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감사의 비율은 9:1

조회수 : 672회

본문 : 누가복음17:11~19
주일오전예배 | 2020-07-0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이 세상에는 의사도 다 모를 정도로 많은 병이 있습니다. 그 많은 병 중에 나병처럼 무섭고 끔찍한 병이 있을까요? 나병에 걸리면 살이 썩어 신체가 하나씩 떨어져 나갑니다. 손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다가 나중에는 손과 발이 떨어집니다. 코도, 귀도, 발도 떨어집니다. 심지어 눈알도 빠집니다. 하지만 통증은 전혀 없습니다. 신체가 하나씩 떨어지는데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소리 없이 죽습니다. 너무 끔찍해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어 마을 밖에 동굴 같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암이 무섭습니다. 뇌졸중(중풍), 뇌경색, 뇌출혈, 치매가 무섭습니다. 하지만 나병 보다 더 무섭진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영혼 속에 있는 죄를 나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환자가 열 명이 모여 있습니다. 이 보다 슬픈 무리가 있을까요? 성경에서 십이라는 수는 때와 양이 꽉 찼음을 나타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라는 말은 슬픔과 어둠으로 꽉 차 있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인들이 수백 명, 수천 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수 십 억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지구라는 이 영적 나병원에 발을 들여놓으셨습니다.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고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시대에 나병의 치료 유무는 제사장이 관장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중에 몸이 치료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치료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열 사람은 부둥켜안고 울고 소리치고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홉은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뒤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육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길로 갔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기쁘고도 픈 이야기입니다. 은혜로운데 아쉬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홉 명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혼혈 종족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짐승 취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계속 갔고 짐승취급당하는 사람은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아홉 사람은 은혜만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은혜도 받고 감사도 했습니다. 의외의 사람에게서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시간 이 한 사람이 한 감사에 대해서 살펴보며 본문이 주는 은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감사의 비율 9:1   

먼저 감사의 희소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감사를 하는 사람 보다 훨씬 많습니다. 열 사람이 치료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감사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의 비율이 9:1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많습니다. 물 보다 공기 보다 더 흔합니다. 은혜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생명, 건강, 시력, 촉각, 미각, 후각, 가정, 자녀, 물질, , , , 나무, , , 공기 등등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무후각증이라고 합니다. 코는 1만개의 냄새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코가 1만 개 중 어떤 냄새도 맞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혀는 있지만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미맹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혀에는 2~5천개의 미각 세포가 있습니다. 1만개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세포들이 다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잠수함에는 증류수를 분해하여 산소를 발생시키는 산소공급기가 탑재되어 있습니다. 이 기계로 15명이 탄 잠수함에 하루에 필요한 산소를 만드는 비용이 600만원입니다. 한 사람당 40만원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40만원치의 산소를 공짜로 마시고 있습니다. 한 달에 1,200만원입니다. 1년이면 146,000,000원입니다. 80년을 산다면 11,680,000,000원 치의 산소를 공짜로 마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를 받고 삽니다. 하지만 감사보다는 원망, 불평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 은혜 받았다는 사람은 정말 많습니다. 찬송에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에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말씀에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은혜받은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의 비율이 9:1입니다.   

이것 보다 더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 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입니다. 열 명이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어서 멀리 서서 간구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열 명은 소리를 높여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고침을 받은 후에는 한 사람만이 감사했습니다. 기도와 감사의 비율이 9:1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모두 감사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고침을 받은 후에 감사는 정말 왕소금입니다. 사람들이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환난 후에는 감사도 사라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감사 찬양하는 사람 보다 훨씬 많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사실입니다.   

또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소리쳤습니다. 여기 선생님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피스타테스”(ἐπιστάτης)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5:5, 8:24, 9:33, 49). 에피스타테스는 ’(에피)라는 전치사와 서다’(히스테미)는 동사의 합성어로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chief, captain)의 의미입니다. “(), 우두머리, 사령관, 지휘관, 감독관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왕이나 사령관, 선장 등을 부를 때 사용되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 주여라는 말이 에피스타테스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주, 우두머리, 사령관, 지휘관으로 불렀습니다. 정말 놀랍고 귀한 고백이 아닙니까? 하지만 고침 받은 후에 아홉 명은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의 비율이 9:1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사람들은 정말 적습니다. 주여 부르는 소리는 정말 크게 들립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금요기도회 시간에 여러 가지 기도를 합니다. 저는 가끔 <감사기도>를 하자고 합니다. 다른 기도 시간에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감사기도 시간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뜨겁지 않습니다. 우물우물하며 뭘 기도할지 모릅니다. 저희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다른 교회에 있을 때입니다. 연말에 금요기도회를 인도하며 한 해 동안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합니다. 그러면 기도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뭐 이런 기도를 하나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썰렁한 시간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감사에 매우 인색합니다

그리고 종교의식을 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나병환자가 치료받은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는 것은 당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종교의식은 8일 동안 진행됐습니다. 의식도 까다로웠습니다. 틀림없이 열 사람은 기쁨으로 이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앉았다 일어났다가 합니다. 신앙고백을 하고 성시 교독문을 낭독합니다. 헌금을 하고 회중기도 시간에 함께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립니다. 고난 주간, 추수감사절에 성찬식을 합니다. 구약처럼 까다롭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예배 의식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감사는 얼마나 될까요? 외적인 종교의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내용, 사랑과 감사의 마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의 비율은 9:1입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느 쪽이십니까?   

