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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디베랴 호수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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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21:1~5
주일오전예배 | 2020-06-0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갈릴리 바다는 남북으로 21km, 동서로는 11km이고, 둘레는 53km입니다. 해수면으로부터 209m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균 깊이는 약 26m이고 가장 깊은 곳은 43m입니다. ‘갈릴리 바다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호수입니다. 히브리 사람은 물이 있는 곳을 얌이라고 부릅니다. 얌은 바다, 호수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구약성경은 갈릴리 바다를 얌킨네렛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할 때 얌을 딸라싸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딸라싸는 바다라는 뜻 밖에 없는 헬라어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성경을 각 나라 언어로 번역을 하다 보니 갈릴리 호수가 갈릴리 바다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런 번역의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의 모습에 오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갈릴리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립니다. 갈릴리는 히브리어로 구역, , 순회(갈릴)라는 뜻입니다. 갈릴리는 여호수아 때에 납달리 지파가 분배받은 땅입니다(21;32). 그러다가 BC 722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면서 이방 땅이 됩니다. 갈릴리는 구약 성경에서 긴네렛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긴네렛은 ‘(수금을) 튕겨서 울리다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킨노르에서 온 말로 갈릴리 바다가 하프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또 갈릴리는 이름처럼 아주 아름다운 땅입니다. 긴네렛이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는 게네사렛이라 불립니다. 시리아의 안디옥 출신인 누가는 누가복음 51절에서 게네사렛 호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요한은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호수라고 부릅니다.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바다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갈릴리는 BC 63년에 로마의 행정구역이 됩니다. AD 25년에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호수 서쪽(서북)에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봉헌합니다. 예수님은 간사한 헤롯을 여우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호수라고 불렀습니다. 티베랴 바다는 세상 왕에게 바쳐진 땅입니다. 이때부터 디베랴는 갈릴리 지역의 중심도시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개의 호수가 네 개의 이름으로 불린 것입니다. 갈릴리, 긴네렛, 게네사렛, 디베랴, 이 네 이름에서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역사적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는 여러 강대국들에 의해 빼앗기고 밟히고 노략당한 땅입니다.   

이 시간 저는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둘째, 디두모라 하는 도마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도마 스토리가 요한복음에는 네 번 나옵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저는 네 번 중 세 번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네 번째 스토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호칭 속에 담겨진 의미를 생각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 디베랴 호수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다   

먼저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디베랴 호수라는 말은 복음서 기자 중 요한만 사용한 명칭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갈릴리>라는 말을 16, <디베랴>라는 말을 3번 사용합니다(6:1, 6:23, 21:1). 디베랴는 갈릴리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의 지배국입니다. 요한은 유대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디베랴라는 이름을 쓰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갈릴리를 디베랴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요? 성경학자들은 요한이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호수라고 표기한 것은 요한복음이 이방인을 위해서 기록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디베랴라는 말에는 요한의 또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요?   

서울 신촌의 원래 이름은 새말입니다. 새말은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 사람들이 새 신() 자에 마을 촌() 자를 써서 신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촌은 일본 사람들이 쓰던 이름입니다. 병천은 3·1운동의 성지입니다. 이 병천의 원래 이름은 아우내입니다. 두 개의 내가 만나 아우러지는 곳이라고 해서 아우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에 서로를 아우르며 사는 아우내 사람들이 정서가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아우를 병() 자에 내 천() 자를 써서 아우내를 병천이라고 했습니다. 3·1운동의 성지에 일본 사람들이 쓰던 이름이 아직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후손들은 잘 몰라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지만 일본 치하에서 억압당하던 우리 조상들은 신촌이나 병천이라는 말이 싫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없을 때는 원래 순 우리 이름이었던 새말이라고, ‘아우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요?   

