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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 <초원의 집>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자랐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방영되던 미국의 근대사를 다룬 드라마입니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통나무집들이 띄엄띄엄 있습니다. 숲도 있습니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마을입니다. 아이들은 들판에서 뛰어놉니다. 사람들은 주로 걸어 다니지만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기도 합니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분위기의 드라마입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많은 미국 드라마 중에는 신앙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드라마 중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 집에서 기도하는 모습, 성경 읽는 모습, 들에서 묵상하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드라마에 미국 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이 그대로 배어있었습니다. 이 미국의 기독교 신앙은 영국의 청교도들에게서 시작됐습니다.
중세기 유럽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제도중심주의였습니다. 성경 보다는 의식, 제도, 교권이 위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하나의 커다란 정치집단이 되어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에서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영국에서도 교회 개혁을 부르짖으며 교회의 순결과 복음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교권 보다는 말씀 중심신앙을 부르짖습니다.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릅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의 심한 박해를 받습니다. 박해가 심해지자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9월 16일 배를 타고 미지의 대륙으로 떠납니다. 오직 신앙 하나 때문에 아브라함처럼 고향과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난 것입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를 심습니다. 1962년 가을 첫 수학을 거두고 인디언들을 초청해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킵니다. 청교도들은 이 신앙 위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기도한 후에 수업을 시작할 정도로 미국은 기독교 사회였습니다. 미국은 경건한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에 따라 미국은 세계로 복음을 수출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런데 세계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영화와 드라마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초원의 집 같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드라마들을 수출했습니다. 그런 드라마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는데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떨까요? 미국은 성이 너무 자유로운 나라가 됐습니다. 이 자유로운 성문화가 드라마나 영화에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 영화와 드라마를 수입하는 나라들이 미국의 성문화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이제 세계를 음란하게 하는 나라 중에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계에 복음을 전하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에 음난을 전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아주 아이러니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영화와 드라마를 아랍 세계에서도 수입합니다. 아랍에서 미국 영화와 드라마를 자국에서 방영할 때 야한 장면을 다 자릅니다. 아랍은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 국가에서 수입한 영화가 외설스러워 편집을 수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미국은 여러 면에서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시작된 나라가 이제 이 세상 어느 나라 보다 더 깊이 영적으로 타락한 나라가 됐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와 똑같아 졌음을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스에 비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스 족속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구스는 지금의 에티오피아입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흑인입니다. 또 구스 족속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후손으로 저주받은 민족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집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둘째 아들 함이 보고 아버지를 비웃습니다.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 셈과 셋째 아들 야벳은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의 장막 안으로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를 옷으로 가만히 덮어드립니다. 이로 인해 둘째 아들 함은 저주를 받습니다. 구스는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후손입니다. 여기서 구스 족속은 단순히 구스 족속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모든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의 저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스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있는 이스라엘에서 아주 먼 이방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구스 족속이라 함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세상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스 족속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은혜 아래 있는 민족이 은혜 밖에 있는 민족과 같아졌다는 뜻입니다. 은혜 속에 있는 나라가 은혜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와 똑같아졌다는 의미입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과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이 별반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나는 어떻습니까? 은혜를 받았지만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과 같아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탄식의 소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사건을 블레셋과 아람 사람들의 이주에 비유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끌어 올리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유를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소유라는 말은 특별한 소유 또는 보배로운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를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보배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짜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것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짜리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천원 주고 샀으면 천원짜리입니다. 만원주고 샀으면 만원짜리, 백만 원 주고 샀으면 백만원짜리입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얼마 주고 사셨을 까요? 하나님이 나를 사실 때는 예수님을 주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짜리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짜리인 하나님의 보배라는 사실을.
