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우스 땅에 욥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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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 1:1~5
주일오전예배 | 2020-05-1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지난 주 목요일 오후 220분이었습니다. 볼 일이 있어서 어디를 갔다가 오던 길에 어떤 아파트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화단에서 어떤 고령의 할머니가 큰일을 본 후 뒤처리를 하시고 있었습니다. 몸은 4/5쯤 일어나 계셨습니다. 노인 분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다 보였습니다. 손은 엉덩이 부분에서 마지막 처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노인 분의 엉덩이 방향으로 10m 정도에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휴지가 아니라 나뭇잎이나 풀잎 같은 것이 손에 들려져 있었습니다.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할머니의 옆모습을 보니 80세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80이 조금 넘으셨든지 아니면 조금 더 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할머니가 볼 일을 보신 곳이 아파트 현관 출입구 바로 옆입니다. 사람의 통행이 많은 도로 바로 옆입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른 아이 남녀 할 것 없이 많이 지나가고 서 있고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볼 일을 보신 거예요. 일을 처리하시는 것을 봐서는 노인 어른이 옆에 있는 사람들을 거의 신경을 안 쓰시는 것 같이 보였어요. 몸을 숨기지도 않고 일어나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으니까요. 얼마나 더럽고 추저분해요. 그런데 그 장면이 제게 전혀 추저분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하나도 더러워 보이지 않았어요. 드러난 엉덩이와 허벅지가 전혀 민망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오히려 너무 안쓰럽고 너무 애처로운 거예요. ‘얼마나 급하셨으면 저기서 저러실까? 얼마나 몸이 통제가 안 되셨으면 저러실까?’ 나이가 들면 괄약근이 약해져서 배설물이 그냥 막 흘러나오거든요. 여러분! 근처에 나이 많이 드신 노인들이 실수를 해도 주책없다고 하지 마세요. 더러워하지 마세요. 얼굴 찌푸리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 욕해도 손가락질 하지 마세요. 노망이라고 하지 마세요. 웃으세요. 괜찮다고 말하세요.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늙을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어른을 공경하세요. 노인을 이해하세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이 만큼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런 늙으신 어른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먹고 놀고 즐길 수 있는 것은 우리 부모님 세대의 눈물, , 고통,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배나 어른을 공경해야 합니다.   

욥기를 읽었습니다. 욥기는 연장자에 대한 존경 사상이 반영되어 있는 책입니다. 욥은 보기 드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극한 고난을 당합니다. 욥의 세 친구가 욥을 방문합니다. 욥과 세 친구는 고난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입니다. “의인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할까요?” 논쟁이 깊어질수록 세 사람은 욥의 논지에 조금씩 밀립니다. 세 사람의 지혜는 욥에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세 사람은 욥에게 손을 들고 맙니다. 심지어 욥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데도 합당한 말로 욥에게 권면하지 못합니다. 이때 엘리후가 나섭니다.  

  • <32:1~6>
  • 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 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 3.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엘리후는 네 사람 보다 나이가 어렸습니다. 엘리후는 네 사람이 언쟁을 벌일 때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모두 자기보다 연장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욥이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의롭게 여김에도 세 친구가 욥을 꺾지 못하자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분개하고 나섭니다. 엘리후는 연장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더 공경했습니다. 엘리후의 행동에서 욥 시대에 사람들이 연장자를 얼마나 존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연장자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 공경하는 마음은 신앙심에서 나옵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상당한 재력가들이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는 욥을 왕으로 보았습니다. 욥을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 친구 또한 왕일 것입니다. 네 사람이 왕이 아니더라도 모두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게다가 오랜 동안 열띤 논쟁을 할 만큼 높은 지혜와 지식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다섯 사람은 모두 사는 곳이 다릅니다. 대부분 이방인들인 것 같습니다. 어른 공경 사상은 지위가 높든 낮든 돈이 있든 없든 지혜자이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이방인이든 선민이든,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연장자를 공경하세요. 연장자뿐만 아니라 어린 사람도 존중하세요. 돈 있다고 배웠다고 사람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미국 버지니아의 세인트 피터 장로교회의 R.C. 스프로울 목사님이 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스프로울 목사님이 교회 청년에게 떨어진 나무를 잘라 집에서 쓸 장작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은 시간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도착해보니 전기톱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에게 보수를 지불하고 그냥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를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도구가 시원치 않은 것은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에 보수를 꼭 지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계속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자신은 부당한 사람이 된다며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며칠 후 청년과 목사님이 다시 만났습니다. 청년은 여전히 목사님이 잘 못이라고 이야기하려 했습니다. 청년은 목사님에 대해 최대한 존경심을 표하며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처럼 목사님에 대해 최대한 존경심과 품위를 갖추고 대하는 젊은이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마음이 거슬렸습니다. 그것은 청년의 말투 때문이 아니라 지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하려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청년은 어른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을 공손히 했습니다.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목사님은 논쟁을 끝내기 위한 말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나단, 어른을 공경하게.” 이 한마디로 끝이었습니다.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에 청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73-74). 미국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이야기가 아닙니다.   

