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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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이사야 53:1~3
주일오전예배 | 2020-04-05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브라더 로렌즈 수도사는 수도회 본부로부터 싸움이 제일 많기로 소문난 어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문제가 많은 그 수도원은 원장이 공석 중이었습니다. 로렌즈 수도사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 수도사에게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를 닦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오는 신입 수도사는 나이 불문하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일부터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로렌즈는 겸손하게 !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로렌즈 수도사는 한 달, 두 달, 석 달, 계속해서 접시를 닦았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의 엄청난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쏟아졌습니다. 로렌즈 수도사는 아무 말 없이 그 구박을 다 받으며 신입수사들이 자는 문간방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석 달이 지나서 수도회 본부 감독이 순시 차 수도원에 들렸습니다. 젊은 수도사들도 감독 앞에서만큼은 쩔쩔맸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감독이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본부에서 로렌즈 수도사님를 3개월 전에 이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하고 파송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 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로렌즈 수도사는 빙그레 웃으며 남은 접시를 마저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교만하고 무례하던 젊은 수도사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그곳은 아주 모범적인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진리의 극치는 낮아짐에 있습니다. 낮아짐의 본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한 없이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짐의 정점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우리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낮아짐의 정점에서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여호와의 권능이 누구에게 나타났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람들이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온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 여호와의 권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먼저 여호와의 권능이 누구에게 나타났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사야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진실한 성도들입니다. ‘전한 것이라는 말이 들은 것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한 히브리어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에 보면 전한이라는 말에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 그 각주를 보면 들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과 우리말 성경은 들은 것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들은 것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는 말씀은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라는 말씀도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BC 740-680년 사이입니다. BC 700년 전 후에 유다 사람들이 듣도록 전해진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700년 후에 오실 메시야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야는 영광스러운 왕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이 말씀은 고난의 종으로 오시는 초라한 메시야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선지자는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성경에서 팔은 아주 활동적인 힘을 비유할 때 사용됩니다. 여기서 팔은 아주 강한 힘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17: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힘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팔입니다. 개역성경은 권력으로 번역했습니다. KJV는 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경에서 팔은 힘, 권력, 권능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권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뜻입니다.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사람이 믿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해지고 들려진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여호와의 권능이 나타났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 있는 믿음은 가장 큰 표징입니다. 영광스러운 왕의 모습, 존귀한 귀족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메시야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을 베풀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로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나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호와의 팔이 나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만 기적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 세상 어떤 기적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분은 영광스러운 왕이 아니라 베들레헴 시골 마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낮고 천한 모습,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초라하게 오신 분이 내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지는 믿음이 여호와의 팔이 내게 나타났다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의문문은 선지자의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물음입니다. 먼저 믿음의 희소성 때문에 오는 탄식입니다. 인류의 구세주가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세주를 참되게 따르는 신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질문은 구세주가 오셔도 참되게 믿는 자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선지자의 서글픈 탄식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자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구원자가 와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말세에 참으로 믿는 자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믿는 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때입니다. 믿음의 희귀한 때에 믿음 잃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믿음의 의외성 때문에 생기는 놀라움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된 신자들이 아주 의외의 인물들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 역사에 손에 꼽히는 율법학자입니다. 사도 바울의 스승입니다. 존경받는 랍비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사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도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방지축, 학문이 없는 무식쟁이 베드로가 사도가 됐습니다. 사이코패스같은 괴팍한 성격을 가진 요한이 사도가 됐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믿음이 정말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봉사도 많이 해요. 잘 알아요. 칭찬받은 사람이에요. 인품도 좋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놀랍니다. 이런 분은 원래 믿음이 없었거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믿음을 잃은 경우일 것입니다. 또 믿음의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함부로 해요. 무슨 일만 있으면 뒤로 빼요. 아주 뺀질이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사람 속에 있는 믿음이 밖으로 들어날 때가 있어요. 그래서 놀래요. ‘아니 이 사람에게 이런 믿음이!’ 겉만 믿음으로 포장된 사람이 되지 마세요. 속에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되세요. 믿음이 있다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끝까지 믿음의 사람으로 사세요.   

