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세상 끝의 징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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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24:6, 눅 21:9
주일오전예배 | 2020-05-17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임환영 씨는 아리랑 역사와 한국어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꿩은 빼먹음, 멍청함이라는 뜻에서 온 말로 멍청한 짓을 하는 것또는 멍청한 새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꿩은 나는 것 보다 종종 걸음으로 뛰어가는 것을 잘 합니다. 날개 보다 다리가 발달했습니다. 꿩의 새끼를 꺼병이라고 합니다. 꿩의 새끼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깁니다. 다리가 발달한 것입니다. 몸은 어린데 다리만 길어 꺼벙해 보인다고 꺼병이라고 합니다. 꿩이 얼마나 꺼벙한지 쫓기다가 다급해지면 풀 섶에 머리만 박고 몸통은 밖에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머리를 박고 눈을 꼭 감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꿩은 자기가 안 보이면 상대방도 자기를 못 본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꺼벙한 새입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합니다. 꿩을 한자로 야계(野鷄)라고 합니다. 들에 사는 닭이라는 말입니다. 닭도 도망가다가 급하면 꿩처럼 머리만 어디에 처박고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닭 머리입니다.  

지난 주간에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이태원 클럽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확진자가 간호사라고 해서 여자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보도가 나왔을 때 지저분한 기사를 보고 싶지 않아 자세히 안 봤다고 했습니다. 제가 너무 모른다고 생각을 했는지 카톡으로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어떤 의사가 운영하는 유투브티비였습니다. 동영상은 우리나라 게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접속해서 음란행위를 하는지를 추적한 것입니다. 게이들의 실태를 고발한 동영상입니다. 이상한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그 의사분이 말로만 설명합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추접스러운지 몰라요. 너무 더러운 거예요. 그런데도 퀴어 축제를 나라에서 허가해주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은 신원을 밝히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이 되어 있습니다. 마음 놓고 바이러스를 옮기고 다녀도 아무런 법적인 제재가 없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세상입니까? 게다가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매월 600만원의 치료비를 나라에서 지원해줍니다. 동성연애, 에이즈는 꼭 국책육성사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제가 동영상을 보고 너무 더러워 친구에게 앞으로 이런 거 보내지마. 더러워서 못 보겠어.”라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너무 추접스러워서 모르고 사는 것이 속 편하겠더라고요. 20183월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에이즈 환자수가 11439명입니다. 그런데 알려진 환자보다 알려지지 않은 환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환자수가 2만 명이 훨씬 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안에도 최소한 수 백 명의 에이즈 환자가 있는 거예요. 천 명이 넘을 수도 있어요. 마트, 백화점, 버스, , 전철에서 우리는 수 없이 에이즈 환자와 마주쳤을 것입니다. 어쩌면 버스나 전철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에이즈 환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를 뿐입니다. 정말 끔찍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께름칙해서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속 편한 세상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꿩처럼 머리를 박고 사는 것이 아닐까? 위험이 문 앞에 이르렀는데 눈을 꼭 감고 괜찮아! 괜찮아! 안전해! 안전해!”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 모두 꿩처럼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것도 모른 체. 내가 괜찮으니까! 우리 집에 별일 없으니까! 나는 편안하니까! 별일 있겠어! 이러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세상 끝의 징조 중에 <소요>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8. 소요   

