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비로소 아니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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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4:16~26
주일오전예배 | 2020-07-1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중국의 관자(管子(관중)라는 책에 <의식(衣食)이 채워져야 예절을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생활이 풍성해 져야 예의를 지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평안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채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 먹는 걱정, 입는 걱정만 해결되면 인간의 마음도 풍성해지고 평안해 질까요?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듣고 많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잘 살아 보세>(작사 한운사, 작곡 김희조)는 노래입니다.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 금수나강산 어여쁜 내님 한마음으로 아껴가며
  • 알뜰한 정이 재미도 절로 백년회로 우리 것이다
  •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 태양너머에 잘 사는 우리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나
  • 티끌도 모아 태산이라면 우리의 사랑 아낄까보냐
  •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자는 말이 가사의 반이 넘습니다. 우리나라는 잘 살기 위해 근면, 자조, 협동을 외치며 근대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는 했지만 사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잘사는 것은 국민 전체의 염원이었습니다. 그 소원처럼 우리나라가 정말 잘 살게 되었습니다. 잘 살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사회도 밝고 희망이 넘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못살 때보다도 사회는 더 불행해졌습니다. 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충동조절장애, 사이코 패스, 소시오 패스 등 정신병이 많아 더 졌습니다. 부정부패도 더 만연되어 있습니다. 강력범죄는 더욱 많아져 사회가 떨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사회는 발달했습니다. 문화도 발달했습니다. 국력도 신장했습니다. 예술도 발달했습니다. 우리 국민의 소원처럼 잘 살게 되었습니다.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회가 더 어둡고 더 무서워지고 있을까요? 왜 사회는 더 황폐해져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을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카인의 도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에덴의 동쪽에 거주합니다. 가인은 동서남북 중 왜 하필 동쪽으로 갔을까요? 동쪽은 해가 뜨는 곳입니다. 아침마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춰옵니다. 찬란한 햇빛으로 아침마다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 동쪽입니다. 살인자요 도망자인 가인은 희망을 찾아 정착했습니다. 해가 지는 서쪽은 왠지 쓸쓸해 보여 싫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햇볕이 잘 드는 에덴의 동편에 정착을 했습니다. 희망을 찾는 것은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그러면 해 뜨는 곳에 살면 희망이 솟아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동쪽에 계셔서 나의 태양이 되셔야 나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태양으로 삼으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태양이십니다. 가인은 햇빛이 좋은 에덴의 동편에 자리 잡은 가인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17절 상반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놋 땅에 거하면서 아이를 낳게 됩니다. 이 에녹은 5장의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가인은 아이를 낳고 아이가 얼마나 좋았는지 아이를 위해 살았습니다. 아이 낳고 단 한 번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예배를 드리려고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이 키우는 데만 온 힘을 쏟았습니다. 아이가 얼마나 좋았는지 성을 쌓고 성의 이름을 <에녹성>이라고 지었습니다. 사람은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적인 것에 힘을 써야 합니다. 기도하세요. 찬송하세요. 내 목소리로 부르는 찬송 소리가 내 영혼에 들리게 하세요. 순간순간 주님을 부르세요. “주님!, 주님! 주님!” 그래야 내 영혼이 삽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외적인 것에만 힘을 쓰면 외적인 본능만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은 죄악의 본능만이 강해집니다. 사람이 영적인 것을 멀리하면 육적인 것이 활성화됩니다. 가인의 인간적인 본능은 가인의 4대 손인 라멕에 가서 일부다처제로 나타납니다(19). 인류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시작한 사람이 라멕입니다. 라멕은 힘이 있었습니다. 라멕은 자신의 강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육체적인 본능을 채웠습니다. 가인의 인간적인 본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류 최초로 도시를 건설합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라고 했습니다(17).   

<17절 하반절>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성은 도시 문화의 시작입니다. 가인이 도시문화를 만든 것입니다. 도시문화의 창시자가 가인입니다. 도시는 부의 상징입니다. 도시에 사람이 모입니다. 도시에서 상업이 이루어집니다. 도시에 문화가 발달합니다. 가인은 성을 쌓고 도시 문화를 발달시켰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신도시를 꿈꿉니다. 대도시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을 쌓은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누가 자신을 해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께 표를 요구했고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표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성을 쌓으면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가인은 도시를 건설해 사람을 모았습니다. 부를 쌓고 성을 높이 올렸습니다. 이제 안전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도시이며 최초의 성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바벨탑 문화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잘 살게 되면 정말 하나님이 필요 없을까요? 성을 높이 쌓으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도시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고 있습니다. 먹고 즐기며 흥청망청 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도시는 마귀가 만들었고 시골은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맞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번 쯤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도시문화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요? 도시 문화 속에서 사람이 극렬하게 타락해가기 때문입니다. 도시문화 속에서 깊이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를 떠나는 말이 아닙니다. 도시가 마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시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도시문화를 조심하세요. 이곳에서 믿음 잃지 않도록 애쓰세요.   