엊그제는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어버이주일입니다. 왜 어버이날, 어버이 주일이 필요할까요?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어른을 가장 공경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어른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입니다. 이 말은 가장 버릇없는(싸가지 없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른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세요. 레위기19:32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백발이 성성한 어른이 들어오면 일어서고, 나이 든 어른을 보면 그를 공경하여라. 너희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나는 주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른 공경은 성경의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욥기의 주인공은 욥입니다. 그러면 욥은 어느 시대 사람일까요? 욥기에는 창세기의 족장 시대 풍습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욥을 BC 2000년 경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합니다. 욥은 가족 예배를 직접 인도했습니다. 가장이 예배를 직접 인도하는 것은 창세기의 관례입니다. 창세기 이후에는 제사장만이 제사를 인도했습니다. 욥의 부귀 정도를 금이나 은보다는 가축의 수효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족장시대의 관례입니다. 욥은 200세 정도를 산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았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가 비슷합니다. 또 욥기에는 모세오경의 법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인 족장 시대의 인물로 생각합니다. 욥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31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은 족장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명칭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욥을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인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으로 끝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지 마세요.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욥기는 누가 기록했을까요? 기록자도 누군지 모릅니다. 저자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먼저 BC 1000년 경에 솔로몬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 네 권은 지혜 문학입니다. 네 권 중 세 권을 솔로몬이 기록했습니다. 욥기가 지혜문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욥기 또한 솔로몬이 지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88편과 욥기의 사상이 일치 합니다. 그래서 시편 88편의 저자인 헤만이 욥기를 쓴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욥기는 욥기서의 주인공인 욥이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욥기의 기록자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욥기의 저자를 욥으로 보는 것이 제일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복잡해져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록자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베일에 가려놓으셨기 때문에요.   

독도는 대한민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섬입니다. 그래도 독도는 분명한 대한민국 영토입니다. 독도에는 우리 민족의 꿈과 혼이 서려 있습니다. 욥기는 성경에서 본토와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 섬과 같은 책입니다. 그러면서도 구약 성경 한 중앙에 박혀있는 보석과 같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스토리가 쭉 이어져 있습니다. 기록한 사람도, 기록한 장소, 기록한 시간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마치 하나의 책처럼 스토리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모두 연속성이 있는 책들입니다. 마치 연재소설처럼 계속해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욥기는 다른 어떤 성경과도 스토리의 연결점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 19: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욥기는 BC 2000년 전에 부활 신앙을 아주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욥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인물들은 모두 쭉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성경은 계속해서 족보를 기록합니다. 조상과 후손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갑니다. 마치 바통 터치를 하듯 인물들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 어느 누구와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욥은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본토에 있는 성도들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더 탁월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욥기와 이 책의 주인공 욥은 성도들의 가슴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떠 있습니다. 특히 현실의 삶에서 큰 고난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넘치는 위로와 소망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 같은 책이 욥기이고 정말 아이러니 같은 인물이 욥입니다. 욥은 외딴 섬 독도와 같은 신앙의 오지에서 어떻게 신앙의 정수를 유지했을까요? 참으로 신앙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비입니다.   

BC 9세기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BC 873 ~ 851)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바알 종교가 극히 부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바알을 섬겼습니다. 여왕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엘리야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까지 죽이려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해 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 이것은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숨어 있느냐? 갈멜산에서 8501로 싸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끝장낸 용기는 어디 있니? 너는 여기 숨어 있을 사람이 아니야. 너는 할 일이 있어.”라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을 다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오직 저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저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000명을 남기겠다. 그들은 모두 바알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입도 맞추지 않는 사람들이다.” 엘리야는 자신만 남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7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영적 기근 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도 않고 입도 맞추지 않은 순수했던 신앙인들 7천 명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신앙은 참 신비입니다.   

