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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AD 64년 네로 황제는 로마의 화제 사건을 빌미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로마에 복음의 꽃이 막 피려는데 떠나려니 비통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나자리우스라는 그리스도인의 안내를 받으며 베드로가 로마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자리우스에게 낮게 드리워진 햇살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얘야 너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햇살이 보이느냐? 빛 속에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자리우스는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자리우스는 걱정스러운 말로 “사도님! 어디가 편찮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입을 벌린 채 놀람과 희열과 황홀한 눈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다 갑자기 땅에 끓어 앉더니 손을 쳐들고 외쳤습니다. “오오, 그리스도시여, 그리스도시여” 마치 베드로는 누군가의 발에 입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엎드려서 땅에 얼굴을 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참을 죽은 듯이 땅에 엎드려 있던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에게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 도미네?) 나자리우스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랐습니다. 후에 나자리우스는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의 어린양들을 버리면 내가 로마에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 베드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얼굴을 숙이고 죽은 사람처럼 땅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나자리우스가 겁에 질려 베드로를 부축하려는 순간, 베드로는 몸을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잡은 채 로마를 향해 몸을 돌렸습니다. “다시 로마로 가자!” 다시 돌아온 베드로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는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사도의 얼굴엔 어제의 비통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소리는 힘이 넘쳐흘렀고 감격에 찬 표정에 희열에 넘쳐흘렀습니다. 베드로는 체포됐고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사형을 집행하는 형리에게 “내가 어찌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겠는가?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불에 타 죽었습니다.
요한의 형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러시아에서 십자가에 꽁꽁 묶여 3일 동안 매달려 있다가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에 달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계속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빌립은 터키에서 채찍에 맞은 후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미늘창(끝이 둘 혹은 세 가닥으로 갈라진 창으로, 도끼‧창‧갈고리를 하나로 묶어 놓은 무기)으로 고문을 당하다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이교도들에게 거꾸로 매달려 톱에 몸이 잘려 죽었습니다. 11명의 사도가 순교했습니다. 이제 요한만 남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AD 96년에 기록한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우리말 성경에서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 첫 번째 단어는 <계시>입니다. 계시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계시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시란 무엇일까요?
‘계시’는 열 ‘계’(啓) 자에 보일 ‘시’(示)를 써서 열어서 보인다는 뜻입니다. ‘열어서 본다’가 아니라 ‘열어서 보인다’입니다. 내가 열어서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열어줘서 내게 보이는 것입니다. 계시를 영어로 레블레이션(revelation)이라고 합니다. 레블레이션은 라틴어의 revelatio에서 온 말로 ‘베일을 열어젖혀 보임’. ‘자기를 열어 밝힘’. ‘폭로’라는 의미입니다. 계시를 히브리어로는 깔라라고 하는데 깔라는 ‘가려진 것을 제거함’이라는 뜻입니다. 계시를 헬라어로는 아포칼륍시스(ἀποκάλυψις)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아포(제거하다)와 칼륍토(덮는다)의 합성어입니다. 뜻은 ‘베일을 벗기다’, ‘덮개를 열다’,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이다’입니다. 계시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 과학적 탐구로 알 수 없는 영적 세계를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고 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 있는 종교입니다. 사람이 도를 닦아서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유교처럼 깊은 학문으로 만들어진 종교도 아닙니다. 또 기도를 많이 해서 만들어낸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환상 중에”, “묵시받은 말씀” 등등의 표현들이 계속 나옵니다.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과 사상입니다. 그래서 ‘공자 가라사대’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불경은 부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의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계시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록을 예수님께 주셨고 예수님은 천사에게, 천사는 요한에게, 요한은 주의 종들에게, 주의 종들은 다시 성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록을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여주신 책입니다. 계시록에는 본다는 말이 71번 나옵니다. “내가 보았다”는 말이 35번, “내가 바라보았다”는 말이 7번, “내가 주목하였다”는 말이 5번, “보라고 명령을 받았다”는 말이 18번, “그가 내게 보이셨다”는 말이 2번, “보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 계시록에는 본다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서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26).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눈으로 보세요. 귀로 보세요. 마음으로 보세요. 믿음으로 보세요. 계시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책입니다.
