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주님의 숯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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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21:6~9
주일오전예배 | 2020-06-2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미국은 50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작은 주가 미국 동부에 있는 <로드아일랜드 주>입니다. 로드아일랜드는 크기는 가장 작지만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식 명칭이 The State of Rhode Island and Providence Plantations입니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로드섬의 주와 하나님의 섭리 식민지입니다. 프로비던스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뜻입니다. 주 이름이 <하나님의 섭리의 식민지>입니다. 북쪽으로 보스톤(매사추세츠주)이 있고 동쪽으로는 플리머스(매사추세츠) 항이 있습니다. 플리머스 항은 162114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항입니다. 로드아일랜드도 청교도들이 정착한 도시입니다

로드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가 프로비던스입니다. 로저 윌리암스 목사가 1636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곳에 와서 도시를 건설하고 프로비던스라고 했습니다. 동네 이름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에서 많은 고난이 있었고 난관도 있었지만 뒤돌아보니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 이름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습니다. 윌리엄스 목사는 삶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당시에 이 종교적인 이름 때문에 매사추세츠로부터 추방되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로드아일랜드주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됐습니다

프로비던스의 <pro>이라는 뜻입니다. ‘vidence’보다’(video)는 뜻입니다. 프로비던스는 앞을 본다는 뜻입니다. 내 눈에는 현재 밖에 안 보여요. 미래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미래를 내다보시면서 나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입니다. 이것이 프로비던스입니다. 프로비던스를 다른 말로 <갓웤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는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만 있습니다. 어쩌다 되는 것은 없습니다. 재수가 좋아서 되는 것도 없습니다. 무언가 뜻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저 앞을 내다보시고 나를 위해 내 삶을 이끌어 가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지금은 잘 몰라요. 아플 때도 있어요. 괴로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이루셨을 때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시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저는 오늘 세 가지를 생각하며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이 고백한 주님이시라는 말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이시라는 말 앞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숯불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 주님이시라   

먼저 주님이시라는 말씀을 묵상해보겠습니다. 바닷가에서 누군가가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그 권면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물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요한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주님이시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요한은 무엇을 보고 바닷가에 서 계신 분이 주님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존 라일 감독은 요한은 물고기 떼를 통하여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많은 양의 물고기 떼를 보고 바닷가에 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은 즉시로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물고기는 우리 능력으로는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저 깊은 바다 속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물고기 떼를 보는 순간 즉시로 주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모르고 있지만, 나는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주님이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주님이 내 가정, 내 일터에서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손에 있는 소득을 보고 주님이시라고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내가 사는 집, 내가 타는 차를 보고 주님이시라고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입는 옷, 내가 먹는 음식을 보고 주님이시라고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통장에 찍힌 소득을 보고 주님이시라고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에이, 내가 밤 잠 못자고 쉬지 못하고 일해서 번 돈으로 산 건데 무슨 하나님이 일하셨다고 해요.’, ‘에이, 겨우 이까짓 것을 하나님이 주셨어!’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재수가 좋았을 뿐이라고 하지 마세요. 주님이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몇 번이나 던졌을까요? 12시간 동안 그물을 던졌다고 생각해봅시다. 20분에 한 번씩 던졌다면 36번을 던진 것입니다. 10분에 한 번씩 던졌다면 72번을 던진 것입니다. 던지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밤새도록 던지고 끌어올리는 일을 수십 번 반복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3-4월 달, 밤바다 날씨가 아주 추울 때입니다. 이런 때는 어디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초저녁에, 한 밤 중에 그리고 아침에 고기가 어디에 많이 출현하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총동원해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물을 수십 번 던졌습니다. 7명의 경험과 7명의 지혜를 모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오징어를 잡는 어부에게는 오징어만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물고기도 올라옵니다. 여러 종류의 생선이 잡힙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 애썼지만 먹을 수 있을 만한 어떤 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길 때 끙끙거리지 말고 제자들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었을까요? 안 되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주님을 찾을 수 없었을까요? 제자들은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 왜 일이 안 될 때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일이 안 될 때, 막힐 때, 계속 꼬일 때 전전긍긍하지 마시고 잠시 손을 놓으세요. 그리고 주님이신지 생각해보세요.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면 짜증내기 전에 잠시 멈추고 주님이신지 생각해봅시다. 바느질을 하다가 바늘에 찔리면 아야만 하지 마시고 주님이신지 생각해보세요. 돌부리에 발이 걸리면 짜증 내지 마시고 주님이신지 생각해보세요.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아놀드 토인비의 미래를 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토인비는 현실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역사에 우연은 없다고 했습니다. 역사에는 필연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를 수십 년 간 연구한 사람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에는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만 있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회에서 외톨이가 됐습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누구 하나 제자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얘들아!”, “친구들!”, “여보게들!”이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왜 주님이시라고 못했을까요? 그 분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면 고기를 잡을 것이라고 부드럽게 권면할 때 제자들은 왜 그 분을 주님이시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제자들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함께 하셨던 예수님을 왜 그렇게 못 알아봤을까요? 제자들은 항상 늦었습니다. 항상 둔감했습니다. 항상 깨닫는 것이 느렸습니다.   