둘째, 제사장 나라를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은 히브리어로 코헨이라는 합니다. 코헨은 남을 위해 대신 서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 세상 나라를 위해 서 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을 라틴어로 폰티펙스라고 합니다. 폰티펙스는 다리를 놓는 사람(Pontis, Pons은 다리라는 뜻)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입니다. 다리는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연결해줍니다. 다리는 이쪽 사람들과 저쪽 사람들을 연결해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올리신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우리 성도를 왕 같은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세상 사람의 다리가 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은혜 받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셋째,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부르신 이유는 보배로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는 거룩한 백성을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됐다,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분명히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로버트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5달러짜리 쇠 한 덩이로 말편자를 만들면 50달러에 팔 수 있고 바늘을 만들면 5000달러어치를 만들 수 있으며 시계를 만들면 5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재료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구원으로 거듭난 성도라 해서 그들의 인생의 가치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다르게 살 때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갑돌에서 올라오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갑돌은 지금의 크레타 섬입니다. 크레타 섬은 지중해 동부, 에게 해 남쪽 끝에 있는 섬으로 그리스 땅입니다. 성경에는 그레데(Crete)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섬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크레타 섬은 고대 크레타 문명의 중심지입니다. BC 2000년경에 크레타 섬은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웁니다. 이곳에서 고대 그리스도 문명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사람들이 블레셋 땅으로 이주했을까요? BC 14세기경에 그리스도 본토에서 내려온 미케네인과 자연재해로 망하게 됩니다. 크레타 섬사람들은 미케네인과 자연재해를 피해 블레셋 땅으로 이주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그레데 섬사람들이 자연재해를 피해 블레셋 땅으로 이주해온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르 사람들이 아람 땅으로 이주한 것에 비유하십니다.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수도는 다마스쿠스입니다. 하지만 기르는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바벨론(메소포타미아)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만 추측합니다. 그러면 바벨론 사람들이 시리아 땅으로 이주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벨론에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넓은 곳을 찾아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르가 어디인지 위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블레셋 사람들과 아람 사람들의 이주에 비유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블레셋과 아람 사람의 이주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끌어올리시기 위해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반면에 크레타 섬사람들은 배를 타고 블레셋 땅으로 이주했을 뿐입니다. 아람 사람은 넓은 곳을 찾아 이주했을 뿐입니다. 결코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셋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왔지만 그 올라온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왜 이주한지도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 아람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흑암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았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재수가 좋아서 구원받았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기다림 속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약 성경의 족보를 벽돌을 쌓듯이 쌓으면 약 4천년이 됩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빠진 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역사는 2천년입니다. 적어도 신구약의 역사는 6천년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6천 년 전에 계획되어진 것입니다.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구약에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고 그들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대한민국 땅까지 전파됐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예수 믿게 됐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결코 우연히 이우러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준비하시고 계획하신 후에 많은 희생과 노력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같아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저는 우리 등대교회를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교회 장소를 찾아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녀도 마음에 확신이 안 생기는 거예요. 장소도 좋고 마음에도 드는데 결정적으로 확신이 안 생기는 거예요. 자기 건물로 오면 반값에 해주겠다는 분도 있었어요. 장소가 여기 보다 두 배나 넓어요. 싸고 넓은 곳으로 가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확신을 안 주시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셨어요. 이곳에 왔는데 제 마음에 ‘아, 이곳이구!’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무엇으로 부르셨을까요? 세상의 등대로 부르셨습니다. 교회 이름도 제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이름을 놓고 정말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이 이름도 생각해보고 저 이름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거라는 확신이 없어요. 그러다가 2014년 1월 1일 새벽 기도 중에 응답받았습니다. 우리교회는 등대교회입니다. 제가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제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의 등대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부르신 목적입니다.
이 건물에 세탁소, 미용실, 꽃집, 다이어트클럽, 피시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있습니다. 똑같은 건물에 똑같은 간판입니다. 교회나 세탁소나 똑같은 시멘트로 만들었습니다. 교회라고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 사업소와 다른 곳입니다. 교회가 피시방과 똑같으면 안돼요. 교회가 커피숍과 똑같으면 안돼요. 달라야 해요. 만약 같아진다면 예수님께서 통곡하실 것입니다. 아모스 시대, 구약 이스라엘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과 같아졌습니다. 이은혜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먼 이방 나라들과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기업과 달라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 기업과 같아지면 안 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은 모두 동일한 성도입니다. 하지만 목사는 성도와 달라야 합니다. 장로는 권사와 달라야 합니다. 권사는 집사와 달라야 합니다. 집사는 성도와 달라야 합니다. 성도는 불신자와 달라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는 계급이 아닙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모두 일하는 직분일 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직분에 맞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권사가 집사 같으면 안 됩니다. 목사가 성도 같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름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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