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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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일서 2:13-14
주일오전예배 | 2020-05-3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뒷골목에 가면 세베대의 집으로 알려진 아주 오래 된 가옥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 아랍 사람이 주인입니다. 그을린 작은 집입니다. 세베대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생선 가게 지점을 가지고 있어 제사장의 집에 생선을 공급했습니다. 세베대의 부인이 살로메입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여인입니다(15:40). 그녀는 부활의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향품을 사서 예수님의 무덤에 가기도 했습니다(16:1). 이 집의 큰 아들이 야고보이고 둘째 아들이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이 집의 두 형제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보아너게(천둥의 아들)라고 부르신 것을 보면 요한은 매사에 강하고 무섭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요한은 성격이 천둥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사랑의 사도가 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 네 명의 아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이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리아를 네 형제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디모데가 순교한 후에 요한은 에베소교회의 후임자가 됩니다. 요한은 에베소에 마리아에게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모시고 살았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라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사랑하라는 말만 반복하다고 하자 너희들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노후에도 종종 어두운 지하 교회를 방문해 성도들에게 인사로 하는 말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시종일관 동일한 복음을 입이 닳도록 전했습니다.

 

오늘 요한일서를 읽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사도 요한이 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비들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비들이 아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쓴 것과 쓰는 것

 

먼저 사도 요한이 쓴 것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4절에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했습니다. 13절에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문장이 이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글자가 틀립니다. 14절에는 쓴 것이라고 했고 13절에는 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과거에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전에 쓴 것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AD 85-90년 사이에 기록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요한일서입니다. 요한은 요한일서를 AD 90~95년 사이에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두 서신을 작게는 1, 많게는 10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차이가 더 적을 수도 있고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요한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동일한 것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저것을 쓰고, 현재에는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성경 66권은 1600년 동안 40여명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에, 기록했습니다. 전화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성경 기록자들과 우리 이런 내용을 기록합시다.”라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나는 이것을 여기서 기록하고 있다. 미래에 어느 날 누가 어디서 이것을 기록하라고 유언을 해서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전혀 약속이나 연락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제각기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동일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시간도 장소도 사람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동일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신비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한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결같은 책입니다. 변함이 없는 책입니다. 성경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12 사도 중 11명의 사도가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순교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순교를 당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 계시록을 기록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100세까지 살았습니다. 요한은 말년에 다섯 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요한 1 · 2 · 3 ,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성경이라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강조한 책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내면적인 마음이 가장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사랑의 마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사랑의 복음입니다(3:16). 요한 1 · 2 · 3 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책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 책입니다. 요한은 한결같이 사랑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기록되었을까요? 사도 요한은 왜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을 쓰고 있을까요? 요한은 왜 새로운 것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변함없는 영적 필요를 시사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교훈을 요구합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성질이 똑같습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성향은 똑같습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된 19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본성은 똑같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은 동일한 위험 속에서 동일한 갈등 속에 살고 있습니다. 동일한 상처로 동일한 아픔을 겪고 삽니다. 동일한 문제 앞에서 동일한 고민을 하며 삽니다. 세상은 변하고 사회가 발달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필요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동일한 것,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오래 전에 글을 써서 보낸 이유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4). 지금 다시 글을 쓰는 이유도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입니다(13). 태초부터 계신 이가 누굴까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입니다. 육으로 난 사람에게는 육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영적으로 난 사람에게는 영혼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말씀은 밥입니다. 말씀은 참된 음료수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요한은 쓴 것을 다시 쓰고 있습니다. 요한은 다섯 번에 걸쳐 동일한 것을 쓰고 있습니다. 쓰고 또 쓰고 다시 쓰고 있습니다. 요한은 왜 쓴 것을 다시 쓰고 또 다시 쓰고 있을까요? 쓴 것을 다시 쓴다는 것은 쓰는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강조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요한은 90 전후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주 고령입니다. 당시에는 70을 사는 사람도 거의 없던 때입니다. 요한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환란과 핍박의 시대입니다. 요한은 아비의 마음으로 환란의 시대를 살아야 할 성도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쓰고 또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진 책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1600년 동안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수 천 년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성경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1600년 동안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얼마나 중요하면 수 천 년 동안 증거하실까요? 학교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중요한 것을 여러 번 강조하십니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별표를 하십니다. 밑줄을 그으십니다. 꼭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왜 강조할까요? 그것은 시험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성경을 강조하실까요? 성경을 알아야 시험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길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인생 여행을 끝까지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쓰고 다시 쓰고 또 다시 쓰신 것입니다. 성경은 아버지 마음입니다. 요한은 아비의 마음으로 요한일서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주는 글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아비가 필요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비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비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비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테르입니다. 파테르는 혈통적으로 낳아주신 아버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스승도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은 영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여기 아비라는 말은 초대 교회 내에 스승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비교적 높은 연령층의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영적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른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 어른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켜 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너희 아비들아!”

