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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2일 경주에서 리히터 규모 5.1(오후7:44), 5.8(오후8:32) 지진이 연속해서 일어났습니다. 1978년 우리나라에 지진관측소가 생긴 이후에 측정된 최대 규모의 지진입니다. 이후 열흘 동안 400번의 여진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40번씩 땅이 흔들렸습니다. 한 시간에 두 번 정도 흔들린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지진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집이 조금만 흔들려도 무서웠습니다. 자다가 진동을 느끼고 잠을 깨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지진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버스가 부릉부릉 출발하는 소리만 내도 ‘또 지진인가?’하며 놀랐습니다. 경주 시민들은 지진으로 아주 심하게 떨었습니다. 이것을 지진포비아라고 합니다. 포비아(phobia)는 공포라는 뜻입니다. 지진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정말 무서울 것 같습니다. 포비아는 헬라어 포보스에서 온 말입니다. 포보스는 공포, 두려움, 놀람, 경악이라는 뜻입니다.
콜 포비아도 있습니다. 전화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로만 주고받지 음성 통화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전화 벨소리가 나면 무서워요. 전화공포입니다. 화학포비아도 있습니다. 살균제, 치약, 화장품 등 화학제품을 쓰는 게 무서워요. 모두 신조어입니다. 폐소공포(엘리베이터 포비아), 광장공포, 동물공포(고양이 포비아), 암흑공포, 죽음공포, 시체공포, 혈액공포, 지진공포 등등의 말을 사용합니다. 전에는 쓰지 않던 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포라는 말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별거 아닌 것에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넓은 광장이 왜 무섭습니까? 가슴이 탁 뜨여 좋지요. 그런데 무서운 거예요. 아무런 일 없이 방에 있는데 왜 무섭습니까? 사회는 더 좋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포비아 신드롬이 생기고 있습니다. 세상이 공포에 갇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포에 갇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도 만나지도 않고 집에만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4장, 마가복음13장, 그리고 누가복음21장은 예수님의 종말론 설교입니다. 세 장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기록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을 같이 보며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있을 징조 다섯 가지 - ①많은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②전쟁, ③기근, ④지진, ⑤전염병 - 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를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24장 7절에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누가복음 21:11에는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기근과 지진까지만 언급했는데 누가는 전염병과 무서운 일 그리고 하늘의 큰 징조들 세 가지를 더 언급했습니다. 전염병, 무서운 일 그리고 하늘의 큰 징조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징조입니다. 오늘은 무서운 일과 하늘에 있을 큰 징조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6. 무서운 일
먼저 ‘무서운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서운 일이 무엇일까요? ‘무서운 일’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포베트라입니다. 포베트라와 포보스는 같은 어원에서 왔습니다. 포보스는 전쟁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포보스는 고대인들 전쟁 때 적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쓰는 기괴하고 요사스럽게 만든 가면이나 장신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 전쟁은 대부분 육탄전입니다. 적과 근접해서 싸웠습니다. 그때 적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무서운 가면을 쓰고 싸웠습니다. 이때 쓰는 가면을 포보스라고 했습니다. 또 그리스 신화에 포보스라는 공포의 신이 있었습니다. 포보스는 전쟁의 신인 아레스의 아들입니다. 아레스는 전쟁에 나갈 때 포보스와 또 다른 아들 데이모스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포보스는 적에게 공포심을 주었고 데이모스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포보스는 전쟁의 신, 공포의 신입니다. 공포(포보스), 무서운 일(포베트라)은 전쟁과 관련된 말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이미 앞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무서운 일>을 테러로 보았습니다. NASB, RSV, ASV는 ‘무서운 일’을 ‘테러’(terrors)로 번역을 했습니다. 실제로 세계는 지금 테러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구 분 | 2010년 | 2011년 | 2013년 | 2014년 |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 2019년 |
건 수 | 2,937건 | 3,542건 | 4,096건 | 3,736건 | 2,255건 | 1,533건 | 1,978건 | 2,079건 | 1,614건 |
사망자수 | 10,250명 | 8,803명 | 11,889명 | 15,909명 | 17,329명 | 8,356명 | 8,299명 | 7,916명 | 8,025명 |
우리나라는 그래도 안전합니다. 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수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폭탄을 터트립니다. 비행기를 납치하고 차량을 탈취(하이재킹) 합니다. 불을 지릅니다. 사람들을 암살하거나 납치, 감금합니다. 국제사회가 테러 근절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극단적인 테러단체들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도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건의 테러가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2002년 발리 섬 나이트클럽 2곳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습니다. 이 테러로 202명이 죽고 209명이 다쳤습니다. 2005년 7월 7일 런던에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테러를 7.7 테러라고 부릅니다. 56명이 죽고 700여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7월 21일에도 런던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지만 실패했습니다. 2008년 5월 14일 인도 자이뿌르에서 연쇄폭탄테러가 있었습니다. 9번에 걸쳐 자이뿌르 내의 성곽을 따라 폭탄이 연속으로 터졌습니다. 이로 인해 85명이 죽고 200여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2017년 5월 31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트럭을 이용한 자폭테러가 있었습니다. 90명이 죽고 380명이 다쳤습니다. 