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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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21:5~7
주일오전예배 | 2020-06-14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저희 셋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됐습니다. 얼마 쯤 다녔을 때 저와 아내는 아이가 태권도하는 것을 보고 싶어 집에서 해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기본자세를 취했는데 온 몸에 힘이 꽉 들어가 있는 거예요. 아주 부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제가 몸에 힘을 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힘을 빼지 못하는 거예요. 몸에 힘을 빼는 게 뭔지 몰라요. 그렇게 몇 달을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힘이 조금 빠져 있어요. 조금 자연스러워졌습니다. 1년이 되면서 1품을 땄어요. 많이 자연스러워졌어요. 1년이 지나 2품을 땄어요. 이제 좀 태권도를 하는 아이 같아졌어요. 운동을 하려면 몸에 힘을 빼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힘을 빼야 진짜 파워가 나옵니다.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정구를 했습니다. 정구를 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스윙 훈련입니다. 처음에는 공을 주지 않습니다. 스윙만 합니다. 포핸드 100, 백핸드 100, 다시 오른쪽 100, 왼쪽 100, 돌아가면서 하루 종일 스윙만합니다. 스윙 훈련을 할 때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몸에 힘을 빼는 거예요. 라켓을 쥔 손에 힘을 빼라고 합니다. 스윙할 때 뒤쪽 다리에 힘을 빼라고 합니다. 힘을 뺐는지 안 뺐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윙을 한 후 마지막 동작에서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뒷다리를 발로 찹니다. 뒷다리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아파요. 비틀거립니다. 그런데 힘이 빠져 있으면 흔들리지 않아요. 뒷다리를 발로 차도 그대로 서 있습니다. 스윙할 때 앞다리에 체중이 실리기 때문입니다. 이 훈련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때 공을 줍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힘을 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힘을 빼고 어떻게 라켓을 쥐지?’, ‘세게 치려면 힘을 줘야지?’ 그런데 나중에는 이해가 되요. 힘을 뺄 때 제대로 된 파워가 나옵니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이 왔습니다.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이럴 때는 익사사고가 많습니다. 사람이 물이 빠졌을 때 구조장비가 전혀 없을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구조를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무조건 뛰어 들어가면 둘 다 죽을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누군가 가까이 오면 살려고 꼭 끌어안습니다. 이럴 때는 힘이 얼마나 세지는 지 끌어안은 팔을 풀 수가 없어요.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러면 둘 다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힘이 빠져 기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안전합니다. 힘이 빠지면 뒤로 가서 머리채를 잡고 천천히 끌고 나오면 안전하게 구조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힘 빼기입니다. 왜 힘을 빼야 할까요?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커집니다. 내 삶에 내 힘이 클수록 내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적게 나타납니다. 반대로 내 힘이 적으면 적을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내 힘과 하나님의 능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나도록 바울의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이 너무 고통스러워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상반절) 이 말은 바울아! 너 힘 좀 빼라. 네가 힘을 빼야 내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단다.” 이런 말입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싶으세요. 세상 힘을 빼세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으세요. 세상 자랑 버리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목에 힘을 빡 주고 왜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느냐고 하지 마세요.   

저는 이 시간에 두 가지를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낙심 중에서 한 고백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둘째, 절정의 순간에 요한이 한 고백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두 종류의 고백에서 영적 교훈을 받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없나이다   

먼저 제자들이 낙심 중에서 한 고백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은 아주 보기 드문 일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따뜻한 기후로 물고기뿐만 아니라 각종 생명체들이 아주 풍부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다 주변에는 연대추나무, 야자나무, 땅비싸리를 비롯한 각종 열대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 숲에는 많은 새들이 살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북쪽으로 104km 떨어진 곳에 헬몬산(2814m)이 있습니다. 정상은 1년 내내 눈이 쌓여 있습니다. 만년설입니다. 이 눈이 녹아서 갈릴리호로 흘러들어가 물의 영양이 아주 풍부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 속에는 다양하고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닷가에서는 땅거북, 거북, 가재까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박물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직접 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물고기 떼가 있다. 그러한 고기 떼가 수면을 0.4헥타르(1헥타르 3천 평) 이상 덮고 있는 때나, 등지느러미만을 수면에 드러내 놓고 천천히 떼를 지어 다니는 고기들이 어찌나 빽빽하게 많은지 약간 떨어져서 보면 퍼붓는 소나기가 수면을 때리는 것 같은 때가 자주 있다.” 물고기가 이렇게 많은 곳이 갈릴리 바다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가 아무것도 잡지 못한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종종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뭐를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신조어 중에 <될놈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운명적으로 좋은 운명을 타고 나 역경이 와도 꼭 성공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될놈될>의 반대말이 <안될안>입니다. 안될안은 안될 놈은 뭘해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안될 사람은 재수가 좋든 나쁘든 무조건 안 된다는 거예요. 인생을 살다보면 뭘 해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힘이 빠집니다. 평생 어부인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기만 해도 고기가 잡히는 바다에서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은 <안될안>이었습니다.   