셋째, 은혜의 이동성 때문에 오는 아픔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배척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으로 넘어갑니다. 유대인들은 선택받았습니다. 성경을 알았습니다. 은혜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를 두루 다니시며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사도들까지 박해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음은 이방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방에서 무수히 믿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질문은 장차 하나님의 권능이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나타날 것이라는 아픔에서 오는 탄식입니다. 마음에 생기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누르지 마세요. 예수님을 부인하지 마세요. 은혜를 거절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날까요? 모릅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누구에게 나타날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없이 낮아지셨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낮아짐에서 극치를 이룹니다. 십자가는 낮아짐의 절정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낮아지는 자에게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는 높은 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믿겠느냐?”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만입니다. 아멘의 동사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멘해야 합니다. 아멘이 순종입니다. 아멘이 겸손입니다. 아멘이 낮아짐입니다. 아멘이 은혜입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9:24)라고 간청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믿음을 구합시다. “주님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셨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메시야는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이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을까요? 2절을 보겠습니다.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먼저 메시야는 연한 순 같은 분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나무 가지를 자세히 보세요. 새싹이 날 자리가 모두 정해져 있습니다. 유전자에 가지가 날 자리, 잎이 날 자리, 꽃이 필 자리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봄이 되면 그 정해진 자리에서 새싹이 납니다. 엉뚱한 곳에서 나지 않습니다. 새싹은 나무를 더 크게 성장하게 합니다. 싹은 나무를 풍성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나오는 새싹이 있습니다. 나지 말아야 할 곳에서 나는 싹이 있습니다. 본문에 순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요네크입니다. 요네크는 흙 밖으로 돌출된 뿌리에서 나오는 싹입니다. 싹은 가지에서 납니다. 그런데 뿌리에서 나는 싹이 있습니다. 이 싹은 여러 개가 같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만 납니다. 외딴 섬입니다. 고독합니다.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밟힙니다. 찢어지고 꺾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흙 밖으로 튀어나온 뿌리에서 혼자 돋아나는 순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쓸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둘째 메시야의 모습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다고 했습니다. ‘마른 땅이라는 말을 우리나라 배경에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마른 땅은 광야 같이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부서지는 땅입니다. 모래 같은 땅입니다. 흡기가 조금도 없는 땅입니다. 그래도 뿌리는 땅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른 땅에서조차 속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있는 뿌리가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 보세요. 길에 나무뿌리가 나와 있습니다. 보기에 좋습니까? 흙 밖으로 나와 있는 뿌리는 밟히고 치여 까지고 끊어집니다. 교회 복도에 다육 식물이 몇 개 있습니다. 작년에 그 중의 하나에 벌레가 생겼습니다. 그 다육이를 계단 창에 겨울 내내 놓았습니다. 겨울 내내 물을 주지 못했어요. 흙에 물기 하나 없습니다. 다육이가 온 몸에 뿌리를 냈어요. 뿌리가 수염처럼 나왔어요. 잎부터 모든 줄기가 바싹 말랐어요. 메마른 땅에서 생명을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친 거예요. 뿌리는 흙 속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른 땅 밖으로 나온 뿌리 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잘 생긴 아이였습니다. 엄마가 그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을 숨겼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 잘 생기지 않았다면, 약한 아이였다면, 죄송한 말이지만 혹시 장애가 있었다면 모세의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자기 아들을 나일 강에 버렸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성경은 잘 생긴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잘 생겼기 때문에 살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1대 왕으로 사울이 세워질 때 사람들이 사울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준수한 소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었습니다.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컸습니다(삼상 9:2). 사람들은 그 외모에 만족하지 않았을까요? 키도 작고 준수하지 않았다면 사울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을까요? 무슨 이런 사람이 왕이냐고 비아냥거리지 않았을까요?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다윗을 세울 때의 일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그런데 예수님은 사울이나 다윗처럼 멋진 모습이 없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사람들이 보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너무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이라고 했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천대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빈곤하셨습니다. 사람들 눈에 너무 하찮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하나님 앞에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존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값진 삶이셨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2:4)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삶을 사세요.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람들에게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 지를 생각하며 사세요. 사람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는 정말 존귀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세요. 예수님은 생애 전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계셨습니다.   