폭탄이 터진 자리는 깊이 4미터의 구덩이가 생겼습니다. 땅이 얼마나 흔들렸는지 사람들은 지진이 난 줄 알았다고 합니다. 1.6킬로 떨어진 집의 창문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7-900미터 떨어진 한국대사관도 파괴되었습니다. 어제도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건의 테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서운 일이 무엇일까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원적으로 볼 때는 테러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서운 일이 테러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늘, 바다, 땅, 생태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에 이상하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우리를 불안하고 두렵게 합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 아닐까요? 인종차별 하지 말아야죠. 장애인 차별하지 말아야죠. 그런데 문제는 차별금지법에 끼어있는 독소 조항입니다. 그것은 동성애 합법화입니다. 동성애가 합법화된다면 남녀표시가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유럽은 남녀가 화장실을 같이 씁니다. 노르웨이 군대는 남녀가 같은 룸에서 잡니다. 목욕탕을 같이 쓰는 나라도 있습니다. 남자 며느리가 들어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사위가 여자라면 어떨까요? 캐나다에서는 동성애 선생님들이 유치원 아이들을 앉혀놓고 왜 동성애가 좋은 것인지 그림을 보여주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차별금지법에는 사탄의 음모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연애 때문에 망했습니다.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고대 도시 ‘폼페이’에 동성연애가 즐비했던 것을 아십니까? 우리 사회는 사탄의 음모로 침몰하고 있습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정상이 비정상이 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 아닌가요? 정의가 불법이 되고 불법이 정의가 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 아닌가요? 지금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 불안합니다. 걱정스럽습니다. 사탄의 음모가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불안, 염려, 두려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회 현상이니 그냥 무서워하며 살아야 할까요? 말세의 현상이니 어쩔 수 없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공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두려움입니다. 나쁜 두려움은 더러운 두려움입니다. 나쁜 두려움은 불쾌한 두려움입니다. 나쁜 두려움은 해로운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 나쁜 두려움은 죄 때문에 생깁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께 추방당할 때 가인은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 것이라며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창4:14). 공포는 죄 때문에 생깁니다. 그런데 공포는 또 다른 공포를 낳습니다. 잠언28:1에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에 빠진 사람은 혼자 도망갑니다. 죄는 우리를 불안과 초조 공포 속에 살게 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바로 볼 수 없게 합니다. 12제자들이 한 밤 중에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제자들에게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유령이었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마을사제에게 돌림병으로 200명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을사제는 죽음의 사자와 담판을 지어 사망자의 수를 100명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돌림병이 지나가고 난 후에 살펴보니 마을 주민이 700명이 죽었습니다. 마을 사제는 죽음의 사자에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사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100명밖에 죽이지 않았어, 나머지 600명은 염려로 죽은 거야” 염려, 근심, 걱정이 모두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해칩니다. 우리는 포비아에 갇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나쁜 포비아를 극복해야 합니다. 나쁜 포비아는 좋은 포비아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좋은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깨끗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유익한 두려움입니다. 유쾌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을 다른 말로 경외라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만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나쁜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시편 56:11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사회 포비아 신드롬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테러인 911 테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2001년 9월 11일에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이 파괴되었습니다. 쌍둥이 빌딩은 110층으로 높이는 각각 417m, 415m입니다. 그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습니다. 각 건물에 97개의 엘리베이터와 21800개의 창이 있습니다. 층마다 4000m2의 임대공간이 있습니다. 로비, 복도, 그 외의 부속 시설까지 하면 어마어마한 넓이입니다. 이 테러로 2996명이 죽고 최소 6,261명의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소방관 343명, 경찰관 23명, 항만경찰 37명, 사설 EMT(응급구조사) 8명, 화재순찰관 1명, 모두 합해 무려 412명이 순직했습니다. 석면과 같은 유독성 분진으로 인한 암 발생자가 5771명이 생겼습니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해서 건강이 나빠진 사람은 무려 7만 5천여 명이나 됩니다. 미국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미국 항공에 떠 있는 4000여대의 항공기가 가까운 공항에 모두 불시착해야 했습니다. 미국 항공에 한동안 비행기가 날아다니지 못했습니다. 이 테러로 미국 사회는 한 순간에 패닉에 빠집니다. 그런데 패닉에 빠진 사람들을 치료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군가가 무너진 쌍둥이 빌딩 자리에 건물 잔해로 세운 철근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이 이 철근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철근 십자가를 보면서 마음이 회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십자가 밑에서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치료하는 치료제입니다. 세상이 끝으로 갈수록 무서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무서운 일을 십자가로 이깁시다. 믿음 약해지지 맙시다.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나쁜 포비아를 좋은 포비아로 이깁시다. 두려움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7. 하늘의 징조
