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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앨이라는 호기심이 아주 많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저씨, 이 배는 물에 어떻게 뜨는 거죠?”, “이 기계는 어떻게 움직이는 거죠?”, “이거 만져 봐도 되나요?” 앨은 보는 것마다 신기해서 묻고 만지며 살폈습니다. 앨은 실험정신이 아주 강했습니다. 계란을 부화시키기 위해 암탉처럼 집 헛간에서 계란을 품었습니다. 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학교 헛간에 불을 놓기도 했습니다. 학교 헛간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앨은 궁금한 일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학교 선생님에게 늘 질문을 해댔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너무 엉뚱하고 터무니없었습니다. 선생님이 1더하기 1은 2라고 하자 앨은 “왜 1더하기 1이 2가 되는 거죠? 2가 아니면 안 되는 건가요?”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엉뚱한 질문을 쏟아내는 앨 때문에 선생님은 수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앨은 이해를 못했습니다. 참다못한 선생님이 앨에게 “넌 대책 없는 돌 머리로구나!”라고 했습니다. “너의 뇌는 썩었어.”(Your brain is rotted)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앨은 정상적인 학습을 할 수 없는 학습장애아였습니다. 앨은 학교에 입학한지 3개월 만에 산수저능아 판정을 받고 퇴학을 당합니다. 이런 앨을 위해 어머니는 집에 실험실을 만들어줍니다. 훗날 앨은 1,097종을 발명한 발명왕이 됩니다. 앨이 바로 토마스 앨바 에디슨(1847-1931)입니다. “넌 대책 없는 돌머리로구나!”, “너의 뇌는 썩었어!” 이 말은 “너는 끝이야!”, “너는 안 돼!”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학교에서 끝났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안 되는 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됐습니다. 끝이 아니었습니다. 에디슨은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디슨은 훗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 이전의 마지막 사람이 멈추고 남겨 놓은 것에서 출발한다.”
끝이 정말 끝은 아닙니다. 사람이 안 된다고 해서 반드시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롭게 시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 된다고 했는데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안 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시작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적인 순간에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세요. 항상 소망을 가지세요. 우리 크리스천은 믿음의 사람, 소망의 사람입니다. 이 시간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먼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들여온 소식은 나쁜 뉴스, bad news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병고침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 good news를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입니다.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선언은 옆에서 듣고 있던 야이로에게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딸이 죽었으니 선생님을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35절>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들의 말은 “상황 종료”라는 것입니다. 끝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 여기 밖에 없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간에 끼어든 사람은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유일합니다. 그 끼어든 사람들이 말씀을 가로막고 야이로에게 준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이 야이로를 주저앉게 할 뻔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옆에서 끼어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에 끼어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믿음에 불신을 끼어 넣습니다. 사탄은 우리 신앙에 불평, 원망을 끼어 넣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꺾어버리려고 합니다. 끼어드는 사람, 끼어드는 생각을 조심하세요. 그것들이 우리 믿음을 주저앉게 할 수 있습니다. 야이로는 끼어든 사람들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믿음의 길이 중단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야이로를 붙들어주셨습니다.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하는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첫 번째,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성경(개역개정 기준)에 82번 나옵니다(두려워하지 말라 72번, 무서워하지 말라 10번). 그런데 모두 현재형입니다. 단 한 번도 과거형을 쓴 적이 없습니다. 미래형도 쓰지 않았습니다. 계속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근심, 염려와 싸워야 합니다. 두려움에 지지 마세요.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는 책을 쓰신 루마니아의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세어보니 366번 나왔습니다. ‘왜 366번일까?’ 목사님이 고민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1년은 365일입니다. 4년에 한 번은 366일입니다.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한순간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불신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생각은 끝이 없습니다. 믿음은 꼬리에 꼬리를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판단, 추리, 분석, 계산 등을 멈추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믿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고쳐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조롱했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 조롱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믿기만 하라는 것은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독일 태생의 벨기에 화가 피터 폴 로벤스의 <도마의 불신>(1615년)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도마를 비롯한 다섯 명의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세요. 두 제자가 열심히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둘 중에 한 명은 도마인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 나이가 든 제자가 하나 서 있는데 베드로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바라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아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 뒤에 조금 젊어 보이는 제자가 하나 서 있습니다. 이 제자는 요한인 것 같습니다. 요한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주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제자 한 명은 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밖을 보고 있을까요? 나는 모르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너무 놀라워서 그럴까요? 