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2 ok!
등대교회 홈페이지입니다.

Sermon

구약 성경 마지막 성도들의 예배 모습을 생각하다

조회수 : 912회

본문 : 말라기 1:10~14
주일오전예배 | 2020-03-22
설교자 : 서요한 목사

오늘 우리 시대에는 예배가 정말 많습니다. 교회마다 주일오전, 주일오후, 수요일저녁, 새벽 일주일 내내 예배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는 예배가 더 많아요. 예배가 하루 종일 나와요. 앉아서 보고 누워서 보고 청소하면서 보고 설거지하면서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워요! 일하면서 기도 소리, 설교 소리, 찬송 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됐어요. 예배를 함부로 대해요. 예배의 관람자가 됐어요. 텔레비전을 보듯 예배를 구경해요. “이 교회는 어떻게 하는지 보자!”, “목사가 뭐라고 하는지 보자!” 예배를 판단하는 자리는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예배를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에요.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5.5,~1855.11.11.)는 예배를 극장에 비유했습니다. 케고르는 우리는 모두 배우이고 하나님 한분만이 관객이다.”라고 했습니다. 예배에서 관객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다 배우입니다. 배우가 연극이 시작된 후에 올 수 있습니까? 배우가 연극이 끝나기 전에 갈 수 있습니까? 배우가 연극 중에 물 마시러 갈 수 있습니까? 배우가 연극 중에 전화 받으러 갈 수 있습니까? 배우가 연극 중에 화장실 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에 막 돌아다녀요. 물먹으러 가요. 화장실가요. 전화 받아요. 전화받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급하면 받아야죠. 화장실이 급하면 가야죠. 예배 중에 실례할 수 없잖아요. 이런 분들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오늘 우리들의 예배드리는 태도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구경꾼이 아닌지!’, ‘예배자가 아니라 구경꾼이 돼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지!’ 예배는 목사 혼자 드리는 거 아니에요. 성가대가 드리는 거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예배팀입니다. 예배의 관람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배의 배우입니다. 예배를 감독하려 하지 마세요. 하나님 자리에 앉지 맙시다. 하나님 자리에 앉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먼저 구약 성경 시대 마지막 성도들의 예배 모습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며 은혜 시대 마지막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예배해야 할지 영적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 다음에는 구약 마지막 성도들이 예배를 잘 못 드렸을 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어디로 옮겨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구약 성경 마지막 성도들의 예배 모습   

먼저 구약 성경 시대 마지막 성도들의 제사 모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구약 성경 끝의 제사장들은 제사를 아주 경멸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 어떠했는지 지적하며 구약 시대 마지막 성도들이 제사를 얼마나 경멸했는지 고발하고 있습니다. 8절에 제사장들은 눈 먼 것,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으로 제사했다고 했습니다. 먹을 수도 팔수도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먹기는 찜찜하고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전의 제단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사에 대한 경멸은 하나님에 대한 멸시입니다. 제사장들이 제물로 제사를 얼마나 경멸했는지 말라기 선지자는 13절에서 제사의 제물이 어떠했는지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제사장들은 훔친 물건,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 훔친 물건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까질입니다. 이 단어에는 이중적인 뜻이 있습니다. 까질은 빼앗다, 강탈하다, 탈취하다는 뜻입니다. 또 까질에는 벗기다, 찢어 놓다, 떼어 놓다는 뜻이 있습니다. 전자로 번역하면 훔친 물건’, ‘강탈한 물건’, ‘빼앗은 물건이 됩니다. 제사장들은 피를 흘리고 빼앗은 물건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제사장들에게 어떻게 훔친 물건이 있었을까요? 제사장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혹시 여기 훔친 과자를 자식에게 주고 싶으신 분이 있습니까? 훔친 돈으로 자식에게 용돈을 주고 싶으신 분이 있습니까? 아마도 정상적인 부모라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자식에게는 좋은 것 보다는 깨끗하고 정직한 것을 주고 싶습니다. 부끄러운 것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부끄러운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람에게도 주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후자로 번역한다면 찢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찢긴 것이 무엇일까요? 양을 들에서 먹이다 보면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들에게 찢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제사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외곽도로를 달리다가 차에 치여 도로 한 쪽에 쓰러져 있는 들짐승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산 속에서 무공해로 자란 짐승입니다. 그것이 좋다고 주어다가 집에서 드시는 분이 있을까요? 보통 사람들은 사체를 보고 싶지 않아 다른 곳을 보며 지나갑니다. 어렸을 때 들에 가면 매가 비둘기를 주둥이로 찢어서 먹다 남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매가 배가 불렀는지 어떤 것은 머리만 파먹었습니다. 어떤 것은 머리와 가슴을 찢어먹었습니다. 깃털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찢긴 짐승은 아주 처참합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다니며 비둘기나 꿩을 사냥해서 구어 먹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에게 찢긴 것은 먹지 않았습니다. 보는 것도 끔찍합니다. 산에 가면 토끼가 죽어 있어요. 그런 것은 만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싫어요. 끔찍해요. 만지면 병 걸릴 것 같아요. 그런데 제사장들은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처참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보기도 싫은 것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우리 성경은 훔친 물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성경은 토색한 물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말 성경과 KJV찢긴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본문은 두 가지가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구약 성경 시대 마지막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쓸모없는 것들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안 먹는 것을 드렸습니다. 사람에게 갖다 주면 화내는 것을 드렸습니다. 보기도 끔찍한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 맨 끝의 성도들의 예배 모습입니다. 예배가 철저하게 멸시되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로 인해 여호와의 식탁이 더러워졌다고 탄식을 합니다.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 도다   