우리가 제자들과 같지 않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수 없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수 없이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어렵습니다. 갈등하고 넘어집니다.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 잘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일에 둔감합니다. 느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고 계심을 믿읍시다.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삶을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이끌어 가심을 신뢰합시다. 넘어지고 안 되도 실망하지 맙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의 이름을 부릅시다. 그래서 미래 어느 날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이루어졌을 때 요한처럼 주님이시라고 고백합시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2. STOP!   

두 번째로 요한의 주님이시라는 고백 앞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묵상해보겠습니다. 요한이 많은 물고기 떼를 보고 즉시로 주님이시라고 고백을 했다면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에 자신이 하던 모든 것을 즉시로 멈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에 고기를 잡던 자신의 모든 행동을 그 즉시 중지했습니다. 앞으로 조금도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냥 멈췄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두른 후 주님께로 달려갔습니다.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베드로는 밤새도록 배를 몰았습니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쉴 새 없이 몰았습니다. 또 쉴 새 없이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렸습니다.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면 자신과 친구들은 굶어야 합니다.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베드로는 멈추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에 따라 그물을 던졌습니다. 드디어 고기를 잡았습니다. 신이 나서 고기를 퍼 담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멈췄습니다. 눈 앞에서 커다란 물고기들이 펄쩍펄쩍 뛰고 있습니다. 만선입니다. 얼마 만에 맛보는 손맛인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제일 큰 월척으로 한 마리 잡아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온 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흥분되었습니다. 어부의 꿈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멈추고 싶지도 멈출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에 모든 것을 멈췄습니다. STOP! 주님의 이름 앞에서 STOP, 이것이 베드로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시라는 말에 옳지 않은 일 앞에서 멈춰야 합니다. “주님! 이것만 하고 다음부터는 안 할게요. 이번 만이에요.” 정말 이번 만입니까? 다음번에 또 이번 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 앞에서 멈추세요. 손해가 나더라도 예수님이시라면 멈추세요. 손해처럼 보이지만 손해 아닙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서 죄를 멈추세요. 예수님 이름 앞에서 분노를 멈추세요. 예수님 이름 앞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을 멈추세요. 예수님 이름 앞에서 자랑을 멈추세요. 예수님 앞에서 자존심을 멈추세요. “예수님이라도 이건 도저히 못 참아!”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님 이름 앞에서 멈춰야 합니다. 세상 일을 하다가 주일이면 교회 오세요. 예수님 이름 앞에 멈추세요. 주일입니다. 내 날, 세상 날이 아닙니다. 멈추세요. 세상 길로 가다가 예수님 이름이 생각이 나면 멈추세요. 그리고 다시 돌아오세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멈춰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서 STOP,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배가 육지에서 50칸 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50칸은 200큐빗입니다. 1큐빗은 약50cm입니다. 배는 육지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100m를 베드로는 어떻게 갔을까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베드로는 배에서 육지까지 헤엄쳐서 갔다고 견해입니다. 둘째, 걸어서 갔다고 견해입니다. 배와 육지의 거리가 멀지만 물이 얕은 곳이라서 베드로는 걸어서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겉옷을 입은 채로 수영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물 위를 걸어서 갔다는 견해입니다. 셋 중에 어떤 것이 맞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즉시로 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말 한 마디에 베드로는 모든 물고기를 버려두고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베드로의 모습이 어땠을까요? 헤엄쳐서 왔다면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걸어서 왔다면 겉옷의 일부는 젖고 일부는 흙으로 뒤범벅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 그대로 왔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순전했습니다. 겉치장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법궤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 너무 기뻐 춤을 정신없이 추었습니다. 얼마나 춤을 정신없이 추었는지 부인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삼하6: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미갈은 다윗에게 방탕한 자가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여종들 앞에서 몸을 드러냈다고 했습니다. 방탕한 자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텅 빈, 비어 있는’(레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방탕한 자라는 말은 머리가 비어 있는 사람’, ‘미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의 성으로 들어올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왕이 미친 사람처럼 뭐할 것이냐는 말입니다. 체통 좀 지키라는 말입니다. 미갈의 비난에 다윗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낮아져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 <삼하6:21-23>
  •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고상하게 사세요. 세련되게 사세요. 품위 있게 사세요. 그리스도인답게 사세요. 그리스도인은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순전하게 사세요. 사람 바라보지 마세요. 사람 의식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고상하면 얼마나 고상하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세련되면 얼마나 세련되겠습니까? 품위 있게 사시되 다른 사람이 품위 없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부티 나는 것 좋아하지 마세요. 높은 지성을 좋아하지 마세요. 주님 앞에서는 베드로가 되세요. 다윗이 되세요. 주님 앞에서는 순전하면 됩니다.