세상 끝의 또 하나의 징조는 <소요>입니다. 마태복음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있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46절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라는 말을 누가복음은 난리와 소요의 소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1:9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난리는 헬라어로 폴레모스로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소요는 헬라어로 아카타스타시아스입니다. 아카타스타시아스는 소요, 소동, 소란, 혼란, 어지러움, 불안, 불안정, 무질서, 폭동, 동요라는 뜻입니다. 아카타스타시아스는 아주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개역성경은 <소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KJV<소동>(commot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상 끝에는 소란스러운 일이 계속 생길 것입니다. 세상 끝의 징조는 소란, 소요, 무질서, 불안정입니다. 그래서 많은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이 혼란으로 사람들은 불안해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세 징조 중에 하나는 소란스러운 일로 사람들의 평안이 깨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 풍조로 동요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소란스러운 일이 생겨도 동요하지 마세요. 평안을 빼앗기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2019101일에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시민들이 실업과 식량난, 공공서비스 파탄, 부정부패 등 생활고에 항의하며 방화와 폭력으로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소요사태로 100명이 죽고 4천여 명의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지난달, 418일에는 그리스의 에게해 서부 키오스섬의 비알 난민 수용소에서 대규모 소요가 발생해 숙소를 포함한 내부시설이 불에 탔습니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이 화재로 수용소에 있던 많은 거주민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소요 사태는 17일에 47살의 한 이라크 여성이 고열로 숨지자 사람들이 코로나19일 수도 있다는 염려와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소요 사태를 불러온 것입니다. 살고 싶어 일으킨 소요 사태가 세상을 더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프랑스, 영국, 미국, 키르기스스탄, 인도네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크고 작은 소요 사태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끝에 세상은 계속 시끄러울 것입니다. 불안이 가중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동요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안정세로 들어섰지만 세계는 아직 코로나19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19 발생 이전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 코로나19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의 인식의 커다란 전환이 왔습니다. 전에는 마스크를 한 사람은 심한 질병을 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스크를 한 사람은 께름칙해서 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을 찜찜하게 생각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이 3개월째 학교를 못가고 있습니다. 학교 가기 싫어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학교를 가고 싶어 합니다. 수능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3학생들의 입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꾸 터지는 코로나19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에 새로운 기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겨울마다 코로나19가 유행한다면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준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에는 가능하면 얼굴을 보고 무엇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얼굴을 안 보고 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합니다. 코로나19로 인터넷 쇼핑이 급증했습니다. 택배회사는 배달 전에 고객님들의 안전을 위해 가능한 비대면 배달을 실시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비대면, 비접촉, 단절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입사 시험을 축구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면접을 족구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코로나19 이전에는 인터넷 예배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인터넷 예배가 무슨 예배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터넷 예배가 대중화되었습니다. 예배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한국 천주교는 236년 만에 처음으로 미사를 중단했습니다. 한국뿐 아닙니다. 불교는 1600년 만에 산문을 폐쇄했습니다. 전쟁 중에도 문을 닫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종교계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뉴 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 새로운 기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뉴 노멀은 세계최대 채권회사인 <핌코>의 최고 경영자인 모하메드 엘 에리언(새로운 부의 탄생)2009년에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2008년까지 세계 경제 기준은 고성장에 규제완화였습니다. 기업들의 관심은 지난 분기 동안 우리 회사가 얼마나 많은 성장을 했는가?’이었습니다. 가능한 많은 성장이 기업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20089월에 투자은행 Lehman Brothers가 파산하면서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가 시작됩니다. 이로 인해 경제 기준이 고성장, 규제완화에서 저성장, 규제강화로 바뀝니다. 기준이 거꾸로 된 거예요. 기업들이 성장보다는 안전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에리언은 이것을 뉴 노멀이라고 했습니다. 세계 경제가 저성장 · 저금리 · 저물가의 새로운 시대로 돌입한 것입니다. 세계 금융 위기가 종전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기준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 이후 이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말은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교육, 생활, 심지어 종교에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두루 사용됩니다. 뉴노멀 라이프, 뉴노멀 시대 그리스도인, 뉴노멀 중년, 교육 뉴노멀, 뉴노멀 뷰티 등등. 이것은 세상이 바뀌면서 사람들이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기준이 쓸모가 없어져 새로운 가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어떤 지식, 생각, 기준, 노하우들이 무용지물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사회 각 분야에 뉴 노멀, 새로운 기준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동안 지켜오던 질서, 가치, 기준, 생각이 계속 깨질 것입니다. 종전의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뉴 노멀은 계속 생겨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적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19 이전 세상이 오든 안 오든 상관없이 우리는 앞으로의 시대에 잘 적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마세요. 세상이 바뀌는 대로 잘 사세요.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결코 세상에 뒤처지지 마세요. 우리는 과거에 매여 침륜에 빠져 살면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멸망할 자가 아니요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날 자들이 아닙니다. 멸망할 자가 아닙니다.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닙니다. 세상이 흉흉해도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처럼 우리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한 가지 반드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수시로 바뀌어도 결코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지가 개벽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점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수 없이 많은 뉴 노멀이 생겨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바뀌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표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면 안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세요.   

