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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시편 3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쫓아올 때 도망가면서 지은 시입니다. 1절 앞에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압살롬에게 전세가 기울자 다윗의 편에 있던 사람들이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친구들과 백성들도 돌아서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다윗은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아주 큰 상처를 입습니다. 고통과 수치스러움 때문에 두 뺨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이 눈물은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향한 애통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간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누가 봐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할 만큼 아주 비참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처참한 상황에 빠졌다면 정말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이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비참한 상황에 빠지면 버림받은 것일까?
1절과 2절에 ‘대적’이라는 말이 각각 한번 씩 나옵니다. 1절 후반부에 나를 ‘치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도 히브리 성경에서는 ‘대적’이란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적이라는 말이 1-2절에 세 번 나오는 셈입니다. 또 ‘많다’라는 말도 세 번 나옵니다. ‘대적’이라는 말이 나올 때 마다 ‘많다’라는 말이 한 번씩 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원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윗은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 지요”라며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원수들이 다윗을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은 전쟁에서 승리를 말합니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전쟁에 패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소년일 때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면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공동번역 성경은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라고 번역 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최고의 수치스러운 욕이었습니다.
사실 지금 다윗의 모습만으로는 정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할 만큼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이 많았습니다. 큰 아들이 이복 여동생을 겁탈했습니다. 여동생이 이런 일을 당하자 오빠는 그 형을 암살했습니다. 그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줬더니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다윗이 지난날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 한 것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너무 부끄러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삼하15:30). 머리를 가렸다는 말은 왕의 명예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집안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너무나 망신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할 만큼 아주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 역사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150개의 시편 중 절반 이상이 다윗이 쓴 시입니다. 하나 같이 다윗의 믿음이 빛나는 작품들입니다. 신하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말이 맞는 것입니다. 버림받지 않았다면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당한다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은 원수들에게 최고의 치욕스러운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섬겼는데 너 지금 이 꼴을 보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았구나!” 이런 말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목회자들에게 가장 심한 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받지 말고 목회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도 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받지 말고 목회하라는 말은 하나님께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충성하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입니다. 교인들에게도 심한 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믿다가 지옥에 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으라는 저주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신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목사, 하나님께 버림받은 교회 얼마나 비참합니까?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얼마나 철저하게 섬겼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욥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했습니다. 성경은 욥을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큰 자라는 말은 돈만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 인격, 권세, 명예, 재물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욥에게 온갖 어려움이 닥칩니다. 하루아침에 5남 3녀가 죽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하루아침에 날아갑니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악창이라는 질병에 걸립니다. 욥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해졌습니다.
친한 친구 세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보니 욥의 모습이 말이 아닙니다. 너무 기가 막혀 일주일 동안 한 한 마디 말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다면 이럴 수 없다는 것이 욥의 세 친구들의 결론입니다. 아내는 아주 노골적으로 대놓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우리말로 죽으라고 번역되었지만 상황을 볼 때 “뒈져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욕입니다. 욥은 그 욕을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먹고 있습니다. 아내까지 지금 최고의 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버림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나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겠지만 그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친한 친구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저에게 어느 날 대뜸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하나님이 나를 쓰시지 않는다고 하시네.” 제가 깜짝 놀라서 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러셨어?” 그랬더니 “하나님이 쓰실 거 같으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지!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더니 아무 말씀 안하시네, 그러니까 나를 안 쓰지는 거 맞지! 나를 버리신 거 같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할 만큼 비참하고 답답한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버림받은 것일까요? 다윗은 버림받은 것일까요? 이런 처참한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비참한 지경에 이를지라도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불평 원망하지 맙시다. 다윗이 회복된 것처럼 우리도 회복됩니다. 우리는 결코 버림받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 3번 셀라
시편을 읽다보면 셀라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71편). 이 셀라에는 모두 괄호 ( )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이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셀라를 읽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괄호)는 하박국서에도 세 번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셀라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사야서에는 셀라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두 번째로 사람 이름이나 지명 말고 시편과 하박국 나오는 셀라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아주 처참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할 만큼 아주 비참한 상황입니다. 나라는 아들에게 빼앗기고 인생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가슴에 깊이 못이 박혔습니다. 위로를 받아도 부족한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손가락질까지 했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떨구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상황은 딱 버림받은 모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할 만큼 큰 환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망 불평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없다고 하소연해야 할까요? 보통 우리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렸습니다. 셀라라라는 말이 2절 끝에 있습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람들의 조롱 다음에 셀라가 나오고 있습니다. 셀라는 “들어 올리다, 높이다, 찬양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람들에게 조롱하는 중이나 조롱을 당한 다음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조롱할 때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사람들이 조롱을 하면 그 사람들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사람의 말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 찬양이 3절입니다.