그리고 또 자세히 살펴보면 믿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 열 사람은 모두 믿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나병은 불치병입니다.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12절에 만나다는 말은 마중 나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 사람은 작정하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중에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열 사람만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료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가까이 가셔서 환부를 살피신 것도 아닙니다. 그냥 멀리 서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만 듣고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가다가 깨끗해졌습니다. 고침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제사장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고침을 받지 않았는데 제사장에게로 간 것입니다. 정말 이들의 믿음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한 사람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감사의 사람의 비율은 9:1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은혜를 받으며 살 것입니다. 복을 받았습니다. 기도를 하고 믿음의 역사를 합니다. 많은 예배의식을 행합니다. 그런데 감사는 희귀합니다. 감사를 잊지 맙시다.

 

2. 이 사람의 감사   

두 번째로 이 사람이 한 감사의 특징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이 사람의 감사는 <개별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혼자 돌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아홉 사람과 함께 계속 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혼자 돌아올 때 외톨이가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아홉 사람이 이 한 사람을 유별나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동료들 중에서 혼자 떨어져서 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분리불안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동료들을 떠나 혼자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죄를 지으러 갑니다. 그러다가 무리를 지어 함께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혼자 갑니다. 구원은 개인적입니다. 은혜는 개인적입니다. 감사도 개인적입니다. 여러분! 많은 무리를 좋아하지 마세요. 다수를 좋아하지 마세요. 사람이 많아도 옳지 않다면 과감히 돌아서세요. 외톨이가 되도 돌아서세요.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사람의 감사의 특징은 개별성에 있습니다.   

이 사람의 감사의 특징은 <신속함>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즉시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볼 때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 중에 고쳐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이 그곳을 떠나기 전에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찾지 않았습니다. 빨리 가면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온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고침 받은 후 즉시로 돌아왔다는 증거입니다. 감사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시간이 가면 감격이 사라집니다. 감사는 가슴이 뜨거울 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합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감사했다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슴에 뜨거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주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솟아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수한 마음이 두 번째 세 번째 일어나는 생각으로 금방 소멸되어버립니다. 여러분! 처음 마음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처음 마음을 두 번째 일어나는 육신적인 생각으로 오염시키지 마세요. 처음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세요. 즉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도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이 차가워지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또 이 사람의 감사는 <영적>이었습니다. 고침받은 나병환자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이유는 외적인 종교적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외적인 의식을 행하러 가다가 멈추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 내적인 고백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불치병에서 고쳐주신 분에게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에게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뛰고 싶었습니다.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정규적인 예배에 참석합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 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입니다. 고백의 시간입니다. 영적인 것은 외적인 것에 우선합니다. 마음이 없는 행위는 외식입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는 종교의식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의 감사는 영적이었습니다. 질적인 면에서 진짜 감사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감사는 아주 강렬했습니다. 이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조용히 돌아올 수 없었을까요? 예 조용히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지금 감기를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나병을 치료받은 것입니다. 눈병에 걸렸다가 난 게 아닙니다. 사람이 앓는 질병 중에 가장 무서운 질병을 치료받은 것입니다. 전혀 살 소망이 없었습니다. 동굴에서 살다가 들이나 산에서 소리 없이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병이 치료된 것입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지 않았을까요? 온몸에 소름이 돋지 않았을까요? 결코 조용히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십니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적 나병이 치료되었다는 뜻입니다. 지옥불에 떨어질 뻔 했다는 생각이 들면 소름이 돋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나에게 이 사람과 같은 강렬한 감사가 있었습니까? 우중충하게 살지 마세요. 하나님이 죽은 자처럼 살지 마세요. 지옥 갈 사람처럼 살지 마세요. 우리는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밝게 사세요. 힘 있게 사세요. 찬송하며 사세요. 천국 갈 사람처럼 사세요. 열렬히 감사하며 사세요.   

