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사람이 어둡게 한 시대에 하나님의 빛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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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느헤미야 1:1~4
주일오전예배 | 2020-08-3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시편9213절에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성도를 하나님의 집에 심긴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여기 집은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겼다는 말은 성도의 뿌리는 성전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우리의 생활 터전은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먹고 자고 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뿌리가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뿌리는 성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젊었을 때 저는 잘 몰랐습니다.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나이를 한 살 두 살 조금씩 먹다보니 하나님께 돌아갈 날을 가끔 꼽아봅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도 있는데, 그 이후에는.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우리의 뿌리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빛을 기다리며  

느헤미야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1) 느헤미야의 아버지는 하가랴입니다. 하가랴는 여호와께서 어둡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방해하셨다라는 뜻입니다. 하가랴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하가랴의 아버지, 즉 느헤미야의 할아버지일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할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여호와께서 어둡게 하시다, 여호와께 방해하시다, 하가랴라고 지은 것입니다. 하가랴라는 이름에서 느헤미야의 부친과 조부가 얼마나 어두운 시대에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은 BC 444년입니다. 유다는 BC 606, BC 598, BC 5863차에 걸쳐 망했습니다. 느헤미야의 부친과 조부는 유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과 직후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처럼 암담했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의 할아버지는 그 시대 상황을 자신의 아들 이름에 그대로 나타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둡게 하시다! 여호와께서 방해하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유다를 어둡게 하셔서 유다가 망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유다가 하는 일을 방해하셔서 유다가 망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밝게 하시는 분이시지 어둡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지 방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밝게 해주시는 은혜, 도와주시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왜 망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빛을 버리고 암흑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 <7:31-30>
  • <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 <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가증한 것은 우상을 가리킵니다. 성전을 집이라고 한 이유는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집에 이스라엘은 각종 우상들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남편 앞에서 몸을 파는 창기에 비유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모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청년 때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1년 후배가 있었습니다. 그럴 친구가 아닌데 어느 날 술이 취해서 교회에 왔어요. 제가 예배실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실에 들어가더라고요. 조금 있다가 나오더니 술을 먹고도 기도가 되는지 해보고 싶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 연약한 죄인입니다. 흉악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난은 하지 맙시다. 지금의 예배당과 구약의 성전 개념은 다르지만 예배실과 교회에서 행동을 조심해합시다. 말소리도 낮춥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인신제사도 했습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이곳은 쓰레기 소각장입니다. 도벳은 태우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은 힌놈 골짜기에 몰렉 신전을 짓고 자기의 자녀들을 불에 태워 몰렉신에게 제사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을 했습니다. 인신제사는 이교에서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란이 닥치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데 오히려 우상을 더 많이 섬겼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아수르에 망합니다. 하지만 남쪽 유다는 BC 606, BC 597, BC 5863차에 걸쳐 조금씩 망했습니다. 20년 동안 서서히 망해갔을까요? 하나님께서 유다가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리지 않으셨을까요? 유다가 돌아오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유다는 망해가면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망해가면서도 하나님을 더 배반합니다. 망해가면서도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유다 말기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두루마리에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웠습니다.  

<36:23>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여호야김)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여호야김은 여후디에게 성경을 낭독하게 한 다음 면도칼로 잘라 불에 태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슬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듣자마자 태워버렸습니다. 유다 나라 말기 유대인들은 우상을 많이 섬겼습니다. 인신제사를 했습니다. 말씀을 칼로 잘라 불에 태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둡게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스스로가 빛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스스로가 멸망을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실패하게 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내 눈을 어둡게 하셨다고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어둡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둡게 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회를 어둡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은혜를 버린 것입니다.  

하가랴와 그 부친은 사람이 어둡게 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느헤미야의 할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어둠이라고 지었습니다. 하지만 하가랴가 어두운 시대에 살았지만 아들을 낳고 이름을 느헤미야라고 짓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은혜, 빛이라는 뜻입니다. 하가랴는 사람이 어둡게 한 시대에 하나님이 다시 밝게 해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린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어둠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빛을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립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위로가 됩시다. 1절 중간에 느헤미야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라는 단어는 ’, ‘사건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느헤미야의 말과 한 일이 아버지에게 위로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위로가 됐습니다. 우리는 울면서 위로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됩시다. 교회의 위로가 되고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됩시다.  

코로나19로 교회가 예배를 잘 못 드리고 있습니다. 경제, 정치, 사회가 모두 어둡습니다. 누가 어둡게 했을까요? 하나님이 어둡게 하셨나요? 우리가 어둡게 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이 빛이라 하셨는데 우리가 세상을 밝히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어둡게 한 이 시대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밝게 해주시기를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빛을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립시다. 그리고 위로만 기다리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내가 이 시대에 위로가 됩시다. 느헤미야처럼 이 시대에 빛이 됩시다.