<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다윗은 너무 부끄러워서 창피해서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드린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요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입니다.” 지금 다윗은 도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방패라고 하십니다. 지금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명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머리를 다시 드신다는 것입니다. 명예를 다시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조롱하는데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런 신앙이 어디서 나올까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에서 나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이 도망갈 때의 일입니다. 제사장 사독이 언약궤를 매고 다윗을 따라왔습니다. 그때 다윗이 사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성안으로 들여놓아라. 여호와 앞에 내가 은혜를 입었다면 그분이 나를 돌아오게 하시고 언약궤와 그분이 계시는 곳을 다시 보여 주실 것이다.”(삼하15:25, 우리말성경) 지금은 도망가지만 나는 다시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 믿음 가집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런데 이 셀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셀라’라는 말은 “살라”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살라’라는 말은 “멈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셀라는 “멈춤, 중지, 또는 억제”를 의미합니다. 노래 중에 잠시 멈추는 음악부호와 같습니다. 찬송 중에 간주를 위하여 시를 노래하는 것을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또 조용한 묵상을 위하여 노래와 악기 연주를 멈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악연주회를 가면 모든 악기가 멈출 때가 있습니다. 지휘자도 멈춰 있습니다. 셀라는 바로 그럴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셀라는 휴지부입니다. 셀라가 나오면 읽지 않고 그 의미를 천천히 마음에 새기면서 잠간 쉬는 것입니다. 셀라에는 모두 괄호가 있습니다. 읽지 마세요. 셀라는 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당하는 고난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했습니다. 그 결정은 찬양입니다. ‘지금 고난이 왔다. 어떻게 할까? 원망할까? 아니다. 나는 회복된다.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렇다면 찬양하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자. 이것이 셀라입니다.
시편 3편 긴 시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셀라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2절 끝에 한번, 4절 끝에 한번 그리고 시 끝에 한번 나옵니다.
첫 번째 셀라는 다윗이 버림받은 상황에서 나오는 휴지부입니다. 원수들이 일어나서 다윗을 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셀라)하고 있습니다. 잠시 멈춘 것입니다.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그런데 멈춘 것입니다. 왜 멈추었을까요? 원수들의 말을 마음에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이 맞는지 저주스러운 원수들의 말이 맞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들의 모욕스러운 말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상처를 아주 많이 입습니다. 그것 때문에 병도 생기고 어떤 때는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때는 사람들이 원수들의 말을 너무나 잘 듣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세요.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들어야 할 사람의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원수들은 말 그대로 원수입니다. 그들은 있는 말 없는 말 다 만들어냅니다. 온갖 악한 말을 다 합니다. 그래서 힘들 때는 원수의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삶에서 어려움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다윗이 지금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셀라)예요. 잠간 멈춤입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주변에서 원수가 있습니다. 원수들이 꾸며내는 말을 듣지 마세요. 그것은 독약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세요. 거기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셀라입니다.
