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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척추동물 중에 가장 오래 사는 동물이 거북입니다. 거북은 수백 년을 삽니다. 거북이가 천년을 살면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천 살이 된 거북을 신귀라고 부릅니다. 신귀는 신기하고 영묘한 거북이라는 뜻입니다. 만년을 살면 영귀라고 합니다. 영귀는 신령스러운 거북이라는 뜻입니다. 신귀나 영귀는 오래 산 거북에게 주어지는 아주 특별한 칭호입니다. 그러면 거북은 왜 오래 살까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먼저 거북이 느리기 때문에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먹는 것도 느립니다. 심지어 신진대사도 느립니다. 천천히 움직이면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빨리 움직일수록 에너지 소비가 많고 몸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천천히 움직일수록 몸에 좋다는 것입니다. 거북이 오래 사는 것은 천천히 살기 때문이랍니다. 또 거북이 오래 사는 이유는 호흡을 천천히 하기 때문이랍니다. 거북은 호흡을 10초에 한 번 합니다. 1분에 6번입니다. 거북의 느린 호흡은 체내의 안정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고양이와 개는 1분당 150번 뜁니다. 고양이와 개는 15년 삽니다. 생쥐는 1분 동안 심장이 600번 뜁니다. 생쥐는 5년 삽니다. 심박수가 많을수록 빨리 죽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거북이 오래 사는 이유를 무거운 등딱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북이 무거운 등껍데기를 지고 평생 살기 때문에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등딱지가 몸을 항상 긴장시켜 주고 운동을 계속하게 한답니다. 등껍데기가 맹수로부터 지켜줍니다. 등껍데기가 여러 가지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줍니다. 거북이가 오래 사는 이유는 무거운 등딱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수백 년, 오천 년, 만 년이 아닙니다. 영원입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거북 등딱지처럼 죽을 때까지 지고 살아야 합니다. 벗으면 안 됩니다. 이 십자가 등딱지가 나를 마귀로부터 지켜줍니다. 십자가가 나를 죄로부터 지켜줍니다. 십자가가 세상 유혹에서 나를 보호합니다. 십자가가 나를 세상에서 이기게 합니다. 십자가가 무겁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벗으려고 합니다. 아예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세요.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목사는 목사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도 목사에게도 성도에게도 십자가가 없습니다. 싫으면 막 벗어 던집니다. 발로 차버립니다. 요즘 교회는 목사나 성도나 막나갑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해 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으세요? 없으면 회개하세요. 십자가를 평생 지고 가는 거북 성도가 되세요.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최고의 찬사가 무엇일까요? “축 부활” 이런 것이 최고의 찬사일까요? 오천 년, 만 년도 아닌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신 예수님께 최고의 찬사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도마의 행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도마는 히브리어(타옴)로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도마의 헬라식 이름은 디두모(쌍둥이)입니다. 마태 • 마가 • 누가복음에는 사도 도마의 이름이 12제자를 소개할 때만 딱 한 번씩 나옵니다. 도마의 행적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디두모’란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도마를 네 번이나 언급합니다. 디두모라는 이름도 세 번이나 나옵니다. 요한은 왜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전혀 기록하지 않는 도마의 이름과 행적을 네 번이나 기록했을까요? 요한이 도마와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기 때문일까요? 틀림없이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입니다. 사적인 감정에 따라 사사로이 써진 책이 아닙니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다른 성경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도마의 행적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영적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도마하면 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의심입니다. 그러면 도마는 의심만 많은 사람이었을까요? 이 시간 도마의 행적을 살펴보며 성령께서 도마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도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4절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인생을 걸었습니다. 집을 떠나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이 없이 죽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완전히 패닉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 날,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정말 놀랍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소망이 제자들의 가슴에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왜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을까요? 왜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훌륭한 성품도 유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마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자 낙심하며 불안과 초조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도마의 행적이 성경에 처음으로 소개된 곳이 요한복음 11장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지역을 두루 나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다.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산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다.” 등등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습니다(10:33).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피해 갈릴리 저편으로 가셨습니다(10:40). 성경학자들은 갈릴리 저편을 갈릴리 동편에 있는 베다니로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유대 땅을 떠나 갈릴리 동편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 머무시는 중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저했습니다. “랍비여! 방금 유대인들이 돌려 치려했는데 다시 유대로 가시려하십니까?”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깨우러 가야 한다.”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께 말씀합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이것은 “우리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는 사람을 깨우러 갈 필요가 있을까요?”라는 말입니다. 안 갔으면 좋겠다는 만류입니다. 유대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최후통첩을 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이 가지 않는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다.’라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입니다. 제자들은 가기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야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멋지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두려워 유대 땅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제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사람이 도마입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제자들의 갈등에 마침표를 찍어준 사람이 도마입니다. 도마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추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과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도마는 유대인들의 돌팔매가 두렵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는 말입니다.