20196월 분당에 있는 한 대형 교회 부교역자의 동성애 관한 설교가 교계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교역자는 동성애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대세는 이미 넘어갔다라고 했습니다. 이미 동성애 찬성이 대세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통과될 거니까 반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대로 가면 차별금지법은 통과될 것입니다. 미국, 캐나다, 독일 등 선진국은 이미 통과가 됐습니다. 우리나라도 시간문제입니다.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구시대적 사고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 교역자 말처럼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흐름에 성경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이 바뀌면 성경도 바뀌어야 합니까?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성경을 꿰어 맞추어야 하는 건가요? 세상은 변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없어져도 성경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세상에 성경을 맞추면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세상을 비추어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성경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를 비추어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 부교역자는 또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반대하는 게 꼰대다’, ‘퀴어 축제 반대를 사람들이 비난한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반대하지 않는다.’ 동성애 반대 하는 모임에 대학교수가 3000명입니다. 반대가 정말 비합리적인 것입니까? 이 교역자는 성경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어야 하는데 자신의 생각에 성경을 맞추고 있습니다. 목사는 세상이 무어라 말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를 말해야 합니다. 목사는 세상이 그렇다고 해도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성경까지 바꾸려하지 마세요. 성경을 마음대로 변개하지 마세요.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 다른 말을 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더하다(에피티테미)는 말이 위에 놓다’, ‘원래 있던 것 위에 무언가를 다시 세우다는 의미입니다. 더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신의 생각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신의 생각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을 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하다(아파이레오)는 말이 없애다, 잘라버리다, 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필요한 말씀만 믿어요. 자기에게 불리한 말씀은 모른 체해요. 잘라버려요. 이단들이 하는 수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를 믿는 것입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성경 맨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 끝에는 각종 뉴 노멀, 새로운 기준, 새로운 표준들이 자꾸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성경도 자기 편한 대로 꿰어 맞추며 살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바꾸려고 할 거예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성경은 변개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흔들리고 요란해도 성경은 흔들지 마십시오. 나의 생각에, 나의 행동에 성경을 맞추지 마십시오.   

이번에 코로나19로 한국 교회가 적어도 60프로는 문을 닫았습니다. 어떤 지역은 80프로 정도 문을 닫았습니다. 문을 연 교회도 적게는 50프로에서 많게는 90프로까지 예배 인원이 줄었습니다. 어떤 신문에 따르면 천안은 96프로 이상이 문을 닫았습니다. 천안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예배를 계속 드린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습니다. 저는 교회가 세상에 욕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런 때 예배를 드리면 안 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때는 교회를 안 가도 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는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예배는 교회의 심장입니다. 예배는 성도의 생명입니다.

  • <6:13>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 <2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하나님은 제단에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불을 피우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는 예배의 불이 항상 켜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오든 안 오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를 나에게 맞추지 마세요. 내가 교회에 맞추는 것이지 나에게 교회를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맞추어야지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때 왜 예배드리느냐?”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가집시다. 세상이 흔들린다고 성경을 흔들면 안 됩니다. 내 믿음이 흔들린다고 교회를 흔들면 안 됩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등대는 그대로 있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아요.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등대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어요. 왜요? 풍랑 속에서 등대를 찾는 배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교회는 교회로 두세요. 성경은 성경으로 두세요. 그리고 성경을 따라가세요. 폭풍 중에도 교회는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풍랑 중에도 교회는 세상에 은혜와 평안을 전해야 합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업을 하다가 망한 어느 부자가 친구 화가에게 찾아와 모든 것을 잃어버려 불안하고 괴로우니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평안을 상징하는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화가는 3개월에 걸쳐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삼림에 싸인 잔잔한 호수를 둥근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고요하고 평안해 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고 있는 부자의 눈에는 실망의 빛이 보였습니다. 부자는 화가에게 이 그림은 정말 평화스럽고 아름답네만 폭풍이 불면 호수의 조용함은 깨지고 둥근 달도 없어지고 물결이 칠거야. 내가 원하는 것은 광풍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평안이라네.”라고 말했습니다. 화가는 다시 구상을 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높은 절벽 나뭇가지의 새둥지에서 새끼 세 마리가 어미 새에게서 먹이를 받아먹는 그림이었습니다. 부자는 무릎을 탁치며 고맙네. 내가 원하는 평안의 상징은 이 그림으로 만족하네.”라고 말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 사람들이 원하는 평안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평안은 그림이 찢어지고 불에 타면 없어지는 평안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원하는 평안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림 속에 있는 평안입니다. 찢어지고 불에 타면 없어지는 평안함입니다. 혹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안함이 그런 평안함 아닐까요?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살전5:2-3>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숲에 머리만 박고 눈을 꼭 감고 평안해 하는 꿩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안함은 그림 속에 있는 평안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점점 끝을 향해 가는 데 자기가 쌓은 성에서 혼자 나는 집도 있고 돈도 있으니 괜찮아! 평안해! 안전해!”하며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평안함은 찢어지고 불에 타는 평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림 속에 있는 평안이 아닙니다. 찢어지고 불에 타고 없어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바람에도 불에도 없어지지 않는 평안함입니다. 세상은 끝을 향해 갈수록 점점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소란스러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안을 빼앗길 것입니다. 세상 끝의 징조, 그것은 불안정, 불안, 동요, 술렁임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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