예수님은 세상 끝에 하늘에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21: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징조(세메이온)는 ‘신호를 보내다, 가리키다, 지시하다’는 의미입니다. 징조는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세상 끝에 하늘에 어떤 신호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신호일까요?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신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에 신호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신호는 틀림없이 해와 달과 별을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해, 달, 별은 하나님의 징조(오트)를 위해서 창조하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태초에 하나님이 해, 달, 별을 창조하신 목적은 계절, 년, 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징조를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해, 달, 별을 보고 계절, 년, 월, 일, 시간을 합니다. 그런데 해, 달, 별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년, 월, 일,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해, 달, 별을 창조하신 첫 번째 목적이 하나님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징조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해, 달, 별이 있는 첫 번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징조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해, 달, 별을 통해 하나님의 징조를 분별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있을 때 하늘에 징조가 있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아홉 번째가 삼일 흑암입니다. 삼일 동안 해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싸울 때 태양은 기브온 위에, 달은 아얄론 골짜기에 하루 종일 머물렀습니다(수 10:12,13). 해와 달이 멈추었다는 말은 별들도 멈추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을 고침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해가 뒤로 10도 물러나는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왕하 20:11). 해만 뒤로 10도 물러난 것이 아닙니다. 달과 별들도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엘2:31). 구약 시대에 어떤 사건이 있을 때 하늘에 징조가 있었다면 세상 끝에도 하늘에 징조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 징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의 징조를 분별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Four blood moons이란 것이 있습니다. Four blood moons 2014년과 2015년 2년에 걸쳐 4번에 개기 일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동일하게 달빛 핏빛처럼 붉었습니다. 그런데 개기일식 날짜가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의 유월절(Passover)과 장막절(Sukkot) 절기였습니다. 네 번의 개기 일식 중간에 일식이 한 번 더 있었는데 그 날이 니산월 1일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달력으로는 3월 20일입니다. Four blood moons은 나사에서도 확인이 된 사항입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어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사람들이 붉은 달을 찍어서 올려놓은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이 Four blood moons, 핏빛처럼 빨간 달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징조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호주 천문학자 리처드 블리세 박사는 태양의 온도가 6,000도였는데 최근 수년간 5,200도로 식어졌다고 합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해와 달에 변화가 있습니다. 또 별들의 특별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이 해, 달, 별의 움직임에 대해 많은 발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교회에서 점성술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보여주면 요즘 교인들은 목사를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요즘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종말론 설교를 하는 것이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종말론 설교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습니다. 3년 전 1월 첫째 주에 요한계시록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 중에 한 가족이 일어나서 나가는 거예요. 그때부터 요한계시록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뉴스를 보세요. 신문을 보세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성경입니다. 신문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아요. 세상 풍설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아요. 말씀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따라서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적게는 수개월에서 많게는 수년에 걸쳐 별을 따라 왔을 것입니다. 참 신비하지 않습니까? 하늘의 별을 보고 예수님의 나심을 알았다는 것이요. 또 별을 따라서 예수님을 찾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찾아본 것이 성경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간 것은 말씀을 따라간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갈 때 하늘에 별이 다시 나타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따라서 왔지만 별이 예수님에게로 끝까지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결론은 말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씨가 궂겠다고 한다. 너희가 하늘을 보고 날씨를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모르느냐?”고 하셨습니다. 시대의 표적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시대를 분별하시는 크리스천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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