 

아비는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미숙하고 서투른 사람을 아비라고 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진보가 있고 인격이 함양되고 믿음에 확신이 있고 인사가 분명하고 판단력이 정확한 사람들을 아비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옳지 않은 신앙이나 이단에 속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미혹되어 진리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류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새로운 회심자들은 이 아비들을 의지합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 아비가 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따를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큰 추수를 위해 성숙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아비가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십시오. 교회 안에는 영적 아비가 필요합니다.

 

아비는 신앙이 안정된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불안하고 요동하는 사람을 아비라고 하지 않습니다. 쉽게 동심하는 사람을 아비라고 하지 않습니다. 안정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아비라고 합니다. 아비는 믿음의 길을 오롯이 갑니다.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며 가지 않습니다. 힘들 때나 힘들지 않을 때나 한결같이 걸어갑니다. 그래서 처음 믿는 사람들은 아비를 따라갑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지게를 메어본 적이 있습니다. 힘이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게를 메면 좌우로 흔들려요. 어떤 때는 두로 넘어질 것 같았고 어떤 앞으로 꼬꾸라질 것 같기도 했습니다. 불안 불안했습니다. 좁은 길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리 크고 아무리 무거운 짐을 메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넓은 길도 좁은 오솔길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치 망부석처럼 전혀 흔들림 없이 걸어가셨습니다. 넓은 길이든 좁은 길이든 흔들림이 없이 갈 수 있는 안정된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아비는 어디든 잘 걸어가는 신앙인입니다.

 

아비는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이가 꽤 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30대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40대 중반 이후를 말할 것입니다. 요한은 교회 안에서 나이가 꽤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아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3-40? 5-60? 아니면 70대이십니까? 그러면 교회 안에서 아비이십니까? 요한이 말하는 아비는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은 남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비를 말합니다. 나이는 아비인데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가 아니십니까? 성인 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아이는 어린 시절 환경적인 요인으로 어른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성장하여 어린 시절을 상실했거나 역기능 가정환경과 충격으로 상처를 입고 치유가 안 된 상태에서 과거에 집착함으로써 성인이 되어서도 상실된 어린 시절의 문제를 안고 있는 성인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이면서 아이인 경우를 말합니다.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어른인데 정신적으로는 아이인 경우를 성인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른인데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살아요. 어른이 어린 아이처럼 살아요. 싸우고 다투고 미워해요. 별거 아닌 일에 삐져요. 우리는 영적인 성인 아이가 돼서는 안 됩니다. 40살 먹은 아기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됩니다. 50살 먹은 어린 신자가 되면 안 됩니다. 허리가 구부러진 소년 크리스천이 되면 안 됩니다. 머리에는 백발이 휘날리고 있는데 신앙은 어린 아이가 되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가 되어야 합니다.

 

엘리는 98세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입니다. 나이로도 직분으로도 엘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그를 아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성경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엘리는 백발이 성성한 어른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반면에 사무엘은 어린 아이였습니다. 나이는 소년입니다. 젊은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성소를 귀히 여겼습니다. 예배를 귀히 여겼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아이였지만 영적으로는 아비였습니다. 어느 날 밤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지만 엘리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사무엘을 비췄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캄캄했습니다. 사무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엘리는 자기가 알아야 할 일을 어린 아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민망하지 않았을까요? 엘리 시대 교회는 영적인 성인 아이였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성인 아이 교회들이 있습니다. 등대교회는 성인 아이가 모여 있는 성인 아이 교회가 되면 안 됩니다. 영적 아비가 있는 아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비는 돌보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님은 늦게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어쩌다가 새벽에 볼 일을 보기 위해 일어나면 부모님은 이미 일어나셔서 왔다 갔다 하고 계세요. 겨울에는 해가 뜨기 전 캄캄할 때 일어나셨어요. 부모님은 새벽에 일어나셔서 아궁이 불을 때세요. 밥을 하세요. 마당을 쓰세요. 집안 여기저기를 살피세요. 여름에는 새벽같이 들에 나갔다가 오세요.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하십니다. 아비는 집안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아비가 집안을 돌아보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아비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삽니다. 그들을 위해서 아비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수고합니다. 아비의 수고로 아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부모의 마음을 가진 사람 때문에 근심에 쌓인 영혼이 위로받고, 타락한 형제들이 회복되고, 냉랭해졌던 자들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양떼를 살피고 먹이는 일을 하는 자들이 증가되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코로나19사태로 생활고를 겪는 국민들을 위해 국가가 국민 전체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긴급재난지원금은 세대주가 신청하도록 했습니다. 세대주라는 것은 공동으로 가족생활을 하는 단위인 세대의 책임자를 가리킵니다. 세대주는 대부분 아버지입니다. 아비는 한 가정의 책임자입니다. 아이들이 세대주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세대주입니다. 아이들이 가정의 책임자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책임자입니다. 요한은 교회 안에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책임지고 있는 자들을 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책임지고 있는 영적 세대주이십니까? 아니면 아무런 책임이 없는 아이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오늘 교회 안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어린 아이들이 많습니다. 구경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영적인 세대주가 되세요. 교회 안에 영적인 세대주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 아비들이 있어야 합니다. 가까운 곳에 교회 하나가 있습니다. 등록교인이 500여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일 출석은 350 전후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에 700명이 참석합니다. 나머지는 등록하지 않고 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런 책임 없이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아비는 지키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은 아비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랍니다. 저희 집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학교를 잘 다녔는데 어느 날 학교 가던 아이가 돌아오는 거예요. 놀라서 물어봤더니 학교에 괴롭히는 아이가 있는 거예요. 아이가 잘 극복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괴롭힘이 더 심해졌습니다. 제가 학교에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네가 누구누구니? 나 누구 아빠야. 경찰서 가자!”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잘 못했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거예요. 집에 돌아왔습니다. 제 아이에게 물어봤더니 그 아이가 이제 괴롭히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비는 집안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아비는 집안을 평안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아비는 집안을 안전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비들은 교회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아비들은 교회를 평안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 신자를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지키는 아비가 되세요.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아비가 되세요. 연약한 영혼을 품어주는 아비가 되세요. 교회를 어지럽히는 마귀를 물리치는 아비가 되세요.

