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2 ok!
등대교회 홈페이지입니다.

Sermon

남김없이 다 내려놓음

조회수 : 882회

본문 : 마가복음 5:21~24,35~36
주일오전예배 | 2020-08-0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BC 1446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받고 BC 1445년에 성막을 만듭니다. 성막은 히브리어로 미쉬칸이라고 하는데 거처라는 뜻입니다(26:1).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막을 성소라고도 했습니다. 성소는 히브리어로 미크다쉬라고 합니다. 구별되고 거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막은 회막이라고도 했습니다. 회막은 오헬 모에드라고 합니다. ‘회집하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또는 교제하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또 성막을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뜻으로 여호와의 전이라고도 했습니다. 성막 안에 십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법막이라고도 했습니다(대하24:6, 개역성경). 하나님의 법(말씀)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이때부터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뿐만 아니라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 중심, 나 중심, 직장 중심, 돈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세요. 신앙 중심으로 사세요.  

솔로몬은 BC 959년에 성전을 지어 성막을 대신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중심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 중심의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러다가 BC 586년에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면서 성전은 무너지고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자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곳이 회당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회당은 유대인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는 다른 곳입니다. 회당의 주 기능은 예배와 교육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회당에서 읽고 쓰기를 배웠습니다. 이때 교과서는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회당에서 수학도 배웠습니다. 회당은 여행객들의 쉼터, 숙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회당은 지방법정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회당에는 10명의 관리자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 3 명이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은 관리자들을 지도 감독했습니다. 재판 시에는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회당장은 유대교의 중심에 있던 사람입니다. 회당장은 이스라엘의 선생이었고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였던 회당장 야이로에 관한 스토리입니다. 야이로는 여호와가 비추신다’(새성경사전) 또는 깨어나다’(아가페)라는 뜻의 야이르에서 온 이름으로 여호와의 깨우치심을 받은 자또는 여호와의 비추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야이로는 환란 중에 하나님의 비추심으로 하나님의 깨우치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에게도 야이로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비추심과 하나님의 깨우치심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중에, 말씀을 듣는 중에 은총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 남김없이 다 내려놓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엎드리다는 말이 헬라어로 피프토입니다. 피프토는 떨어지다, 무너지다, 망하다, 엎드리다, 끝나다는 뜻입니다. 피프토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의미입니다. 엎드리되 땅에 떨어지듯 엎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엎드리되 건물이 무너지듯 엎드린다는 말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점잖게 엎드린 것이 아닙니다. 건물이 무너지듯 엎드렸습니다. 마치 물건이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듯 엎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쓰러지듯 넘어졌다는 것은 야이로에게 무엇인가 애틋한 소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딸의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 발아래 그냥 털썩 주저앉듯 엎드렸습니다. 예수님 앞에 털썩 엎드렸다는 말은 예수님만이 내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야이로가 가진 믿음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이 자세와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마음,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무너뜨리는 마음, 이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을 무너뜨린 야이로는 예수님께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곡히 구했습니다.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간곡히라는 말이 헬라어로 폴뤼스입니다. 폴뤼스는 많은, 이라는 뜻입니다. ‘양이나 수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간곡히 구했다는 말은 많은 말로 구했다또는 여러 번 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많이 간구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에는 시간적으로 오래 구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야이로가 많은 말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야이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딸을 위해 한 번 구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많이 구했습니다. 서서 구한 것이 아니라 발아래에 엎드려 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야이로는 유대 사회 지도층 인사입니다. 명예와 부를 가진 사람입니다. 나이가 꽤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30대 초반입니다. 목수입니다. 학문이 없었습니다. 출신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가 많은 사람 앞에서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린 것입니다. 야이로는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지위, 체면, 사회적 명성을 예수님 앞에서 남김없이 다 내려놓았습니다. 회당장은 자신의 힘으로 딸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아도 안 될 때 우리가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내려놓았습니다.  