계시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습니다. 10장 2절에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라고 했습니다. 작은 두루마리가 그의 손에 펴져 있다고 했습니다. 작은 두루마리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이 예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은 계시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계시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빠진 계시록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습니다.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습니다. 앙꼬 없는 찐빵과 같습니다. 예수님 없는 계시록은 허무합니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계시록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계시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말씀은 역사는 예수님의 뜻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앞으로 역사 속에서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성경대로 되었고 성경대로 되고 있고 성경대로 될 것입니다. 역사가 권력자, 지식인, 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인지 역사는 성경대로 되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역사가 예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초대황제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재위 기간 BC27~AD 14)는 BC 27년부터 40년 동안 로마를 다스렸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기틀을 닦고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이후 모든 황제들의 명칭 뒤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이 붙게 만들 정도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사후에 원로원에 의해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세금을 걷어 들이기 위해 BC 4년에 인구 조사를 위해 모든 사람들을 고향으로 가게 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의 말 한 마디에 천하가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그때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대로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출생했습니다. 누가 봐도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로마 제국이었고 그 중심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있었습니다. 그의 명령 한 마디에 천하가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명령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었습니다. 천하를 움직이는 황제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인류 역사는 성경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tory는 His Story입니다. 역사는 그 분의 이야기입니다.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년∼1794년)은 「로마 제국 쇠망사」라는 책에서 “역사는 바로 인류의 범행, 우행, 행운의 등기부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번은 불가지론자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역사를 범행, 우행,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우행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역사가 어이없는 사건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역사가 어처구니없는 일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는 참 아이러니입니다. 또 역사를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힘, 실력이 아니라 행운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행운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재수입니다. 에드워드 기번이 역사를 연구한 후에 내린 결론, 그것은 역사가 재수에 따라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 있고 힘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재수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역사는 사람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행운, 재수라는 말을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은혜입니다. 역사는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돈 있고 힘 있고 학식이 있어도 역사를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계시입니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반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손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손길을 느껴야 합니다. 역사와 삶 속에서 재수를 발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세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세요.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미국에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사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록펠러라는 사람이 1870년에 동업자들과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에 세운 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중역 가운데 찰스 휫샤트라는 독실한 크리스천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휫샤트는 출애굽기 2장을 읽었습니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2:1~3) 그는 이 구절을 읽다가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역청이라는 말이 영어로 pitch입니다. 피치는 석유의 일종입니다. 휫샤트는 모세의 어머니가 역청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곳에 기름이 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즉시로 그곳에 지질학자를 파견해 현지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석유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부자가 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다가 부자가 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소설을 썼습니다. 다 좋습니다. 모두 성경 속에서 나오는 복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은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십시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계시는 허무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역사는 허무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허무합니다. 예수님을 찾으세요. 예수님을 발견하세요. 예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2. 다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2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다 증언했다는 말은 자기가 보고 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남김없이 모두 증거했다는 의미입니다. 또 주님께 받은 사명을 다 감당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일생을 한결같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다는 입니다. ‘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호소스(ὅσος, ὁσάκις)입니다. 