가인의 자손들은 가인의 문화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일명 카인의 문화입니다.   

  • <4:19-22>
  •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은 아내가 둘이었습니다. 아다와 씰라입니다. 아다는 장식한 자”, “단장한 자라는 뜻입니다. 액세서리의 시조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다는 몸단장에 시간을 쏟는 허영심이 가득한 자였던 것 같습니다. 씰라는 딸랑거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아부를 잘 하는 사람이었던지 수다쟁이였던 것 같습니다. 야발은 가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가축을 방목하여 사육하는 기술을 터득하여 후손에게 전래시켰습니다. 가축은 고대 시대의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야발은 사람들에게 거대한 재산 축적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라는 악기를 만들어 아름다운 음악을 후세에 전했습니다. 두발가인은 구리와 철로 철기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점점 사회는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예술이 발달했습니다. 음악이 발달했습니다. 부가 축적됐습니다.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가인이 만든 사회와 문화가 급속하게 타락해져 갔습니다.

 

2. 카인의 문화   

가인의 4대손인 라멕을 보겠습니다. 라멕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본격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라멕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가정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인류 최초의 조직이 가정입니다. 라멕이라는 말은 강한 자, 힘센 자라는 뜻입니다. 라멕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두 아내를 취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은 일부일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를 두 개 빼서 두 명의 여인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한 개 만을 빼서 한명의 여인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한 명의 여인만이 남자 옆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자신의 힘과 부를 자랑하며 인류 최초로 여러 아내를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의 질서를 최초로 파괴한자가 바로 라멕입니다. 성적 타락의 시작입니다. 가정은 거룩한 하나님의 제도입니다. 성스러운 제도입니다. 가정이 얼마나 성스러웠으면 바울은 가정을 교회와 비교합니다. 가정을 거룩하게 하세요.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제도입니다. 아내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남편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이성을 바라보지 마세요.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집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도 위태롭습니다. 라멕이 가정의 질서를 깼다는 것은 교회에 대한 영적 도전입니다.   

가정질서를 깨뜨린 라멕은 이제 하나님의 법 위에 자신이 섭니다. 가인은 시기 질투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가인은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이 그 애 제사를 받으셨으니 하나님이 잘 아실 것 아니에요. 왜 나한테 물으세요. 나 바쁜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찾아보세요.”라고 대답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기 전까지 아주 뻔뻔했습니다. 하지만 죄가 드러나자 불안해했습니다.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죄로 불안해했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23절 하반절>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무슨 일이지는 모르지만 라멕은 다른 사람에 의해 몸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렇다고 상처가 사람을 죽일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라멕은 자기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나는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을 죽인 게 합리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살인 행위는 정당방위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얼마나 당당했는지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큰 소리로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23절 상반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아주 당당합니다. 떳떳합니다. 죄를 지으면 적어도 자기 가족, 자기 아내에게만은 숨기고 싶어 합니다. 자기 가족이 아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아니 자기가 사람을 죽인 것을 아내들에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날 봐라 나는 이렇게 용감한 남자야! 나는 이렇게 강한 남자야!”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살인 사실을 시처럼 노래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신의 본성대로 사는 인간의 극단적 잔인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잔악한 폭력성을 볼 수 있습니다. 폭력을 자랑하는 시대, 주먹을 자랑하는 시대, 법이 필요 없습니다. 법 위에 자신의 힘이 있습니다. 법 위에 자신의 폭력이 있습니다. 온갖 폭행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와 같습니다. 법을 위반해도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에게는 법이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돈이 있으면 무죄입니다. 돈이 없으면 유죄이다. 힘이 있으면 무죄입니다. 힘이 없으면 유죄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 자화상입니다. 사람에 따라 법이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이제 라멕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법 위에 선 라멕은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조 가인에게 주셨던 약속을 자신의 처참한 살인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인을 한 후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이 7라고 하시면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15). 그래서 가인이 만나는 사람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사람을 죽인 후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24)   

친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는데 하물며 원수에게 정당하게 보복을 한 내가 무슨 죄냐는 것입니다. 나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베푸신 긍휼을 조롱합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는 벌을 77배 받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하나님의 자리까지 탐하는 교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가인의 후손들이 이렇게 망가져 가고 있을까요? 왜 가인의 문화가 무질서해져 갈까요? 소망의 땅, 태양이 떠오르는 에덴의 동편에 거주했습니다. 거기에 도시를 만들고 부를 쌓았습니다.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서 높게 성을 쌓았습니다.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여인들은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철기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처럼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회가 더 어두워지고 폭력사회로 가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성경 기자는 한 마디로 말합니다.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왜 불안할까요?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합니다. 사람이 여호와 앞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여호와 앞을이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의 얼굴로부터입니다. 얼굴 앞에서 떠났다는 말은 은혜를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왜 초조하고 안식이 없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문화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음악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을 높이 쌓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습니다.   