 

영국의 정치가이며 외교관이었던 필립체스의 흔들리는 청춘 용기가 되어줄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칠립체스는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청춘은 열 사람의 학자보다 한 사람의 아버지가 필요하다.” 필립체스는 학교 선생님이나 대학교수는 자기 분야만 가르칠 뿐 인생의 청년기에 알아야 할 지혜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며 청년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는 사람이 별로 없음을 안타까워합니다. 흔들리는 청춘에게 누군가의 따뜻한 조언 한 마디는 거친 바다 가운데서 방향을 가늠할 나침반이 되기도 하고 배를 목적지에 이르게 할 키 되기도 합니다. 어른이라면 흔들리는 청춘들에게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3. 아비들이 아는 것

 

마지막으로 아비들이 아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했습니다. 13절에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했습니다. 14절에도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했습니다. 아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말을 한 번만 말해도 되는데 이어서 두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비들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왜 이것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아비는 아비로서 예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저희 부모님을 알았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자기 부모를 모르는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님을 아는 수준이 달라집니다. 제가 결혼해서 첫째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안아주고 업어주고 먹여주고 씻겨주었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를 씻겨주고 먹여주다가 문득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예뻐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 전에도 부모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돼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됐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저에게는 애기입니다. 그래서 애기야라고 부르면 내가 왜 애기야라며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제가 자기들을 애기처럼 대해주는 것을 싫어합니다. 컸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에 맞게 중학생에 맞게 대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빠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아이가 자라면서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저는 점점 다른 아버지가 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70이 돼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다고. 10살 때 아버지를 압니다. 20살 때 아버지를 압니다. 50살에 아버지를 압니다. 60살에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는 같은데 나이마다 아버지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아버지를 점점 더 길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도 예수님을 압니다. 청년들도 예수님을 압니다. 그런데 아비들이 아는 예수님은 다릅니다. 머리로만 아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귀로 들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책에서 배운 예수님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수많은 고통과 시험을 겪으면서 가슴으로 삶으로 체험한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현장에서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으로 만난 예수님입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예수님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모습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였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 셋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뛰어나가 셋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가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18:8).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사자를 여행하는 나그네로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24년이 됐습니다. 하지만 본토인들에게는 여전히 나그네였습니다. 나그네였던 아브라함은 나그네와 같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형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속에서 깊은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씨름하는 천사를 만났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불같은 시험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납니다. 떨기나무는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늘 보던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입니다. 손에 칼이 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여호수아를 맞이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에게 나는 지금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와 같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아비가 되면 아비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비가 되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들을 돌보는 영적 아비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죄인들, 낙심한 영혼들, 길을 잃은 영혼들, 연약한 영혼들을 돌보는 영적 아비가 많은 교회는 복된 교회입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교회는 더욱 견고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아비는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스승이 필요합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노래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아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이십니까? 아니면 투정부리고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는 어린 아이십니까? 사고치고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십니까? 무언가 하나님의 일을 책임지고 있는 영적인 세대주이십니까? 아니면 아무런 책임이 없는 어린 아이입니까? 아비가 있는 교회에 다니는 자들은 복된 성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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