아침이 됐습니다. 아침에 누군가가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릅니다. “얘들아!” ‘얘들아!’라는 말은 아기들아!’, ‘소년들아’, ‘친구들아!’, ‘여보게들!’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부르는 사람의 사랑과 애정이 담긴 아주 친근한 말입니다. 지친 제자들에게 해변에서 아주 다정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정도면 제자들이 예수님인줄 알만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제자들은 전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몰랐을까요? 종종 우리는 주변 환경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들려오는 주님의 소리를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때든지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해변에서 나는 소리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기가 없다는 것을 모르셨을까요? 예수님이 모르셔서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기가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왜 물으셨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주시기 전에 나는 없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기 전에 나는 못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왜요? 내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이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이 교훈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내 능력으로 버둥거리며 살다가 지쳐서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이 교훈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하반절) 예수님의 능력은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내가 약할 때 강해지고 내가 강해질 때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없이 작아져야 합니다. 강한 것을 자랑하지 마세요. 약한 것을 자랑하세요. 있는 것을 자랑하지 마세요. 없는 것을 자랑하세요. 참 성경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없는 것을 자랑하라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없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지 마세요. 있는 것을 자랑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능력이 떠납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떠나나요? 사람도 떠납니다. 자랑해보세요. 사람도 싫어해요. 너 잘 났다고 해요. 하나님의 능력은 내 능력이 약할 때에 온전해집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신이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차도 있고 집도 있습니다. 성공도 하고 명예도 있습니다. 그래서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나는 힘도 있고 능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아니 없다는 말을 하기 싫어합니다. 없어도 없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없어도 있는 척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빈 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공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자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실패자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밑바닥까지 가야 비로소 이 고백을 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 아까운 재산을 아무 말 없이 그냥 떼어주었을까요? 그것은 깨져야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져야 다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지지 않으면 아들의 인생을 다시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외국에 나가서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무너지고 낮아져서 없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할 때 그 인생이 새롭게 시작됐습니다. 그러니까 밑바닥까지 가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밑바닥이 복입니다. 아파트를 재건축을 하려면 다이너마이트로 오래된 건물을 폭파시켜야합니다. 옛날 건물이 무너지지 않으면 재건축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죽음, 무너짐, 깨짐입니다. 우리 인생은 십자가 앞에서 다 무너져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무너지지 않으면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철저하게 부셔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유대인들이 무서워 도망갔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무서워 숨어 있습니다. 제자로서 실패했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져 먹을 것을 구하러 바다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고기잡이는 제자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로서 실패했습니다. 어부로서도 실패입니다.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될놈될 같은 바다에서 제자들은 안될안이었습니다. 안됐습니다. 못했습니다.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이 예수님이 일을 시작하시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고기가 너무 많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배 왼쪽에만 그물을 던졌을까요? 오른편에는 단 한 번도 던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제자들은 배를 이리 저리 돌려가면서 밤새도록 앞쪽, 뒤쪽, 오른쪽, 왼쪽에 수 없이 던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성공이 내 능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공은 예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성공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바다에서 절망했을 때 바닷가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바닷가에 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지 모릅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이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그냥 바닷가에 서 있는 사람의 말대로 한 것뿐입니다. 그랬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시편19: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상이 있습니다.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얻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닷가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는 제자들은 오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해 낙심하고 절망한 그 날 아침에 제자들은 바닷가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영적인 바닷가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영적 바닷가는 성경입니다. 그 영적 바닷가는 교회입니다. 그 영적 바닷가는 말씀입니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복 있는 자입니다.

 