도마는 왜 그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숨어있지 않았을까요? 용기 있는 사람이라 잘 못한 것도 없는데 겁쟁이처럼 비겁하게 숨어있고 싶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에 어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울고 있었을까요? 모릅니다. 도마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도마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요한에게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돌팔매를 두려워하지 않던 도마의 용기도, 사람들을 끄는 결단력과 추진력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느 순간에 가차 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었느냐 없었느냐’입니다. 여러분 공동체와 함께 하세요. 다른 사람과 함께 하세요. 특히 선한 사람과 함께 하세요. 나쁜 사람과 함께 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혼자 있었기 때문에 도마는 11명의 제자 중에 유일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0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를 만나 새로운 소망으로 흥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혼자 불안했습니다. 혼자 의심하고 낙심했습니다. “왜 나에게만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까? 나는 주님을 사랑했는데, 죽을 각오로 주님을 따랐는데, 내 마음을 주님이 너무 잘 아실 텐데, 그렇다면 그분은 살아나신 게 아니야! 나는 믿을 수 없어.” 불안과 초조, 의심 속에 일주일을 살아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도마에게서 이전의 용기나 결단력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까? 볼 수 있는 것은 의심과 불신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품은 부활의 주님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용기가 용기가 됩니다. 주님이 계셔야 내가 내가 되는 거예요. 주님이 계셔야 인생이 인생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안 계시면 어느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모든 삶의 영역에 주님이 계신지 수시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신앙생활은 안 됩니다. 예수님이 없는 열심도 안 됩니다. 내 신앙생활에, 내 기도에, 내 예배에, 내 인생에, 내 집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둘째, 도마는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마의 행적이 성경에 두 번째로 소개된 곳이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설교 중에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내가 너희를 떠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내가 가는 길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 14장 5절입니다. 도마만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도마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몰랐습니다. 모른다는 것을 서로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침묵했습니다. 아는 척, 그런 척 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진리의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길을 모릅니다.”라는 도마의 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도마는 예수님 앞에 솔직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 솔직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 앞에 솔직하세요. 진실하세요. 있는 척, 아는 척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다 아세요. 예수님은 도마의 솔직함 위에 진리를 설파하셨습니다. 거짓 위에 진리를 설파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도마의 행적을 왜 기록했을까요? 도마 때문에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성경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곳이 요한복음 20장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1명의 제자 중 유일하게 도마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자였던 도마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있는데 나만 없을 때,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를 때 그 민망함을 아십니까? 도마는 정말 민망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몰라도 아는 척, 아니어도 그런 척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말로 자신을 포장해 믿음 있는 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손에 못 자국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을 내가 만져보지 않고는 내가 믿지 못하겠다.”(25절) 도마는 사람 앞에서도 솔직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진실하세요. 사람 앞에서도 진실하세요. 믿음 있는 척 하지 마세요. 아무리 믿음 있는 척 해도 몇 달면 함께 지내보면 어떤 사람인지 다 알아요. 거짓말로 상대를 속였다고 생각하죠. 아니에요. 속은 척 하는 거예요. 모르는 척 하는 거예요. 믿음이 헬라어로 피스티스(πίστις)입니다.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실, 충성이라는 뜻입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에요. 거짓은 믿음이 아니에요. 진실이 믿음이에요. 도마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솔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8일 만에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26절에 ‘여드레가 지나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부터 계산에서 그 다음 주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꼭 일주일이 지난 그 다음 주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두 번째 주일입니다. 두 번째 주일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문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도 열지 않고 오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마는 직감적으로 예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도마의 눈이 예수님의 손으로 갔습니다. 손에 못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 앞에 예수님이신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도마야 나야!” 이런 말이 필요했을까요? 그런데도 주님은 도마에게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도마야! 네 손으로 내 손을 만져봐라,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봐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도마야! 나다.” 도마가 예수님의 손을 만져볼 필요가 있었을까요? 옆구리 손을 넣어볼 필요가 있었을까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봐도 예수님이 맞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빛나는 자태 앞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때 도마의 입에서 기독교 역사에 모든 크리스천의 가슴 속에 영원히 새겨질 최고 신앙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우리말 성경에는 평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지만 원문에는 “~이시오. ~이십니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번역자가 넣은 거예요. 원문은 감탄문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당신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계신 분이 유일한 ‘주’이시고 유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굳이 당신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 고백은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마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풍선이 터지듯 도마의 가슴에 응어리졌던 의심이 펑하고 터지면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라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도마의 고백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리는 최고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막달라가 마리아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지금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랍오니”라고 부릅니다(요20:16).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류 역사상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겨우 선생님입니다.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할 수 있는 말이 선생님이라는 말 밖에 없었을까요? 역사적인 순간에 너무 아쉽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습니다(마28:1~10). 너무 안타깝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한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기가 막힐 수가 있을까요? 네 번째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십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지만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에 대한 어떤 특별한 고백이 없었습니다. 수제자도 베드로도 실망입니다. 다섯 번째, 예수님은 도마를 제외한 10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지 못했습니다. 기뻐한 것이 다입니다. 여섯 번째, 예수님은 도마를 포함한 11명의 제자에게 동시에 나타나십니다. 이때 도마의 입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역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찬사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 맞는 호칭을 부르지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왜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사도 도마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도 도마에게 주목했을까요? 의심이 많아서요? 그래서 의심의 사람이 되지 말라고요? 도마가 용기의 사람이기 때문에요?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요?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요? 물론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주목한 것은 도마의 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도마의 신앙 고백, 이것은 영원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고백입니다.
지난 주간 조간신문에 A그룹 회장의 장녀 사진이 나왔습니다. B그룹의 장남과 결혼을 전제로 교제한다는 거예요. 최근 몇 달 동안 이 여성의 기사가 계속 나와요. 사진은 항상 똑같습니다. 내용도 비슷해요. 여성이 어디서 공부했다는 거예요. 학벌이 좋아요. 죄송하지만 그 정도 학력 요즘 많지 않나요? 더 잘 한 사람도 많잖아요. 그런데 그 여성이 매스컴에 계속 나오는 거예요. 왜요? 핵심은 돈입니다. 회사 지분이 얼마라는 거예요. 다 가졌다는 거예요. 돈이 많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 외에는 내용이 없어요. 우리 시대 사람들은 돈이 최고라고 합니다. 돈을 가지고 잘난 체 합니다. 돈으로 사람들을 학대합니다. 세상은 돈 돈 돈 합니다. 돈 돈 돈 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도마는 2천 년 전에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이 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 고백을 합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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