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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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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계시록 1:4-5
주일오전예배 | 2020-08-23
설교자 : 서요한 목사

호레이시오 스패포드(H. G. Spafford)는 시카고의 성공한 변호사였고 린드대학교와 시카고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였으며 노스웨스트 장로교신학교 이사 및 운영 위원이었습니다. 또 세계적인 전도자 무디의 친구로 무디 교회에서 회계집사와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시련이 닥쳐옵니다. 그가 43세 되던 1871년에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습니다. 화재 직전에는 급성 전염성 피부질환으로 첫째 아들을 잃습니다. 엄청난 시련 앞에서 스패포드와 그의 가족은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1873, 그는 아내와 네 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때마침 유럽에서 복음전도사역을 하고 있던 친구 무디의 전도 집회도 돕고 싶었습니다. 18731115, 그와 그의 가족은 프랑스 여객선 빌르 드 아브로호를 타고 뉴욕항을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출항 몇 분 전에 스패포드는 아주 급한 일이 생겨 배에서 내렸습니다. 아내와 딸들을 태운 배는 순항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22일 새벽 2, 배가 대서양 한 가운데서 영국 철갑선 라키언호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스패포드의 딸들은 모두 배와 함께 잠기고 아내만 물 위로 떠올라 구조되었습니다. 스패포드의 부인은 혼자만 살아남았음(Saved Alone)’이란 짤막한 전문을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소식을 전해 받은 스패포드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딸들을 잃고 정신없이 헤맬 그의 아내를 데리러가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배에 탄 후, 선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장은 스패포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 이 배는 당신의 딸들이 잠긴 물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애써 잔잔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스패포드의 마음에 커다란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그 곳에 잠들어 있을 딸들을 생각하니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는 선실로 돌아와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던 저에게 어찌하여 이토록 큰 시련을 주십니까?” 그는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혹시라도 실족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절망하고 탄원하며 기도하던 스패포드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평안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평안의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God's will be done!)” 아침이 되자 스패포드는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413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입니다. 시카고로 돌아온 스패포드는 필립 블리스에게 자신의 아픈 사연과 고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고백과 시에 감동을 받은 블리스는 그 자리에서 곡을 붙였습니다. 스패포드는 그 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곳에 고아원을 세우고 평생을 주님과 고아들을 섬기다가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스패포드 고아원이 있는데 지금까지 35,000명의 고아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7이라는 숫자를 자주 사용합니다. 신약 성경에 7이라는 숫자가 94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11, 마가복음에 8, 누가복음에 8, 요한복음에 1, 사도행전에 4, 히브리서에 2번 나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는 무려 60번이나 나옵니다. 신약 성경에 쓰인 7이라는 숫자의 2/3 정도가 계시록에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22장까지 있으니까 매 장마다 2-3회씩 7일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 요한은 계시록에서 7이라는 숫자를 반복적으로 사용했을까요? 7이라는 수는 완전, 충만, 전체, 완성, 종결, 마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주일이 7일입니다. 1년은 52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년은 7일을 단위로 시기가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7일째 완성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일곱 번째 해를 안식년으로 지키라고 했습니다. 7년씩 일곱 번을 지난 50년째는 희년으로 지키라고 했습니다. 7은 완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일흔 번씩 일곱 번, 그러니까 490번까지 용서해주고 491번째는 용서해주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끝까지 용서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몇 번 용서해주시다가 죄를 자꾸 지면 에이 못 참겠다. 이제 용서 못해줘!”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용서해주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레위기 16장에 법궤 위에 염소의 피를 일곱 번 뿌리라고 했습니다. 또 수송아지 피와 염소의 피를 제단의 뿔에 일곱 번 뿌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씻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완전하게 씻어주십니다. 어떤 죄는 씻어주시고 어떤 죄는 씻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다 완전히 씻어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7은 완전, 종결, 충만, 완성입니다.  

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성경의 맨 끝입니다. 창세기가 성경의 시작이라면 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입니다. 성경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입니다. 역사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언약의 완성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심판의 완성입니다. 수천 년 동안 계속되던 하나님의 대하드라마의 완성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7이라는 숫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요한은 계속 7이라는 숫자를 사용해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 살고 있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역사의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어지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역사는 지금 7,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도 7일이라는 숫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들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천사들은 그 계시를 다시 요한에게 주었습니다. 요한은 그 계시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냈습니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아시아는 지금의 터키를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고 터키는 서쪽 끝에 있습니다. 유럽과 맞닿는 곳입니다. 요한은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유럽 근교에 많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고린도교회, 빌립보교회, 로마교회가 등등. 그런데 요한은 왜 이 세상의 모든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고 하지 않고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고 했을까요? 고대부터 7은 종교적으로 완전, 충만, 전체, 종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도 7은 완전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에 보냈다는 말은 일곱 교회에만 보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또 모든 교회에 보낸다는 말은 시대를 초월에 앞으로 오고 있는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가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것이 7이라는 말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셨고, 예수님께서 다시 천사에게 주셨고 천사는 다시 요한에게 주었습니다. 요한은 다시 이 편지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낸 게 아닙니다. 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어떤 집사에게, 어떤 권사에게 보낸 게 아니라 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편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이라는 편지는 더 많이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더 읽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계시록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알아야 할까요? 우리 시대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확실성입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J.K. Galbraith)교수는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과거처럼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경제이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의 삶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바톤 페인(J. Barton Payne)<성경예언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은 모두 1817개로, 구약성경에 1239, 신약성경에 578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나오는 1239개의 예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신약의 578개의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 계시록을 읽어야 할까요? 계시록이 끝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책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집의 맨 마지막에는 답이 있습니다. 계시록은 역사의 답안지입니다. 계시록은 인생의 답안지입니다. 성경에서 인생의 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에서 답을 찾으세요. 왜 우리는 계시록을 읽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분명한 답이 이 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은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등대입니다. 불안한 세상, 계시록이라는 빛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시작하며 이렇게 축복기도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여기에 함께 예배드리시는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와 평강의 출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다른 것에서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아닙니다. 돈이나 힘에서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아닙니다. 삼위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평강을 입어야 합니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4-5>
  •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요한은 성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장차 오실 이라는 말의 시제가 현재진행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오실 이라는 말은 지금 오고 계시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삶 속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우리 삶 속에서 역사와 인생들을 살피시고 간섭하시며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악인들은 마치 자기가 세상의 주인인양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억울한 사람들이 생깁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역사와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주변에서 악인들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십니까? 그냥 보고 계시지 마세요. 악인들 마음대로 되지 않도록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요한은 성령님을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일곱은 숫자 일곱이 아니라 완전함을 상징하는 일곱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 인생의 모든 것, 역사의 모든 것을 살피시고 간섭하십니다. 그 살피시고 간섭하시고 이끄심에 있어서 완전하십니다. 실수가 없으십니다. 전혀 오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일곱 영이십니다. 완전하신 영이십니다. 이것을 역사 속에서 증명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억울하고 아파도 예수님처럼 참으세요.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세요.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 되신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 예수님처럼 충성된 증인이 되세요. 요한이 다 증거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뜻의 증거자가 되십시오. 요한은 삼위일체 신앙을 가졌습니다.  