이 사람의 감사에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발밑에 엎드렸습니다. 서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무릎 꿇고 감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얼굴을 예수님 서신 발밑에 댔습니다. 이것은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망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망이 생겼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발 밑은 굴욕, 짓밟힘입니다. 수치와 모욕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발밑은 은혜의 장소입니다. 회복과 구원의 장소입니다. 한없는 은총의 장소입니다. 오늘 아침에 강단 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습니다. “주님 잘 못했습니다. 주님 잘 못했습니다.” 한 없이 편안했습니다. 은혜가 밀려왔습니다. 집에 가셔서 해보세요. 예수님의 발밑처럼 귀한 장소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발밑처럼 편안한 장소는 없습니다. 주님 발 앞에 엎드리세요. 진정한 감사는 주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홉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은 이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들은 참 배은망덕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침묵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불리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사와 찬양에 집중했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감사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비난할 여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감사를 하든지 한 하든지 상관하지 맙시다. 내 감사와 내 찬양에 몰두합시다. 원망, 불평, 짜증에 집중하지 마시고 감사와 찬양에 정신을 집중합시다.

 

3. 감사에 따르는 복   

마지막으로 감사가 주는 복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감사에는 복이 따라옵니다. 아홉 사람은 치료는 받았지만 복은 받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나병을 치료받은 것은 큰 복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홉은 진정한 의미의 복은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병고침을 받은 것뿐입니다. 거기서 끝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면에 한 사람은 치료도 받고 복도 받았습니다. 아홉 사람은 육적인 질병은 고침을 받았지만 영적인 질병은 고침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한 사람은 육적일 질병을 고침받은 후에 영적인 질병도 고침받았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 복을 받게 된 동기가 감사입니다. 감사에는 복이 따라옵니다. 어떤 복이 있을까요?   

먼저 감사는 분명한 시야를 갖게 합니다. 감사했을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을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병환자일 때는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형체만 흐릿하게 보았습니다. 몇 마디의 소리만 들었기 때문에 음성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병을 고침받은 후에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자세히 보았고 그 음성도 정확하게 들었습니다. 심지어 대화까지 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감사가 예수님을 더 깊이 보게 한 것입니다. 감사가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알게 한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시야를 갖게 합니다. 감사는 인생의 이정표입니다. 감사는 인생의 가이드북입니다. 감사는 선생님과 같습니다. 감사하세요. 루터는 기도를 잘 하는 것은 공부를 잘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체험이 우리 삶을 분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분명하게 합니다. 스펄전은 찬양을 잘하는 것은 공부를 더욱 더 잘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시야를 분명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감사 찬양은 우리의 위대한 교수님입니다. 감사하세요.   

감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게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나병을 고침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 구원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 사람에게도 이 복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홉 사람을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홉 사람이 나병을 고침받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왜요?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구원도 선물로 주시고 싶지 않으셨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감사하기 위해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감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을 받게 합니다. 감사하세요. 감사가 우리에게 또 다른 복을 가져다줍니다.   

어느 리처치에서 조사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미안합니다.”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thank you”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잘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에이 씨라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매사에 미안합니다라고 하고, 미국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툭하면 에이 씨, 재수 없어.”라고 합니다. 에이 씨는 사전에 기분이 불쾌하거나 못마땅할 때 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미국 사람은 감사를 많이 하고 한국 사람은 불평 원망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에이, 더러워”, “, 치사해서 원.”, “이 씨, 못해 먹겠네.”, “에이 씨!”, “에이 씨!”, “에이 씨!”   

여러분은 은혜받은 9이십니까? 아니면 감사하는 1이십니까? 여러분은 기도하는 9이십니까? 아니면 감사하는 1이십니까? 주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9이십니까? 아니면 감사하는 1이십니까? 그냥 교회에 다니는 9이십니까? 아니면 감사하는 1이십니까?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 사회에 원망 불평이 정말 많습니다. 불평하는 나라, 불평하는 사회를 만들지 맙시다. 감사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우리 가정, 우리 사회에 감사로 채웁시다. 감사가 1이 아니라 감사가 9가 되게 합시다. 어쩌다가 희귀하게 보이는 감사가 되지 않게 합시다. 이 감사가 우리 인생을 분명하게 합니다. 이 감사가 우리 인생에 또 다른 복을 가져옵니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미안했다. 사랑한다. 고마웠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경쟁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미워하고 다투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불평해요. 죽기 살기로 살지 마세요. 미워하고 질투하며 살지 마세요. 죽을 때 미안해하지 마시고 지금 미안해하세요. 죽을 때 사랑한다고 하지 마시고 지금 사랑한다고 하세요. 죽을 때 고마웠다고 하지 마시고 지금 고맙다고 하세요. 그래서 우리 집에, 우리 직장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감사가 1이 아니고 9가 되게 합시다.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사기기를 축복합니다.

이전글 비로소 아니 먼저
다음글 주님이 준비하신 조반을 드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