조니 램의 남김없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니 램은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시도해보았는데 안 되었다면,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차례 아닐까요?”(125) 모든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힘쓰고 애써도 안 될 때 모든 것을 내려놓으세요. 하나만 내려놓지 마세요. 모든 것을 내려놓으세요. 남김없이 내려놓으세요.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조니 램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삶이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다. 그 어려운 순간들은 모두 하나님께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56)라고 했습니다. 빨리 내려놓을수록 고난이 빨리 끝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을 당해도 내려놓지를 않습니다. 움켜쥐고 버둥거립니다. 안 될 때 빨리 내려놓으세요. 그래야 고난이 끝이 납니다. 세상에서 내려놓는 것은 포기입니다. 세상에서 내려놓는 것은 무능, 나약, 창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포기가 아닙니다. 맡김입니다. 야이로가 남김없이 다 내려놓음으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남김없이 다 내려놓음은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내려놓으세요. 다 내려놓으세요. 남김없이 내려놓으세요. 하나님 앞에 뻣뻣하게 굴지 마세요. 내려놓아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2. 믿음의 방해꾼들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십니다. 야이로는 이제 죽어가는 하나뿐인 딸을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야이로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은 기쁨의 길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세요. 예수님과 함께 가세요. 혼자 가시면서 우울해하지 마세요. 꼭 예수님과 동행하세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만사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불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올무를 놓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올무에 넘어져 낙심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딸을 살리기 위해 가는 야이로의 길에 방해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야이로의 가는 길을 방해했습니다.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예수님이 야이로와 함께 가시는 데 큰 무리가 예수님과 야이로를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습니다. 딸이 아주 위독합니다. 야이로는 한 시가 급합니다. 23절에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는 말씀이 마태복음 918절에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두 사람이 약간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살 소망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죽은 것나 마찬가지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급하게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에워싸 밀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누가는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고 했습니다.  

<8: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밀려들다는 말이 헬라어로 쉼프니고입니다. 쉼프니고(συμπνίγω)숨이 막히다. 질식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사람이 없어야 빨리 갈 수 있는데 사람들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었습니다. 급한데 길이 막혀 야이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개가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는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다른 교회 사람이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교인 때문에 교인이 떠납니다. 믿지 않는 사람 때문에 교인이 떠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힘들게 하는 것은 교인입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교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만사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이리가 있습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방해꾼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의 믿음의 방해꾼이 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믿음의 거치는 돌이 되지 마세요. 성도의 신앙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되세요.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되세요.  

두 번째 방해꾼은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 끝에 손을 대기만 했는데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여인의 이야기는 야이로의 믿음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이제 딸을 고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믿음을 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으니 이제 예수님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상황 끝났다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병들었을 때는 고칠 수 있지만 이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필요할 때가 있고 필요 없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고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전 인생에 항상 필요하신 분입니다. 필요할 때가 있고 필요 없을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에는 예수님이 필요하고 어떤 일에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 모든 일에 함께 하셔야 하는 분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병을 고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말에 야이로의 믿음이 꺾어질 뻔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 때 야이로에게 믿음을 북돋아주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에게 예수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어떤 병이든지 고친다고 하더라. 한 번 예수라는 분을 집에 모시고 와서 안수기도를 받아보는 것이 어떠니? 체면, 명예 다버리고 가서 엎드려 구해봐. 그러면 딸을 살릴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사람들의 격려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야이로의 믿음을 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예수님과 야이로의 인생에 끼어들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는 중에 끼어든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믿음의 훼방꾼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내 또는 남편이 믿음의 훼방꾼이 될 수 있습니다.  

10년 전 쯤에 전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버이 날 즈음에 70세 이상 노인 80여명을 모시고 서해안을 관광한 적이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대천해수욕장에 들렸습니다. 어른들과 해변을 다니며 모레도 밟고 바다도 구경했습니다. 구경을 한 후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한 분이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사람을 나누어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90 정도 되신 분입니다. 걱정이 됐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 속에 이 길을 따라 쭉 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때 해수욕장 남쪽 끝부분 제방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제방을 따라서 북쪽을 향해 계속 갔습니다. 반 정도를 갔는데 북쪽에서 오시는 집사님들 몇 분이 이쪽은 우리가 다 찾아봤는데 없다는 거예요. 순간 제 마음 속에 기도의 응답이 아니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한참 지나서야 그 분을 찾았어요. 그런데 그 분이 계셨던 곳이 해수욕장 북쪽 끝이었어요. 그때 제가 아차 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갔으면 바로 찾을 수 있었던 거예요.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이 믿음의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한 때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는 사람이 믿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훼방꾼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3. 믿음의 격려자  

