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그들’은 다윗과 함께 한 다윗의 추종자들입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가드 왕 아기스 앞에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적진 한 가운데서 주님을 앙망할 때 그들 속에 있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광채를 내었습니다. ‘광채를 내었으니’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광채를 입었으니’라고 번역했고, 우리말 성경은 ‘밝게 빛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잠시 어둠의 휩싸였지만 하나님의 광채를 입어 얼굴이 밝게 빛이 났습니다. 그런데 여기 빛이 난다는 말은 얼굴에서 정말 반짝반짝 빛났다는 말이 아니라 ‘기쁘다, 즐겁다’는 의미입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두려움으로 얼굴빛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다윗과 그 부하들이 하나님을 앙망하자 그들의 마음 속에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기쁨과 환희로 얼굴이 빛나게 하셨습니다. 다윗과 그 추종자들은 지금 독안에 든 쥐 신세입니다. 빠져나갈 곳도 빠져 나갈 수도 없습니다. 꼼짝 없이 죽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 속에 기쁨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적진 한 가운데서 누리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주변 환경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면 사자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 앞에서도 평안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서도 평안했습니다. 하나님은 위기 중에 다윗과 그 모든 부하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신 다음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6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맛을 알게 합니다. 그 맛은 응답의 맛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기도는 젓가락입니다. 젓가락으로 음식의 맛을 보듯이 기도는 하나님의 맛을 보게 하는 젓가락입니다. 기도는 숟가락입니다. 숟가락으로 국의 맛의 맛을 보듯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보는 숟가락입니다. 기도의 젓가락과 기도의 숟가락으로 하나님의 맛을 보세요. 기도의 숟가락, 기도의 젓가락을 들고만 있지 마세요. 사용하세요. 기도로 하나님의 맛을 경험해보세요. 하나님의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은 최고입니다. 이 세상 어떤 맛도 하나님의 맛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맛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알게 됩니다. 경외 신앙이 하나님의 맛을 알게 합니다. 경외할 때 느끼는 하나님의 맛은 어떤 맛일까요? 그 맛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만족입니다.
7절에 주를 경외하는 자를 여호와의 천사가 둘러 진 치고 건진다고 했습니다. 천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말라크입니다. 말라크는 사자, 전령, 천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사명이 있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명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당신의 사자를 보내셔서 보호하십니다.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을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라고 했습니다. 젊은 사자는 힘이 센 사자입니다. 사냥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완벽히 갖춘 사자입니다. 가장 강한 사자, 젊고 유능한 사자는 사냥을 잘 합니다. 그래서 배가 부릅니다. 먹을 것이 넘칩니다. 하지만 젊고 유능한 사자라도 배가 고플 때가 있습니다. 항상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주릴 수 있습니다. 먹이를 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물을 마시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좋은 것’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생활의 만족이 있습니다. 마음의 만족이 있습니다. 영혼의 만족이 있습니다. 만족, 이것이 경외하는 자들이 맛볼 수 있는 하나님 맛입니다. 경외함으로 하나님 맛을 보세요.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렸습니다. 많은 여우들이 포도를 따먹으려고 서로 물고 싸움을 합니다. 그러다가 힘이 가장 센 여우 한 마리가 다른 여우들을 제치고 포도나무를 올라갑니다. ‘툭’ 건들이기만 해도 꿀 같은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탐스런 포도입니다. 힘이 가장 강한 여우가 그 포도를 따는 순간, 다른 여우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올라다봅니다. ‘아, 얼마나 맛있을까? 재는 좋겠다.’ 드디어 포도를 입에 넣고 ‘톡’하고 깨물었는데, 온몸에 짜릿한 신맛이 쫙 퍼집니다. 눈이 감기고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집니다. 아래에서 쳐다보던 여우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묻습니다. “맛이 어때? 좋지?” 정상에 선 여우는 뭐라 답했을까요? “뭐 맛이 이래? 못 먹겠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맛 때문에 속이 안 좋은데도 “죽인다. 맛 죽여!”하면서 내려옵니다. 나머지 여우들은 그 포도를 따먹기 위해서 다시 치열한 싸움을 벌입니다. 거기서 이긴 여우가 또 포도나무엘 올라갑니다. 올라간 여우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 꿀물이 흐를 것 같은 포도를 입에 물었습니다. 한껏 부푼 마음으로 포도를 꽉 깨물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너무 시어서 얼굴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이런 거짓말쟁이! 속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아, 나도 저 녀석처럼 맛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입니다. 아래에서 다른 여우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맛이 어때? 정말 맛있지?”라고 묻자 정상에 선 여우가 앞에 먼저 간 여우처럼 “어, 맛있어.”라며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를 제일 먼저 쳐다봤을까요? 자기보다 앞서, 먼저 포도를 따 먹은 여우를 쳐다봅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여우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우가 올라갔습니다. 동일한 신 포도를 먹었지만 아무도 시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좋다고 너희들도 먹어보라고 할 뿐입니다.