성전에는 세 가지 제단 - 번제단, 떡상, 분향단 이 있습니다. 번제단에는 양이나 염소 같은 가축을 드렸지만 곡물(소제)도 드렸습니다. 떡상에는 안식일마다 12개의 떡을 진설해 놓았습니다. 과일(노브, 열매)이라는 말은 번제단에 드려진 곡식 제사(소제, 素祭)입니다. 물론 떡상 위에 떡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식탁은 번제단과 떡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 여호와의 식탁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번제단에 드려진 송아지를 드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떡상에 차려진 떡을 드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식사를 하시는 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식탁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식탁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슐한입니다. 슐한은 살라흐에서 온 말입니다. 살라흐는 보내다, 보냄을 받다, 펼쳐놓다는 뜻입니다. 식탁이라는 말은 누군가 보낸 무엇인가가 펼쳐져 놓여 있는 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가 보냈을까요?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떡상에 떡을 진설하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번제단에 제물을 벌여놓은 사람도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진설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제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식탁입니다. 사람의 식탁이 아닙니다.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식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펼쳐 놓으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양식입니다. 떡상에 펼쳐놓은 떡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번제단의 제물은 우리의 죄 용서입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사죄의 은혜와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하나님의 식탁을 차려놓으셨습니다. 왜요? 우리에게 먹으라고요. 교회는 하나님의 식탁입니다.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성도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는 곳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떡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누어주어도 줄지 않는 거예요. 오히려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기적을 일으키셨을까요? 52어의 기적은 광야에 차려진 여호와의 식탁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 사건 후에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참된 음료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떡상 위에 떡이 예수님입니다. 번제단 위에 제물이 예수님입니다. 떡을 더럽히는 것은 예수님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제물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 떡을 더럽히지 마세요. 저는 목사입니다. 이 떡을 먹고 이 떡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이 떡을 더럽히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이 떡을 더럽히는 목사였습니다. 회개하고 또 회개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떡을 더럽히지 않으셨습니까? 예배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까?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떡을 더럽힌 것입니다. 제사를 경멸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떡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식탁을 더럽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노골적으로 제사를 경멸했습니다. 12-13절을 보겠습니다.   

  • <12-13>
  •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 도다
  •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12절에 너희는 말하기를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말을 먼저 한 다음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대놓고 제사를 무시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얼마나 오만방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3절에도 말하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번거롭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텔라아입니다. 텔라아는 피로, 권태, 지루함, 고초,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제사드리는 것이 피곤하고 지루하다는 뜻입니다. 제사가 고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너희는 또 '이 얼마나 싫증나는 일인가!' 하고 말하며, 제물을 멸시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너희는 보라. 진짜 귀찮은 일이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멸시한다.”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성경은 “‘에이 귀찮아.’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바치고는 나를 우습게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코웃음을 치며 제사를 노골적으로 경멸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시대 마지막 성도들의 예배 모습니다.   