야이로에게 믿음을 꺾으려고 하는 훼방꾼이 있었다면 믿음을 북돋아주는 격려자도 있었습니다. 그 믿음의 격려자가 누구일까요? 첫 번째는 혈루증 여인입니다. 겉으로 볼 때 여인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지체하게 한 방해꾼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여인은 야이로의 격려자입니다. 만약 은혜에도 순서가 있다면 여인 보다 야이로가 먼저일 것입니다. 야이로가 먼저 예수님께 구했고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야이로 보다 먼저 은혜를 받아버렸습니다. 그것도 몰래요. 여인은 은혜를 새치기 한 사람입니다. 야이로의 인생의 끼어든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은혜를 새치기 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예수님을 잡아 세웠습니다. 여인 때문에 예수님은 한참을 지체하셨습니다. 야이로는 혹시 딸이 죽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에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여인은 야이로와 예수님의 길을 막은 가장 큰 방해꾼입니다. 겉으로 볼 때 여인은 야이로의 인생에 끼어들어 절망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야이로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요?  

그럼에도 여인은 야이로의 믿음의 격려자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렸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명예, 지위, 체면 등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사람들 앞에서 남김없이 내려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정말 큰 믿음입니다. 칭찬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의 믿음에 비하면 야이로의 믿음은 아래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왔습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거의 기다시피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뒤를 기다시피 따라온 여인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부정한 여인이니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그의 믿음의 행위와 자세 그리고 그 결과에 놀라지 않았을까요? 여인은 야이로의 영적 격려자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죽어가는 자신의 딸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3).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의 옷 끝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병이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크기를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여인의 믿음이 야이로의 믿음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옷 끝에 손을 댔을 때 혈루의 근원이 즉시 말라버렸다는 여인의 고백을 들었을 때 야이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서서히 죽어가는 병입니다. 그 병을 12년을 앓았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딸의 나이만큼 아팠습니다. 야이로는 여인의 말을 들으며 내 딸도 능히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갖지 않았을까요? 여인은 야이로의 믿음의 격려자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야이로의 믿음의 격려자는 예수님입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은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습니다. 이제 상황 종료입니다. 집에 돌아갑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죽음, 그것은 모든 것을 끝나게 합니다. 야이로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믿음을 끌어올리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다고 했습니다(36). 예수님께서 야이로 곁에서 야이로의 슬픔의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야이로에게 들려오는 두려움의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야이로에게 들려오는 고통, 아픔, 절망의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이제 네 인생은 끝이야.” 마귀는 야이로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예수님은 딸의 죽음으로 두려워 떠는 야이로를 위로하셨습니다. “야이로야! 두려워하지 마. 그냥 믿기만 해. 괜찮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야.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야. 사람에게 속지 마.” 여러분! 우리가 슬픔의 소식을 들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슬픔의 소식을 우리와 같이 들으십니다. 우리의 고통, 절망, 괴로움의 소식을 같이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담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사람들이 비방할 때, 손가락질 할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듣고 보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를 위로 하십니다. “요한아! 괜찮아. 두려워하지 마. 믿기만 해. 그거 내게는 아무 것도 아니야.” 야이로의 두 번째 격려자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마음에 위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격려자이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 병을 치료받은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6:56).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일일이 세워놓고 사유를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가시던 길을 중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야이로가 급한 것을 아시면서도 가시던 길을 멈추어 서셨습니다. 야이로의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인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상황을 볼 때 예수님이 서둘러 가셨어도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어 있었을 것입니다. 빨리 가나 천천히 가나 매 한 가지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오는 것을 기리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은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여인과 대화를 하며 서둘러 야이로의 집에 가시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야이로가 다 내려놓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딸의 죽음까지도 예수님 앞에 맡기기를 원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이 말씀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두려워 말고 다 나한테 맡겨라.” 믿는 것은 맡기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영원히 죽을 운명이 영원히 사는 운명으로 바뀐 것입니다. 자기 운명만 바꾼 것이 아닙니다. 딸의 운명까지 바꾸었습니다. 딸은 12년 밖에 살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려놓음으로 딸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딸의 운명만 바뀌었을까요? 아내의 운명, 부모의 운명 그리고 형제들의 운명까지 바뀌었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운명까지 바뀌었을 것입니다. 내려놓으세요. 내려놓아야 운명이 바뀝니다. 내가 움켜쥐고 있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힘이 듭니다. 배우자가 힘들어요. 자녀들이 힘들어요. 부모가 힘들어요. 교우들이 힘들어요. 하지만 내가 내려놓으면 자신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져요. 내려놓읍시다. 하나님 앞에서 남김없이 다 내려놓읍시다. 그래서 새롭게 됩시다

이전글 영혼을 깨우는 소리, 달리다굼
다음글 영혼으로 터치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