요한은 유대인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로마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만 유대인들의 고유 명칭이었던 갈릴리라는 말을 계속 쓰고 싶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요한은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억압하는 로마, 그리고 자기 전 생애를 걸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여 자신과 동료들에게 절망을 안겨줬던 로마인들이 쓰던 디베랴라는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요한복음 맨 마지막을 갈릴리 바다가 아니라 디베랴 호수라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디베랴는 세상 왕에게 받쳐진 땅입니다. 세상 왕이 주인처럼 군림하는 땅입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서 학대받으며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요한은 이 세상 황제의 땅에 진짜 황제가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요한은 세상 왕을 황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진짜 황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에 갈릴리 바다가 아니라 디베랴 호수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진짜 황제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은 마치 마귀에게 봉헌된 나라처럼 보입니다. 물질, 쾌락, 권세가 왕노릇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진짜 황제는 예수님입니다. 마귀가 세상에서 주인처럼 군림하지만 진짜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를 통치하십니다.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많은 물질, 높은 권세에 쫄지 마세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강하고 담대하세요. 어깨를 펴세요.   

1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나타나다는 말을 두 반복해서 쓰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타나다는 말이 헬라어로 파네로오(φανερόω)입니다. 이 단어는 계시하다, 알리다, 보여주다, 보이게 하다, 나타내다는 뜻입니다. 감추어져 알려지지 않은 것을 말이나 행동 또는 그 외의 방법으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나타내다(파네로오)라는 단어는 비추다, 빛을 내다는 뜻이 파이노(φαίνω)에서 온 단어입니다. 빛이 있어야 감추어진 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적인 빛을 비추셔서 세상 황제의 땅에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물어보신 장소가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이것을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물어보셨을까요? 가이사랴 빌립보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곳입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국경 도시입니다. 예수님의 주 사역 무대는 갈릴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부러 이곳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이것을 물어보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빌립보 가시사랴는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풍요로운 도시입니다. 로마가 AD 20년 헤롯 대왕에게 하사한 땅입니다. 초기에는 파니온 혹은 하네아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판 신에게 바치는 동굴과 샘이라는 뜻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우상의 도시입니다. 빌립 왕이 자신의 권세를 영구히 존속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바네아스를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개명했습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자신이 이름과 디베료 가이사의 이름을 합쳐서 이 도시의 이름을 삼았습니다. 다른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했습니다. 디베랴 바다처럼 마귀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이 왕노릇 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구세주되심을 분명하게 나타내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바랍니다.   

2. 디두모라는 도마   

두 번째 디두모라 하는 도마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 열 두 제자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리실 때도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외에 다른 제자가 따라옴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5:37).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이 세 사람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14:33). 예수님은 12제자 중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따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열두 제자의 이름이 열거될 때에는 항상 세 사람이 앞에 나왔습니다(마태복음 10장에는 안드레가 베드로 다음에 나옴). 베드로는 세 사람 중에서도 가장 먼저였습니다. 베드로 다음에는 야고보 아니면 요한이었습니다. 거의 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 순서가 뒤바뀐 곳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어떤 집에 일곱 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나머지 네 명은 당시에 어디 있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요한은 그 일곱 명의 이름을 나열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입니다. 두 번째는 디두모라 하는 도마입니다. 세 번째가 나다나엘이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세배대의 아들들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이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두 번째에 디두모가 나오고 야고보와 요한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에 나오고 있습니다. 왜 순서가 뒤바꿨을까요? 이것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된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도마가 이렇게 변화된 이유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무서워하며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4절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있었습니다. 도마는 혼자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혼자 의심했고 혼자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새로운 소망이 넘칠 때 혼자 낙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도마가 변화됩니다. 도마는 즉시로 예수님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과 은혜의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도마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이전 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러기가 V자로 나는 이유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기러기가 V자로 나는 이유는 앞의 새가 날갯짓을 하면 뒤의 새에게 상승 기류가 발생해서 혼자 나는 것과 비교해 71%를 더 멀리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한 마리가 날아올라 두 번째를 위해 길을 열고, 두 번째는 세 번째에게 길을 안내하고, 세 번째의 에너지를 받아 네 번째가 비상하고, 네 번째는 다섯 번째를 끌어당기고, 다섯 번째의 기세를 타고, 여섯 번째가 날개치고, 여섯 번째는 일곱 번째에게 힘을 주며 날아갑니다. 선두에 선 기러기가 지치면 스스로 무리의 맨 뒤로 물러나고 다른 기러기에게 선두를 양보합니다. 모든 기러기가 차례차례 무리의 선두와 후미를 맡게 됩니다. 여러분 공동체와 믿음으로 함께 하십시오. 불신, 원망, 미움, 시기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함께 하십시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공동체 안에서 동역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더 가까이 갑니다.   