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최고의 만족이 있을 것 같아 발버둥 쳐 정상에 올라갔는데 그곳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상태, 바로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정상에 있는 0.1퍼센트의 사람들이 허무한 행복에 앉아 자태만 뽐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도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앉아 그럴듯한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지난 8월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이 어머니가 남긴 상속 재산 일부를 나눠달라며 동생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정 부회장은 자신의 여동생과 남동생을 상대로 10억 원 상당의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유류분은 상속 받은 사람이 맘대로 처리해선 안 되고, 일정 상속인을 위해 반드시 남겨둬야 하는 몫입니다. 어머니는 재산을 2018년 둘째와 셋째에게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지난해 2월에 별세했습니다. 정 부회장은 필체가 어머님의 필체가 아니라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유언장에 적힌 필체와 평소 조씨(정 부회장 어머니)의 필체가 동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정 부회장이 유언장 소송에선 진 것입니다. 정부회장은 다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번에 이기면 10억 중에 2억 원 정도를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정 부회장은 연봉은 40억 원(현대카드 17억7700만원, 현대커머셜 12억9500만원, 현대캐피탈 9억1700만원)에 이릅니다. 1년에 40억 버는 사람이 2억 원 때문에 동생들과 싸우는 거예요. 정 부회장의 여동생은 정 부회장의 ‘갑질 경영’을 막아달라는 제목으로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최고가 되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노력하세요. 하지만 거기에 인생의 만족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자는 정 부회장을 비꼬듯 기사를 썼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습니다. 세상은 허무합니다. 정말 만족은 하나님의 맛에 있습니다. 그 맛을 경험해보세요.
3. 찬송으로 하나님의 맛을 경험하라
하나님의 맛을 보고 그 맛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찬양입니다. 다윗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도로 맛보았습니다. 꼼짝 없이 죽을 위기에서 건짐받은 다윗은 하나님의 맛이 정말 달콤했습니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쫓겨나와 즉시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립니다.
송축이라는 말이 “기쁜 일을 기리고 축하함”이라는 뜻입니다. 송축이 히브리어로 바라크입니다. ‘무릎을 꿇다. 예배를 드리다’는 뜻입니다. 찬양(테힐라. 노래하다)은 노래로 아름다움이나 훌륭함 따위를 기리고 높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체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자신의 목숨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를 추종하는 부하들의 목숨까지 달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죽이지 않고 블레셋 진영에서 추방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벗어나 이스라엘 영내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고 높였습니다. 찬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자랑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넓고 크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했습니다. 또 찬양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높이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찬양은 하나님의 맛을 알게 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왜 찬양이 하나님의 맛을 알게 할까요? 하나님은 성도의 찬양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라고 했습니다. 여기 계시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솹입니다. 야솹은 ‘앉아있다, 살다, 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송 위에 앉아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우리 옆에 앉아계시게 하는 노래입니다. 찬양을 하세요. 주님이 우리와 옆에 계십니다. 찬양은 찬양 중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의 맛을 알게 합니다. 사무엘상 16장 14절에 악령이 사울을 번뇌케 했다고 했습니다. 번뇌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빠아트입니다. 빠아트는 ‘무서워하다 떨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악령의 괴롭힘으로 무서워 떨며 극한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때 다윗이 수금을 타자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상쾌하여’라는 말이 기분이 좋아졌다는 뜻입니다. 찬양은 기쁨을 줍니다. 모압, 암몬, 마온 사람들이 유다 여호사밧 왕을 치러 왔습니다. 여호사밧이 성가대가 예복을 입고 군대 앞에 찬양을 하게 했습니다. 찬양을 시작하자 적군이 서로 치로 받고 싸우더니 자멸해버렸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을 즐겁게 하신 사건이라고 했습니다(대하20:27). 찬양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 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찬송을 했습니다. 그때 쇠사슬이 풀리고 감옥문이 열렸습니다.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자 간수와 그 가족이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행16:34). 찬양할 때 하나님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찬양의 맛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일곱 번씩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영원히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가드왕 아기스 앞에서 쫓겨난 후 제일 먼저 다윗이 한 것이 찬양입니다.
세상의 맛이 참 좋습니다. 쇼핑센터,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맛이 있습니다. 맛집을 다니며 좋은 음식을 먹는 맛이 있습니다. 즐기는 맛이 있습니다. 돈맛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맛에 너무 빠지지 마세요. 기도와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맛을 경험하세요. 찬양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세요. 설교로 듣고 머리로만 아는 하나님의 맛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나님의 맛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믿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맛을 보게 되면 내가 믿는 기독교를 입으로 설명하는 그리스도인이 가슴으로 증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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