또 4절이 끝나면서 셀라가 나옵니다. 두 번째 셀라는 기도 후에 나오는 “셀라”입니다. 다윗의 3절과 4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다윗은 기도를 한 후에 잠시 멈추었습니다. 왜요? 묵상하는 거예요. 시인은 기도 후에 하나님이 무어라 말씀하시나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4절 끝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그런 다음에 셀라입니다. 기도를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세밀한 음성을 들으세요. 그냥 가지 마세요. 기도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지 마세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무어라 말씀하시는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음성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 후에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 셀라는 8절 끝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시를 마칠 때는 굳이 셀라가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시가 끝나니까 쉬면됩니다. 그래서 끝에는 굳이 휴지부, 셀라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지막에도 휴지부를 갖고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잠시 시간을 두고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서두르지 마세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세요. 급하고 바쁘다고 우왕좌왕하지 마세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어떡해? 어떡해?”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기다리세요.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세요.
강소천 씨의 <닭>이란 동시의 내용입니다. 닭이 목이 아무리 말라도 물에 입을 박고 있으면 물이 절대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닭의 목은 고개를 들어야 물이 넘어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닭이 정말 물 한 모금 머금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다시 한 모금 머금고 구름 한번 쳐다보겠어요. 닭의 모습에 시인의 마음을 투영시킨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삶에서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려는 시인의 마음을 적은 것입니다. <닭>은 1937년 일제 치하에서 발표한 시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답답하고 원통한 상황에서 강소천 씨는 우리 국민들에게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의 소망과 여유를 잃지 말자고 외친 것이 아닐까요?
셀라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윗은 급박한 상황에서 닭이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을 쳐다보듯이 하나님의 은혜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도망가야 할 급박한 상황 속에서 기도 한 모금 입에 물고 저 위에 계신 분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휙휙 지나갑니다. 스피드 시대입니다. 느리면 쳐지는 시대입니다. KTX로 전국이 90분 생활권이라고 합니다. 느리면 욕을 먹고 눈총을 받는 시대입니다. “그것도 하나 빨리 처리하지 못하느냐?”고 말을 들어야 합니다. 빠른 것이 미덕인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셀라입니다. 아무리 정신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잠시 멈춥시다.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흘러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읍시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들 때 닭처럼 하늘을 한번 쳐다봅시다. 그리고 다윗처럼 하늘을 쳐다보며 셀라 합시다. 다윗은 급박한 상황에서 셀라 셀라 셀라 세 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바로 셀라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사가 바쁘지만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냥 가지 마세요. 셀라 하고 가세요. 우리가 기도합니다. 기도가 셀라입니다. 찬송합니다. 찬송이 바로 셀라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셀라 셀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지휘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잠시 멈출 수 있는 믿음과 여유를 가집시다. 바쁠수록 하나님을 바라보며 셀라하셔야 합니다.
3.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
다윗이 삶의 셀라 - 휴지부를 가지면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원수들은 남의 아내(밧세바)를 범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조롱했습니다. 어쩌면 너무 처참해서 측근들도 다윗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인생의 지휘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4절에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올립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두 번째 셀라 한 후에 5절로 넘어가는데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전쟁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죽음과 패배를 뜻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평안히 자고 일어났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단잠을 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있다는 증거이었습니다. 밤사이에 너무나 많은 위험에 둘러싸여 두려움으로 몸서리쳤습니다. 어디서 원수가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했습니다. 이 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지 초조했습니다. 하지만 그 캄캄한 밤에 다윗은 안전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침에 뜨는 태양을 맞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생기를 살아있는 호흡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호흡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었다면 나는 지금 호흡할 수 없습니다. 평안 자고 깨는 것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127:2에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다윗은 이렇게 이어서 노래합니다.
여러분! 지난밤에 잠을 잘 주무시고 나오셨죠? 제가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틀림없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죽지 않고 여기 나오신 것입니다. 이 복이 항상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다윗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들읍시다. 그 메시지는 세 번 셀라입니다. 세 번 멈추는 것입니다. 세 번 하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도 때로 잠시 멈춥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닭이 물 한 모금 머금듯이 우리는 하나님 은혜를 한 모금 적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봅시다. 찬송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 말씀하시는지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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