반면에 요한은 뒤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름까지 생략하고 세베대의 아들이라고만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요한에 대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특별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호칭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이 침묵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심스럽게 요한이 은혜의 자리에서 아주 조금 멀어진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해봅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도마는 더 은혜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은 그 자리에서 조금 멀어집니다.   

신앙생활하는 중에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지 마세요. 세상은 우리를 예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교회도 불완전합니다. 목사도 불완전합니다. 성도도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신 분이 있다면 회복하세요. 항상 제자리에 자리에 머물러 계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더 가까이 가세요. 뒤로 물러나지 마세요. 우리는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닙니다.  

3. 얘들아!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갈릴리 바다로 나갑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보냄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직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제자들에게 성령 강림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러 나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눈에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성경기자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지나치게 육신의 필요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면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베드로의 말에 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육신적인 힘으로 일하려는 베드로의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의지가 잘 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라고 했습니다. 밤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빛의 자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어둠 속에서 있는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지나치게 육신적인 일에 힘을 기울였던 제자들은 결국 고기도 잡지 못했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이와 같은 일은 성경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4절에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마리아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앞에 서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2415-16절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예수님의 죽으심에만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까이에서 같이 걷고 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적인 일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영적인 일에도 장애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일하는 것은 전혀 잘 못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잘 못이 아닙니다. 성실하세요. 자기 일에 진실하세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데살로니가후서 210절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나태함과 게으름은 죄입니다. 그런데 육신적인 필요에 너무 집중하지는 마십시오. 세상적인 일에 너무 심취하지 마세요. 세상 일에 집중하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의 일에 너무 빠지면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 길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잡는 일에 너무 심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일에 빠져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자비로운 음성으로 깨우십니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얘들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얘들아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이디온입니다. 파이디온은 어린 아이라는 뜻입니다. 7세 이하의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소년, 소녀, 아이라는 뜻의 파이스의 지소사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디온은 우리말에 송아지나 강아지와 같이 어린 아이를 애정이 담긴 말로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아가야!’라고 사랑스럽게 부르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부모가 나이에 상관없이 자식을 아가야라고 부를 때가 있습니다. 먼저 너무 사랑스러울 때 부모는 자식을 우리 애기!”라고 합니다. 또 무엇을 너무 잘해 대견스러울 때 우리 애기, 잘 했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아주 힘써서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돼 의기소침해 있을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 애기, 고생했어. 수고했다.”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밤이 새도록 고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낮에는 덮고 밤에는 춥습니다. 제자들은 일과 바다, 추위와 피곤함에 지쳤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빈 손입니다. 먹을 것이 떨어진 제자들은 이제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먹을 것 걱정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때 수고하고 지친 제자들을 향해 아버지 음성이 들립니다.   

얘들아!”   

이 말은 아가들아! 수고했어. 그래, 추운 바다에서 밤새 애썼지?”라는 아버지 마음이 담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조롱의 음성이 아닙니다. “나 없이 고기 잡으러 간다더니 고기 좀 잡았니? 고기 없지? 내가 허탕 칠 줄 알았다. 어째 니들은 하는 일이 처음 나를 따를 때나 내가 부활한 후나 변함이 없니! 언제 변화될래? , 한심하다, 한심해.” 이런 조롱이나 비꼼이 아닙니다. 따뜻한 위로입니다. 격려입니다.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실패하면 조롱합니다. 혀를 찹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조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 일을 하다가 실패를 해도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안타까워하십니다. 애처로워하십니다.   

부활 후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에서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고기를 잡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요한은 왜 하필 디베랴 바다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사건을 요한복음 마지막에 기록했을까요? 디베랴는 세상 황제에게 바쳐진 땅입니다. 세상 왕의 주인인 땅입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육적인 일에 빠졌습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육적인 일에 깊이 빠져 있었고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 일에 깊이 빠집니다. 육적인 일에 심취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분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일에 지쳐 우리 마음 속에 수 없이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도 무시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넘어지고 실패하고 낙담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세상 황제의 땅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가야! 괜찮아, 힘내. 나 여기 바닷가에 와 있어.” 주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그리고 주님께로 가세요. 거기에 우리의 쉼과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화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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