이 그림을 보면 베드로가 믿음의 사람인 이유가 정확하게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아주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손에 난 못 자국 따위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보나 마나입니다. 그냥 예수님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판화가이며 화가인 제임스 티소의 <기적의 물고기 그물>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어부들은 밤에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낮에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림을 보세요. 고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료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고기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고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 베드로가 믿음의 사람이 됐을까요? 예수님께 생각을 고정시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계산, 판단, 추리, 분석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귀를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만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변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 나는 믿음이 없냐고 하지 마세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지 못하도록 무언가를 우리 삶에 계속 끼어 넣습니다. 끼어드는 생각에 흔들리지 마세요. 처음 믿음, 처음 가졌던 생각을 지키세요. 내 인생에 끼어든 불청객 때문에 흔들리지 마세요.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려고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세요. 예수님께만 눈을 고정시키세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세요. 믿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2. 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인가?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 중에 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사람만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순간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만을 대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해 보다도 더 밝은 모습으로 변형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베드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형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장차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구속 사건을 말씀하시는 순간입니다. 이 때 함께 했던 제자들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드리실 때에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예수님께 힘을 더했습니다(눅22:43) 땀방울이 핏방울이 됐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기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중요한 기도를 하실 때에도 이 세 사람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이 세 사람만을 대동하셨습니다.
<37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러니까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마다 12 제자 중에 이 세 사람만을 대동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 사람을 특별 대우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 제자를 다른 제자들 보다 더 사랑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가까이 하시고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은 멀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가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고 해서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면 기적을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악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43절).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세 사람만을 대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기 직전이었습니다. 11명의 제자들이 하나 같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십자가 밑에는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요한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모십니다. 유대에서 이억 만리 에베소 교회로 사역지를 옮길 때도 마리아를 모시고 갑니다. 거기에 마리아의 거처를 마련하고 죽을 때까지 모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죽을 때까지 지킨 사람이 요한입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자기 어머니도 아닌 사람을 평생 모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자만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아는 자만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다윗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친밀함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소드입니다. 소드는 (친밀한 대화로 하는)회의, 협의, 의논, 친밀함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아무하고나 회의를 하지 않습니다. 의논을 할 만한 사람과 의논을 하는 것입니다. 국무회의에는 국무위원들이 참석하는 것입니다. 국무회의에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보이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이 가까이 대하십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세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최명기 씨의 「마음이 경영을 만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최명기 씨는 이 책에 자신이 아는 어떤 거액의 자산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자산가는 새로운 사업에 투자를 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중요 인사를 영입할 때는 자신이 비용을 대서 그 사람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서류만을 봤을 때나 주위의 평판만 들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자산가에게는 중요한 일을 맡기는 사람에 대한 다섯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좋다고 했습니다. 사업이라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을 때 마찰이 생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려고 사업을 하지만 사람과 갈등을 겪으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우를 불편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교우를 편하게 해주세요. 둘째, 능력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정직한 사람이 좋다고 했습니다.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백억의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으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너가 정직하지 않으면 잘 나가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다는 것입니다. 