일본의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들러의 심리학을 참고해서 쓴 책입니다. 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남을 배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너무 신경쓰며 살지는 마세요.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그런데 이 책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있는데 하나님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하기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고민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 앞에서 살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는 광대가 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사세요. 이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의 삶입니다.   

3.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는 메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아주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끌 수 있는 외모나 환경을 전혀 갖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3a)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을 어떤 성경학자는 사람들 중에 말석을 차지한 사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제 핸드폰에 610명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습니다. 전화번호를 검색하다보면 간혹 이 사람이 누구지?’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제가 입력했습니다. 카톡에서 사진을 확인합니다. 사진을 봐도 누군지 모릅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지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우지 않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잊어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여럿입니다. 혹시 나에게 예수님이 이런 분이 아닙니까? 누군지도 모르는 번호,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 있으나 마나한 분, 내 인생에 맨 끝에 있는 분이 아닙니까? 선지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3c) 사람들은 보기 싫은 사람을 외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외면이 아니라 얼굴을 아예 가려버렸습니다.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주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얼마나 멸시를 당하셨는지 선지자는 예수님이 간고를 많이 겼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3b)라고 했습니다. 간고라는 말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질고는 병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온갖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아픔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신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고통스러우셨던 것은 진실한 성도들조차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3d).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불신의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십니까? 믿음의 사람이십니까? 혹시 예수님을 배반한 적이 없으십니까? 직장 혹은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주님을 배반한 적이 없으십니까?   

돈 리차드슨 선교사(Don Richardson, 1935~ )1962년부터 15년 동안 뉴기니 섬의 정글에 사는 사위(Sawi) 부족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사위 부족에게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위 부족은 배신을 가장 큰 미덕으로 여기며 사는 식인종이라는 것입니다. 사위 부족은 다른 마을 사람을 친구로 받아들여 몇 달에 걸쳐 교제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등 좋은 관계를 맺다가 어느 날 친구를 살해해 인육을 먹으며 축제를 벌이는 끔찍한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 그 사람을 잡아먹기 위한 미끼인 것입니다. 잘 속일수록 찬사를 받는다고 합니다. 리차드슨 선교사님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사위 부족은 큰 웃음을 터트립니다. 그들에게 가룟 유다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배교 시대입니다. 요즘 기사를 보십시오. 교회를 욕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인 것처럼 기사를 과장하며 교회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객 중에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문, TV, 인터넷 모든 매스컴이 다 교회라고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주교였어요. 기자들, 방송사들이 몰랐을까요? 다 알고 있었죠. 그런데 교회라고 비난하는 거예요. 명성교회 부목사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다고 보도가 됐습니다. 부목사와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이 부목사와 엘리베이터를 30초 정도 같이 타서 감염됐다고 보도가 됐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는 코로나19 음성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정정 보도를 내야죠. 정정 보도가 없어요. 매스컴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진원지가 교회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배교의 시대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믿는 자들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는 때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오락, 즐거움을 잠깐이라도 끊어봅시다. 스마트폰, 컴퓨터 게임을 끊어봅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사는 것을 절제합시다. , 사람과의 만남을 절제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묵상합시다. 예수님의 낮아짐을 생각해봅시다. 또 우리 믿음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봅시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 중국에 핍박받는 우리의 형제자매들, 아랍의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봅시다. 나라가 어렵습니다. 세계가 혼돈 속에 있습니다. 수난주간, 조용히 기도하며 한 주간을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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