호소스는 “몇 번이든지, 언제든지, 얼마든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크든지 작든지”, “많든지 적든지”, “길든지 짧든지‘, “가깝든지 멀든지”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어떤 때이든지’라는 의미입니다. 항상 똑같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빌립보서 4장 8절에서는 “무엇에든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빌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무엇에든지”라는 말이 헬라어로 호소스입니다. 호소스는 늘 한결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저는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항상 목사이어야 합니다. 부자를 만나든지 가난한 사람을 만나든지 항상 똑같은 목사이어야 합니다. 늙은 사람을 만나도 목사이어야 하고 어린 아이를 만나도 목사이어야 합니다. 천안에서도 목사이어야 하고 서울에서도 목사이어야 합니다. 천안에서는 목사인데 온양에서는 목사가 아니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크리스천입니다. 크리스천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든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든지 항상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친절한데 싫은 사람을 만난다고 불량스러워지면 안 됩니다. 오늘도 크리스천이어야 하고 내일도 모래도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 한국 사람을 만나도 크리스천이어야 하고 동남아 사람을 만나도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 의식이 있을 때도 크리스천이어야 하고 의식이 없을 때도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한 후에 깨어날 때 심한 욕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아는 권사님 한 분이 무릎을 수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술이 잘 못돼서 재수술을 두 번이나 하셨어요.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는 거예요. 세 번째 수술은 삼성의료원에서 했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수술 후에 깨어나면서 “주여! 주여!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라고 했대요. 권사님이 어떻게 알겠어요. 간호사가 이야기해줘서 알았죠. 얼마나 좋습니까? 그 권사님은 무의식 중에서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입원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지 다 알게 되잖아요. 그런데 욕을 하면서 깨어나 보세요. 얼마나 민망해요. 그런데 “주여, 감사합니다. 아멘”하면서 깨보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의식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가 AD 96년입니다. 요한의 나이가 90세였습니다.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밧모섬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함께 부르심을 받은 11명의 사도가 다 순교했습니다. 이제 혼자 남아 있습니다. 인생을 뒤돌아봤습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 증언했다는 말은 일생을 사도로서 한결같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것을 다 증언했다는 말입니다. 사명을 다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려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저는 제가 할 일을 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3. 복 있는 사람
고려시대 왕들의 평균연령이 42세였습니다(912-1392). 조선시대는 왕들의 평균연령이 46세였습니다(1392-1926). 평민들은 어땠을까요?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2-30세도 못살고 죽는 사람이 허다한 때이었습니다. 6-70을 사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4-50세를 못사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90세를 살았습니다. 남들 보다 두 배, 세 배를 살았습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 당할 수 있는 온갖 고난을 다 겪으며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보며 살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하늘의 세계까지 경험했습니다. 이 노사도가 인생과 사역을 정리하며 아직 살아야 할 날이 많은 후세들에게 인생의 참된 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의 말씀을 읽는 것, 듣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읽는 자’는 단수입니다. 여기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회중 가운데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교회는 예배 전에 성경을 낭독하죠. 고대에는 목회자가 성경을 낭독한 후에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예배 중에 성경을 낭독한 다음에 말씀을 가르칩니다. 읽는 자는 가르치는 자를 말합니다. 읽는 자는 목회자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되세요.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세요. 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혼자 읽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대에는 성경이 두루마리로 되어 있어서 아무나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성경이 있습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읽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둘째 듣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듣는 자는 복수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의 모든 복은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마지막 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셋째,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지키는 자는 복수입니다. 지키는 자는 말씀대로 사는 목회자와 성도를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배웠는데 지키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남들 보다 갑절의 인생을 산 사람이 말합니다. 땅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 말합니다. 복은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에게 있습니다. 환난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세요.
요한은 AD 96년에 계시록을 기록한 후 밧모섬에서 석방됩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4년을 더 살고 AD 100년에 94세의 나이로 생을 마칩니다. 왜 주님은 12 사도 중에 요한에게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을 기록하게 했을까요? 11명의 사도가 모두 순교했는데 왜 마지막까지 요한을 남겨 두셨을까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걸어온 길을 짚어 보면 우리는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순간부터 한결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갔지만 요한은 최후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가 요한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을 때 해변에 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시종일관 변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자리, 사명의 자리, 부르심을 받은 자리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끝까지 지킨 요한에게 예수님은 성경의 마지막 책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환난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환난의 시대를 준비하세요. 어떤 환란이 와도 시종일관 변치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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