셋째,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지 일을 맡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조직이 크면 그것이 군대건, 회사건, 학교건, 병원이건, 정부건 돌아가는 이치는 다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사람을 써야지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아울러 자기 생각이 분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불확실한 상황, 애매모호한 상황, 불리한 상황에서도 버티는 힘이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냥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돈 버는 일에도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 힘들어도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 일을 맡길만한 사람을 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중요한 일을 맡길만한 사람이 되세요. 왜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고 원망하시지 마시고 은혜를 받을만한 그릇이 되세요. 왜 내게 일을 맡기지 않느냐고 하지 마시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그릇이 안 되면 은혜를 은혜로 몰라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목사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옆에 있는 교우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함께 의논할 수 있고 의논하고 싶은 사람이 되세요. 의논하면 뒤통수 칠 것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면 이용해먹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그리스도인은 상대가 마음을 열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영혼을 깨우는 소리, 달리다굼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뿐만 아니라 근동 사람들은 장례식 때에 우는 두 명의 여인과 한 사람의 피리 부는 자를 고용했습니다. 직업적으로 우는 여인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바닥을 치거나 가슴이나 땅바닥을 치면서 큰 소리로 울어 댔습니다. “떠드는 것”(38절)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한쪽에서는 장례식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 피리를 불며 울고 소란을 떨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족들이 애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이로가 유대인의 지도자였으니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집에 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이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비웃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말씀하시지 않고 그냥 아이의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잔다고 말씀하시고 들어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지금은 예수님의 뜻을 사람들이 모르지만 훗날 무리들 중에 주님께 돌아올 자들에게 깨우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이 되세요. 베드로 요한 야고보처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세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비웃는 자들이 되지 마세요.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말하는 자가 되지 마세요. 교회를 귀하게 생각하세요.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다굼이라고 하셨습니다.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달리다’는 ‘어린이, 작은 소녀, 어린 양, 젊은이’라는 뜻입니다. 굼은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달리다굼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의 기자 마가는 <달리다굼>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썼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번역하지 않은 단어가 네 개 있습니다. 보아너게(3:17), 달리다굼, 에바다(7:34), 아빠(14:36).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마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베드로는 왜 네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을까요? 이 단어에 담긴 의미를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말씀하실 때의 감격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소녀는 죽었습니다.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합니다.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치 자는 자를 깨우듯이 소녀에게 달리다굼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순간에 영이 아이에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눅8:55). 그렇다면 달리다굼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소리입니다. 달리다굼은 자는 영혼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달리다굼은 영혼을 울리는 영혼의 소리입니다.
구약 성경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딱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 사건이 눈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그날 그 방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베드로였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달리다굼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흥분, 감격, 두려움, 제가 베드로였다면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면서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수 없이 달리다굼이라고 외쳤을 것 같습니다. 영적 잠에 빠져 있는 이 세계를 향해 달리다굼이라고 외쳤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믿지 않는 남편, 아내, 자녀들을 향해 달리다굼이라고 외칩시다.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을 향해 달리다굼 합시다. 한국 교회를 향해 달리다굼, 우리 등대교회를 향해 달리다굼 합시다. 그리고 내 영혼이 세상의 잠에 깊이 빠져들 때 내 영혼을 향해 달리다굼 합시다. “요한아! 달리다굼”, “예수 이름으로 달리다굼”, “예수 이름으로 달리다굼”. 달리다굼은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가 외쳐야 할 영혼의 소리입니다.
골리앗은 사울에게는 거인으로 다윗에게는 난쟁이로 보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10명에는 그들을 삼키는 저주의 땅으로 2명에게는 축복의 땅으로 보였습니다(WT 제퍼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골리앗은 난쟁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거인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삼키는 땅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보면 축복의 땅입니다. 우리 눈을 하나님께 고정합시다. 우리 마음과 생각과 귀를 하나님께 고정합시다. 우리 인생에 옆으로 끼어드는 마귀 때문에 세상 잠에 빠지지 맙시다. 세상 유혹에 빠지지 맙시다. 혹시 세상 잠에 빠지면 달리다굼 외칩시다. 달리다둠, 달리다굼, 달리다굼. 달리다굼은 영혼의 소리입니다. 달리다굼은 영혼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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