이 시대가 영적인 기근 시대 아닙니까? 적당하게 신앙생활하고 적당하게 예수님 믿어야 잘 하는 것 같은 시대 아닙니까? 신앙생활 깊이 하면 광신도라고 하는 때입니다. “뭘 그렇게까지 해?”, “너무 완고한 것 아냐?”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해야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말하는 때입니다. 하지만 그거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문화생활입니다. 그러려면 교회 오지 마세요. 그러려면 예수님 믿지 마세요. 다른 사람까지 지옥가요. 세상에 무릎 꿇지 마세요. 세상에 입 맞추지 마세요. 신앙생활하려면 정말 제대로 하세요. “하나님! 다 죽고 나만 남았습니다. 이제 나도 죽겠습니다.” 엘리야가 정말 죽을 지경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산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믿음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신앙 때문에 죽을 지경인가요? 이 시대에 세상이라는 바알에 무릎 꿇지 않는 순수한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욥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1절 상반절) 욥은 우스 사람입니다. 우스는 어디일까요? 어디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 곳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있는 바산입니다. 둘째는 사해의 남동쪽에 있는 에돔입니다. 세 번째는 아라비아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릅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 지역이 모두 이방이라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욥은 좌를 봐도 우를 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지역에서 혼자 신앙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그 신앙은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온전했습니다. 온전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탐입니다. 탐은 완전한, 온전한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전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온전하지도 온전할 수도 없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욥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사모한다는 의미입니다. 욥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온전해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애를 써도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온전해지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발버둥 쳐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해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적당히 신앙생활합니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내가 있었습니다. 내 중간에 댐이 있었습니다. 댐 한쪽의 높이가 낮아 그쪽으로 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물의 흐름은 끊겨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불어 댐 위로 물이 쏟아집니다. 그러면 물고기들이 댐 밑 물이 떨어지는 곳에서 댐 위로 올라가려고 점프를 합니다. 계속 점프를 합니다. 비가 올 때마다 점프를 합니다. 하지만 단 한 마리도 댐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비만 오면 물고기들이 계속 뛰어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불량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몸부림쳐도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온전함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욥의 온전함입니다.   

둘째, 정직했습니다. 정직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야솨르입니다. 야솨르는 곧다, 바르다는 뜻입니다. 정직하다는 말은 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일직선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곧은 길을 간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길을 간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나와 하나님이 일직선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곧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아무 길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돈이 많다’, ‘출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입니다. 인생길을 갈지자로 가지 마세요. 너무 쉽게 구부러지지 마세요. 너무 쉽게 휘어지지 마세요. 한 번쯤 버티다가 부러져 봐야 되는 거 아닌가요? 이게 믿음 아닌가요?   

셋째,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경외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경외 신앙은 참 크리스천의 표준입니다. 참 신앙인일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거짓 신앙인일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겼습니다. 세상을 보세요. 세상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악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사람은 무서운 것을 멀리 합니다. 무서운 것을 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가까이 하고 싶은 두려움입니다. 끌리는 두려움입니다. 신비로운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악에서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멀리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악이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우십니까? 두려우시면 하나님 가까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두려우세요? 그러면 악이 가까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세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두려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멀리 할 수 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이 말씀은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참 놀랍다.”라는 의미입니다. 왜 놀라울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방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욥과 같은 신앙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천안 땅에 누구누구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정말 훌륭한 성도였다.” 반대로 이런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등대교회에 누구라 불리는 성도가 있었는데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었다.” 욥은 이방 우스 땅에서 하나님을 순전히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의 신앙은 집에서도 빛이 났습니다. 욥에게는 73, 10남매가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생일이 되면 형제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잔치를 했습니다. 정말 화목한 가정입니다. 부러운 가정입니다. 욥의 가정은 화목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다 있는 집이었습니다. 양이 칠천, 낙타가 3, 소가 1, 암나귀가 500마리였습니다. 수나귀도 있었을 것입니다. 종도 많았습니다. 욥은 명예와 권세도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은 가장 큰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가장 부자였고 인품도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욥은 한 마디로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이만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만하면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질도 명예도 다 있습니다. 자녀들 행복하고 잘 삽니다. 건강합니다. 다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욥은 가정이 화목한 것, 물질이 풍부한 것, 잘 사는 것, 세상의 높은 명예로 만족해하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믿음에 있었습니다. 욥은 가정을 위해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예배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잔치가 끝나면 자녀들을 성결하게 했습니다. 성결하게 하다는 말은 구별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시 자녀들이 마음으로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세상과 섞입니다. 놀고먹다 보면 죄와 섞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기도로 우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번제는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태워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계속 우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욥은 가정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나에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와 /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 승리에 겸손한 온유한 자녀를 주옵소서 . 우리는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잘 살도록, 건강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지난주는 어린이 주일이었고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항상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특별히 가정의 달을 맞아 특별히 더 기도합시다.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했다고 했습니다. 욥은 한 번 두 번 하다가 만 것이 아닙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신앙생활은 항상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 두 번 하다가 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수 없이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아니 질리도록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신앙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갑시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만 쓰세요. 신앙생활할 때는 포기를 쓰지 마세요. 그래서 우스 땅 같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이 악한 시대에 욥처럼 온전한 신앙인이 됩시다. "천안 땅에 아무개가 있었더라", "등대교회에 아무개가 있었더라" 이런 말을 듣는 신앙인이 됩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맨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겐그레아 교회에 우리의 자매 뵈뵈가 있었다.”(1) “아시아에 에배네도가 있었다.”(5) “마리아, 안드로니고, 유니아, 암블리아 가 있었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때입니다. 죽임을 당하던 때입니다. 그때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정직이라는 말을 개역 성경은 순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없는 이방 땅에 살면서 믿음을 순전하게 지켰습니다. 얼마나 순전했는지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믿음을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등대교회에, 천안 땅에 이 시대에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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