 

3. 주님의 숯불   

세 번째로 주님의 숯불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달려와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피어져 있습니다. 숯불 위에는 생선이 구어지고 있었습니다. 떡도 있었습니다.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직접 피우신 숯불과 손수 준비하신 육의 양식입니다. 제자들은 춥고 배고팠는데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베드로는 이 숯불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베드로는 며칠 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추위를 피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던 숯불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바깥뜰에 있었습니다. 아직 겨울의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3-4월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교차가 심해 우리보다 밤이 훨씬 춥습니다.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며 온갖 조롱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리고 주먹으로 쳤으며 침을 뱉었습니다. 예수님은 찬 돌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대제사장의 종들과 아랫사람들이 바깥마당에 피워 놓은 숯불 곁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불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안드로키아입니다. 안드로키아는 숯불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개역성경은 이 두 곳을 모두 숯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숯불이라는 말이 사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에만 두 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다고만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불(14:54, 포스)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22:55, 퓌르)도 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더 정확하게 숯불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두 상황을 대조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추위에 떨며 온갖 모욕 속에서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대제사장의 종들과 아랫사람들과 숯불 주위에 삥 둘러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척, 예수님을 모르는 척 했습니다. 베드로는 비겁했습니다. 구차했습니다. 양심이 찔렸습니다. 불안했습니다.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지목하면서 당신도 예수당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향해 손가락질 했습니다. 정죄했습니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아니라고 했습니다. 닭이 우는 순간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너는 이제 끝이다.’, ‘창피하지 않니?’, ‘네가 사람이냐?’ 부끄러움으로 잊을 수 없는 밤이었습니다. 그 숯불은 원수의 숯불이었습니다. 그 숯불은 몸은 따뜻하게 했지만 마음은 춥게 하는 숯불이었습니다. 상처를 주는 숯불이었습니다. 고통스럽게 하는 숯불이었습니다. 정죄하는 숯불이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죽을 때까지 새벽닭이 울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육지로 올라오자 예수님께서 피워놓으신 숯불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생선이 구어지고 있었습니다. 떡도 구어지고 있었습니다. 누구를 위한 숯불일까요? 베드로를 위한 숯불입니다. 부드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이 제자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했습니다. 숯불이 차가운 물 속에서 나온 베드로의 몸을 녹여줬습니다. 밤새 지친 몸을 쉬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날 밤 숯불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했지? 왜 그랬니? 너 참 비굴하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괜찮아! 이해한다. 그럴 수도 있어. 사람은 누구나 연약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 원수들이 피워놓은 숯불이 베드로를 정죄하는 숯불이었다면 예수님의 숯불은 베드로를 안아주는 숯불이었습니다. 원수의 숯불이 상처의 숯불이었다면 예수님의 숯불은 치료의 숯불이었습니다. 원수의 숯불이 지치게 하는 숯불이었다면 예수님의 숯불은 쉼을 주는 숯불이었습니다. 원수들은 숯불 앞에서 베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봤지만 예수님은 숯불 앞에서 베드로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숯불은 안식입니다. 예수님의 숯불은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숯불은 치료입니다. 예수님의 숯불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숯불로 나아오세요. 원수의 숯불에 있지 마세요. 원수는 세상에 숯불을 피워놓고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러나 그 숯불은 가짜예요. 정죄의 숯불이에요. 미움의 숯불이에요. 멸망의 숯불이에요. 원수의 숯불에 있지 마세요. 원수의 숯불이 되지 마세요. 거기는 상처 밖에 없어요. 멸망뿐이에요. 원수의 숯불에서 벗어나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숯불로 나아오세요. 예수님의 숯불에는 쉼이 있습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치료가 있습니다. 등대교회는 예수님의 숯불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이 자리에 성령의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여기서 함께 찬양의 숯불을 피웁시다. 기도의 숯불을 피웁시다. 말씀의 숯불을 피웁시다. 예수님 이름 앞에 멈추세요. 예수님 이름 앞에 분노, 미움, 욕심, 세상 자랑, 시기, 질투, 정욕을 멈추세요. 세상에서 머뭇거리지 마시고 베드로처럼 주님의 숯불로 달려오세요. 주님이 기다리십니다. 함께 주님의 숯불을 피우며 이 세상의 가짜 숯불에 지치고 상한 영혼들을 치료합시다. 회복시키십시다. 주님의 숯불 곁에 앉아 찬양과 기도로 주님의 숯불이 더 크고 밝게 타오르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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