2. 주님이시다   

두 번째로 절정의 순간에 요한이 한 고백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제자들은 바닷가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순간 요한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3년 전에 고기를 잡지 못한 밤이 있었습니다. 지난밤과 아주 흡사한 밤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베드로를 향해 요한의 입에서 주님이시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성경시대 유대인들은 고기를 밤에 잡았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 그물이 없었습니다. 눈에 다 보이는 그물이었습니다. 낮에 그물을 내리면 물고기가 다가오는 그물을 보고 다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그물이 보이지 않는 밤에 고기를 잡았습니다. 낮에는 고기가 잡히는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해가 뜬 아침에도 고기를 잡히게 할 수 있으신 분은 누굴까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분이 누굴까요? 바다 속의 물고기까지 주장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굴까요?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고기가 많이 잡혀 흥분된 순간에 요한이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시다입니다. 한 번 그물을 던졌는데 초 만선이 됐습니다. 밤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에 역전이 됐습니다. 이 흥분된 순간에 요한이 입에서 순간적으로 나온 것은 주님이시다.”입니다. “, 만세! 고기다. 고기가 엄청 잡혔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사적으로 주님!”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많은 고기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 굶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이제 돈 좀 벌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고기 잡는 것은 잘 해.’라고 생각했을까요? 다른 제자들은 만선이 된 고기를 보고도 바닷가에 서 있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많은 고기를 보는 순간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성공의 정점에서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고기가 가득 찼을 때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반대로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실패할 때, 넘어질 때,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요한은 성공의 정점에서 반사적으로 주님을 고백했습니다. “주님이시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봤다면 가장 먼저 행동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요한이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하자마자 베드로는 즉시로 겉옷을 두르고 물로 뛰어듭니다. 베드로의 행동파다운 모습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베드로가 즉흥적으로 물에 뛰어들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갑판에서 옷을 벗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시대 어부들은 치렁치렁한 겉옷이 갑판에서 일하는데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옷만을 입고 일을 했습니다. 배는 바닷가에서 100m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옷만을 입고 헤엄치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 앞에 최소한의 옷만 입은 채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바닷가에 오신 것을 알고 배가 바닷가에 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입으로 주님을 고백한 사람이 요한이라면 행동으로 주님을 고백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삶의 정점에서 그 일을 하신 분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이 고백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 아닐까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삶의 정점에서 요한이 최고의 고백을 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열 두 제자 중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댄 체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실 때 열한 제자가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간 제자가 요한입니다. 요한은 지극히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요한은 자신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19:26, 20:2, 21:7, 21:20) 이 사랑이 삶의 정점에서 주님을 고백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사랑은 영적분별력을 줍니다. 경험을 따져본다면 베드로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알아봐야 했습니다. 3년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를 타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많았는지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근처에서 지켜본 사람이 요한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을 알아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먼저 알아봤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게 합니다. 사랑이 예수님을 알게 했습니다. 해변이 50칸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50칸은 200큐빗입니다. 1큐빗은 50센티입니다. 그러니까 50칸은 100m입니다. 사랑은 거리가 상관이 없습니다. 너무 멀어서 못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요한의 영적 분별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서 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성경을 사랑하세요. 교회를 사랑하세요. 오늘 우리 시대는 영적 분별력이 꼭 필요한 시대입니다. 미움은 영혼을 혼탁하게 합니다. 미움은 영적 분별력을 잃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오늘 우리 시대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 없나이다. 주님! 안 됩니다. 주님! 못합니다.”라고 고백합시다. 내 삶에서 내 힘을 뺍시다. 내 삶에서 세상 자랑을 뺍시다. 목에서 힘을 뺍시다. 아집, 분노, 미움, 시기, 질투, 자랑, 교만을 뺍시다. 그거 하나님도 사람도 싫어하는 냄새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 힘이 빠질 때 온전해집니다. 내 삶에 내 힘을 빼고 주님이 일하시게 합시다.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을 의지하세요. 주님이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일을 하셨을 때, 그때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라고 고백합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입니다. 담임 선생님이 여자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먹을 갈아서 붓글씨를 썼습니다. 선생님께서 이쪽저쪽을 다니시며 이 아이 저 아이에게 붓글씨를 지도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게도 오셨습니다. 저는 따로 붓글씨를 연습한 적은 없었지만 글씨를 웬만큼 잘 썼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연습을 조금 시키더니 제가 잘 쓴다고 생각하셨는지 종이를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뒤로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제 뒤에서 저를 안은 채 선생님의 왼손으로 제 왼손을 잡으시고 선생님의 오른손으로 붓을 저와 함께 잡았습니다. 제가 붓을 정자세로 잡고 선생님께서 제 손 위를 감싸 잡으셨습니다. 저는 따뜻한 선생님 품에서 선생님과 함께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 손에서 힘을 빼면 멋진 선생님의 글씨체가 나오고 제가 힘을 주면 글씨가 흐트러졌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힘을 빼면 뺄수록 선생님의 글씨체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힘을 뺐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 제 손을 맡겼습니다. 글씨가 완성이 됐습니다. 처음 부분에 제가 힘을 주었기 때문에 조금 삐뚠 부분이 있었지만 정말 잘 쓴 글씨였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학급 게시판에 붙였습니다. 이 붓글씨는 제가 쓴 걸까요? 선생님이 쓴 걸까요? 제 붓은 붓 중에 가장 싸구려였습니다. 먹과 벼루도 싸구려였습니다. 부잣집 아이들은 좋고 커다란 붓과 좋은 먹과 벼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글씨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좋은 글씨는 싸구려 붓을 가진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왜요? 선생님이 제 손을 잡고 쓰셨기 때문입니다. 제 손이 선생님의 손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게시판에 붙어 있는 제 글씨를 볼 때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손에 힘을 빼세요. 그래서 우리 인생에 선생님 되신 예수님의 글씨가 나옵니다. 육신적인 힘을 빼세요. 세상적인 자랑 빼세요. 그래야 예수님의 힘이 나옵니다. “주님! 나는 없습니다.” “안 됩니다.” “못합니다.”라고 고백합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도록 힘을 뺍시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일하셨을 때 주님이 하셨다고 주님께 영광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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