우리는 은혜시대 마지막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예배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배를 구경하십니까? 아니면 예배를 존중하십니까? 구약 시대 마지막 성도들의 예배 모습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예배가 너무 많아서 예배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예배를 함부로 대하는 것 아닙니까? 예배를 존중히 여깁시다. 예배를 잘 드립시다.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구경꾼이 되지 마세요. 예배의 판단자가 되지 마세요. 예배를 칼 가지고 난도질 하지 마세요. 예배의 훼방꾼이 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마세요. 교회 안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찢지 마세요. 왜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세요. 그것은 예배를 찢는 거예요. 예배를 찢지 마세요. 그것이 예배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가 돼서 진정한 예배가 되도록 기도하는 하나의 예배팀입니다. 같은 팀끼리 정죄하는 것은 예배를 방해하고 찢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 시대 마지막입니다. 이 시대는 예배를 정말 잘 드려야 할 때입니다. 예배를 잘 드립시다.   

2. 우리 이방인에게로 넘어온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오길 바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존중을 받지 못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자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이방 세계로 넘겨주셨습니다. 11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 <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11). ‘내 이름이 크게 것이라는 말씀을 LXX인역 성경은 내 이름이 영광이 될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내게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영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영광이 될까요? 그것은 예배 회복입니다. “내 이름을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11)라고 했습니다. 분향은 향기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향기의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한 제물을 드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더럽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더럽힌 하나님의 제사를 이방인들이 회복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크게 될 것입니다.   

향기롭고 깨끗한 제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성경의 법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14절에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곳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5대 제사 -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 - 가 있습니다. 속건제는 수컷으로 드렸습니다. 화목제는 암컷이나 수컷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제사는 반드시 수컷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수컷이 제물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수컷은 종 번식에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건강하지 않은 것이나 암컷으로 드렸습니다. 성경의 법대로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아무거나 드린 것입니다. 제사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이 멸시받은 예배를 회복할 것입니다. 멸시받은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서 크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열방이 주께 돌아오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에게 멸시받은 예배를 회복합시다. 마음을 다해 예배합시다. 그래서 이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합시다. 이스라엘처럼 예배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처럼 예배를 경멸하지 마십시오. 구약 성경 마지막 시대 성도들이 잃어버렸던 예배를 다시 회복하는 성도가 되세요. 그때 우리 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이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성전의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의 문을 닫고 싶어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제단에서 헛된 불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의 끝입니다. 하나님이 성전문을 닫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전 문을 다시 열고 싶어 하지 않으실까요? 그래서 약속된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한번 높여지기를 바라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영적인 예배의 불이 타고 있습니다. 이 불이 진정한 예배의 불입니까? 아니면 헛된 불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불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불입니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세상이 교회에 예배를 드리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세상의 도전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일까요? 만약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향기로운 제사라면 세상의 도전일 것입니다. 깨끗한 제사라면 마귀의 도전입니다. 마귀는 성전의 문이 닫히길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헛된 불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이 시간 내가 드리는 예배를 돌아봅시다. 나의 예배가 헛된 불이 아닌지, 쓸모없는 불이 아닌지, 마귀가 좋아하는 불이 아닌지 돌아봅시다. 우리의 불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불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의 죄를 태울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린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는 버리지 맙시다. 우리 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떠나지 않게 합시다.   

지난 주간에 옥상에서 막내 아이와 나무를 태웠습니다. 아이가 불을 보면서 계속 기분 좋아, 기분 좋아. 불을 보면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왜 좋아?”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불이 나무를 살라버리는 것이 시원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이 활활 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희열을 느꼈던 것입니다. 저도 학창시설 수련회에서 캠프파이어를 할 때 불이 하늘로 타오르면 왠지 모르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제사장이 번제단에서 제물을 태울 때 불이 활활 타 올랐습니다. 그 불은 사람들의 죄를 태우는 불입니다. 그 불을 보고 사람들은 그 불과 함께 자신의 죄가 타고 있다는 영적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입니다. 내 예배의 불이 나의 죄악을 태울 때 나에게 영적 카타르시스가 있습니다. 내 불이 세상의 죄를 태울 때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불로 우리 중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 거짓, 오만, 분노, 음란, 정죄를 태웁시다. 그래서 구약 성경 마지막 성도들이 잃어버렸던 예배를 다시 찾읍시다. 교회시대 마지막 세상을 거룩한 예배의 불로 환히 밝힙시다. 그때 우리 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이전글 교회가 세상과 같아질 때
다음글 하나님께서 성전 문을 닫고 싶어 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