2. 예루살렘의 회복과 부흥을 기다리며   

느헤미야가 사는 페르시아의 수산궁에 유다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왔습니다. 수산은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 근처입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입니다. 이란의 남서쪽입니다. 신석기 문화를 이룩한 곳입니다. 지금은 수사라고 불리는데 이곳에 페르시아 시대의 어마어마한 궁궐터가 남아 있습니다. 수산궁은 아주 화려했던 곳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온 사람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묻습니다.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친형제입니다. 하나니가 유다에서 수산으로 돌아오자 느헤미야는 하나니에게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 묻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솨알입니다. 솨알은 간청하다, 간구하다, 요청하다, 애걸하여 빌리다, 구걸하다라는 뜻입니다. 필요한 무언가를 간절한 마음으로 요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니와 그의 동료들에게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 마치 거지가 음식을 구걸하듯,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빌리듯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그 동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소식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누구에게 구걸하듯 무언가를 요청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세계를 지배하던 페르시아 제국의 술 맡은 관원장입니다. 고대에는 술에 약을 타서 왕을 독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자신이 마실 술을 먼저 마셔보고 술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술 맡은 관원장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술 맡은 관원장은 왕의 측근 중에서도 측근입니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또 술맡은 관원장은 왕과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등 나라의 현안에 대해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실력자이기도 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엘살핫돈(681~669) 시대에는 술 맡은 관원장이 제국의 2인자였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아주 영향력이 높은 인물입니다.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금수저 중에서도 금수저입니다. 누구에게 간청하듯이 물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명령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애원하듯 사람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무엇이 그렇게 궁금했을까요? 무엇이 느헤미야를 그렇게 애타게 했을까요? 그것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부흥입니다. 여호와의 종교의 회복과 부흥입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에 BC 606, BC 598, BC 586년 세 차례에 공격을 받고 망합니다. 성전은 무너지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3차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BC 538년에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일어납니다. 바벨론이 망하자 유다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2차에 걸쳐 귀환했습니다. 1차에는 BC 537년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 이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합니다. 2차에는 458년에 에스라를 비롯한 1754명이 귀환했습니다. 에스라에는 학사이면 제사장이었습니다. 구약 율법에 아주 정통한 신학자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간 후 14년이 흘렀습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성경에 능통한 학자가 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통해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종교의 회복과 부흥을 기대했습니다. 여호와의 종교의 부흥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오자 그들에게 구걸하듯 소식을 묻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회복과 부흥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무언가를 꼭 빌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처럼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이민 3세대입니다. 바벨론에 느헤미야 할아버지, 아버지가 끌려와서 150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대 땅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본 적도 없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느헤미야는 바벨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대해 간절한 마음으로 묻고 있습니다. 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부흥을 그렇게 갈망했을까요? 세계 최대의 도시인 페르시아의 수산 궁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지만 자신의 진짜 뿌리는 페르시아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다는 역사의식, 신앙적인 자의식 때문이 아닐까요? 이게 믿음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 이런 신앙적인 자의식,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과 부흥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우리의 뿌리는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교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관심 좀 가져주세요.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지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삶을 책임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생명의 양식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닙니까? 또 민족에 교회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오늘 우리 민족의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민족에 교회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리고 저 북한과 중국 그리고 세계 교회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이 세상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입니다. 우리의 뿌리는 영적 예루살렘,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늘의 문이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천국으로 사닥다리가 세워진 곳입니다. 교회를 사랑해주세요.

3. 느헤미야의 심정으로  

하나니와 그의 동료들이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것은 유다인들은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입니다.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성이 허물어졌다는 말은 군사적인 공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문들이 불탔다는 말도 공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말은 치안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원수들은 왜 예루살렘의 치안을 무너뜨렸을까요? 아파트에 현관문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집에 담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편히 쉴 수 있습니까? 맘 편히 씻을 수 있습니까? 문도 없고 담도 없는 집에서 온전한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벽도 성문도 없습니다. 낮이건 밤이건 힘 있는 불량배들, 도적떼들이 노략질해도 백성들은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생활이 안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여호와의 종교의 부흥은커녕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교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구약 율법에 정통한 학자요 제사장이 왔지만 백성들의 삶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문을 태웠을까요? 원수 마귀들입니다. 원수마귀는 여호와의 종교의 회복과 부흥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도 원수 마귀는 교회의 벽을 무너뜨리고 교회의 문을 불 태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한 것이 있습니다.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먼저 울었습니다. 울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바카입니다. 바카는 통곡하다는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통곡했습니다. 둘째, 수일 동안 슬퍼했습니다. 슬퍼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발인데 한탄하다, 죽음을 애도하다는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애도했습니다. 셋째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이 마시는 술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얼굴에 근심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얼굴이 항상 깨끗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얼굴이 항상 밝아야 합니다. 얼굴에 수색이 있으면 왕이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혹시 나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자신의 직과 인생을 걸고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지난 17()에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마주쳤는데 지나가면서 저를 보고 하는 말이 난리네요.”입니다. 그러면서 저를 보는 눈빛이 야릇한 거예요. 순간 아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15 광복절 집회를 두고 하는 말인가!’ 교회에 앉아 있는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평상시 제가 그 사람에게 선을 베풀었습니다. 내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사람인데 제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지난 2, 3월 신천지의 행태가 만천하에 들어났습니다. 신천지가 온갖 욕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가 신천지 보다 더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코로나19로 극한 혐오 대상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온갖 욕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우리 사회 기피 대상 1호가 됐습니다. 교회에 가면 코로나19 걸리는 줄 압니다. 교회가 악한 단체처럼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교회 가지 않고 다른 교인에게 교회 가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느헤미야는 아닙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처럼 교회를 위해 울어주세요. 애도해주세요. 교회를 위해 느헤미야처럼 자신의 인생과 직을 걸지는 못하더라도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주세요. 생각해보세요. 천주교인과 불교인들은 코로나19에 걸리지 않고 기독교인들만 걸릴까요? 우리나라에 불교도가 더 많습니다. 천주교도가 기독교인만큼 됩니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기독교인들만 골라서 전염시킬까요? 이건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통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만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언론을 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된 것을 위해 울며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위기인 이 시대에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삶에는 평안이 있고 형통함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우리 등대교회와 민족의 교회를 뜨겁게 사랑해주세요. 이 땅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 <122:6-7>
  •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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