가인은 놋 땅에 거주했다고 했는데 놋이란 말은 가인과 가인의 후손 그리고 그들이 만든 사회와 문화가 어떤지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노드)이란 말은 유리하다, 방황하다, 떠돌다, 달아나다, 요동하다, 초조하다, 슬퍼하다. 한탄하다란 뜻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소망의 땅, 저 에덴의 동편 놋 땅을 찾아갔지만 오히려 허무한 삶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놋땅에 사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없는 땅에 살고 있으면 거기가 바로 허무한 놋 땅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없는 성에 살고 있다면 거기가 바로 놋 땅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없는 물질에 살고 있다면 거기가 바로 놋 땅입니다. 놋이란 집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놋이란 목적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놋이란 허무한 인생을 말합니다. 놋이란 공허한 인생을 말합니다. 가인의 사회, 가인의 문화는 처음부터 놋 땅에 건설되었습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그래서 공허합니다. 무의미합니다.

 

3. 비로소 아니 먼저   

내가 사는 놋 땅은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까요? 무엇이 내가 사는 놋 땅의 공허함을 매울 수 있을까요?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아담과 하와는 다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셋이라 짓습니다. 셋이란 말은 자리잡다, 지정하다. 대신하다는 뜻입니다. 왜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낳고 대신한 자”, “지정한 자라고 불렀을까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손실을 보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공허를 채워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허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아벨을 대신할 자를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놋과 같은 허무한 우리 인생을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무의미한 우리 인생을 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악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실수를 합니다. 억울한 일이 생깁니다. 가정, 직장, 물질, 삶에 손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손실은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습니다. 아담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고 셋이라고 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습니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비로소 인류가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인류는 사람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는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셋은 에노스를 낳고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실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죽음을 뛰어 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올바로 알 때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암선고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도소에서 사형수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생의 실패 후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실패의 그 순간에 자신의 존재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패를 뛰어 넘어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에노스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을 다시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모두다 에노스입니다. 에노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지 않고서는 절대로 에노스를 뛰어 넘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삶의 순간순간 마음대로 일이 안 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는 사인입니다. 일이 힘들 때 더 늦기 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이 우리는 부르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항상 실패 후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일까요? 마음대로 살다가 왜 항상 한계 상황에 부딪칠 때 그때서야 하나님을 부르는 것일까요? 비로소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을까요? 여러분! 나중에, 늦게, 비로소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부릅시다. 무엇을 하든 먼저 하나님을 부르고 시작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하나님을 부릅시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을 부릅시다. 비로소 하나님을 부르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을 부릅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의 본분입니다.  

1980년대 우리 사회에 유행했던 신학이 있습니다. 자유주의입니다. 자유주의는 계몽운동을 외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예수를 말하지 말라”, “배고픈 자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 “배고픈 자에게 빵을 먼저 주라. 그리고 예수를 말하라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맞는다면 성경이 틀렸습니다. 이 말이 맞는다면 거지 나사로는 지옥에 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자는 천국에 갔어야 합니다. 하지만 빵이 전혀 없는 거지는 천국에 갔고 빵이 너무 많았던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영적 풍요를 결정짓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해서 영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먼저 가슴에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먼저 가정에, 자녀의 마음에, 내 삶에 은혜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 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사업의 성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출세가 있어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먼저입니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비로소! ” 쓴 맛 단 맛 다 본 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먼저 하나님을 부르세요. 실패하기 전에 하나님을 부르세요.  

상담을 하시는 분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잘 살아보려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번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죽어라 일만 합니다. 그래서 집도 사고 차도 삽니다.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저 멀리 가 있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저 멀리 가 있습니다. 그러면 잃은 것을 다시 찾기 위해 그동안 번 돈을 다시 쓴다는 것입니다. 도루묵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세요. 먼저 자녀에게 돌아가세요. 먼저 우리 영혼의 집으로 돌아가세요. 먼저 하나님께 돌아가세요. 늦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늦게, 나중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시작하세요. 이것이 사람이 잘 사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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