요한은 왜 요한계시록 서두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을까요? 마지막 때는 이 삼위일체 신앙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이단들의 특징은 모두 하나 같이 삼위일체 신관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안증회)는 성부론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어머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자론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낳기 때문에 하나님 보다 못한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신천지>는 성령론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주가 이만희가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영십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왜 이단에 빠질까요? 삼위일체 신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 유배 중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되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신다는 삼위일체 신앙을 정확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인천반석교회 이경섭 목사님이 크리스천 투데이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왜곡된 현상 중 하나가 믿음의 대상(삼위일체 하나님)’보다는 믿음의 내용(자기가 원하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믿음의 대상은 간과되고, ‘될 줄로 믿습니다혹은 믿으면 된다같은 콘텐츠(contents) 중심의 신앙, 혹은 소망이나 신념믿음을 투영시킨 심리학적인신앙으로 변질되고, 그것들이 곧잘 정통 신앙으로 둔갑한다.” 믿음으로 소원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원성취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은혜도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입니다. 혼란한 시대입니다. 우리 신앙을 다시 한번 견고히 합시다.

3.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은혜와 평강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평강이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에이레네는 평화, 평강, 평온, 평안, 화평, 안녕, 건강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함께 묶다, (하나로) 합치다, 함께 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어 있는 것을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합쳐야 얻을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불신이 생깁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가 될 때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평강을 읽은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과 나누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 합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로 묶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에게 평강이 있습니다. 사람이 평강을 잃어버린 이유는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누어졌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이 분리불안입니다. 죄를 짓는 순간 아담은 하나님과 나누어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때 찾아온 것이 불안, 걱정, 염려, 두려움입니다.  

염려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입니다. 메림나오는 마음이 나누어지다, 분배하다, 마음이 어수선해지다는 단어(μεριζω)에서 온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나누어질 때 걱정, 근심, 염려, 불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 염려, 불안을 이기고 평강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과 다시 합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합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죄로 나누어진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입니다. 이 십자가를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헬라어입니다. 카리스(χάρις)호의, 선물, 자비, 감사, 은혜, 너그러움이라는 뜻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이 십자가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로 묶일 때 우리에게 평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 다음이 평강입니다. 불안하십니까? 평안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은혜를 구하세요.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은혜를 받으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cheap grace)란 말을 했습니다. 값싼 은혜, 싸구려 은혜가 무엇일까요? 자기중심의 은혜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얻는 은혜입니다. 내게서 나오는 은혜입니다. 내가 만든 은혜입니다. 선행을 하고, 도를 닦고, 수행을 하면 얻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혜의 탈을 쓴 가짜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은혜를 흉내 내고 있는 짝퉁은혜입니다. 가짜 은혜가 주는 것은 가짜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가짜 평안입니다. 진짜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입을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불안하세요. 두려우세요. 답답하세요. 예수님을 믿으세요. 십자가를 의지하세요. 예수 이름을 힘입으세요. 예수 이름에 평안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시대 로마가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팩스 로마나입니다. 팩스 로마나라는 말은 로마의 의한 평화라는 뜻입니다. 로마는 세계 평화를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로마는 사람들을 칼과 창으로 찌르고 죽이고 정복해서 평화와 번영을 만들었습니다. 이 평화는 칼에 의한 평안입니다. 이 번영은 힘에 의한 번영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평안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강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성공도 합니다. 그래서 평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평안은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진짜 평안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밧모섬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있습니다. 죄수입니다. 나이가 90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의 현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축복합니다. 거꾸로 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야곱에게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그대도 있으면 일가족이 모두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들 요셉이 애굽에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살기 위해 가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은 바로 앞에서 서서 먼저 바로를 축복합니다.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요? 바로는 당대 아프리카 최강대국입니다. 대국을 꿈꾸는 나라입니다. 흉년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양식이 풍족한 나라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팔레스타인 한 조그만 고을의 족장입니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애굽에 내려온 사람입니다. 바로가 야곱을 축복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야곱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감옥에 있어도, 굶어 죽어도 그들에게는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평안이 어디서 왔을까요? 먹을 거요? 출세요? 힘이요?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혼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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