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프랑스의 여류작가이면서 노동운동가인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라는 책이 있습니다. 시몬 베유는 중력이라는 과학적인 힘으로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에는 ‘중력’이라는 힘에 의해 지배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중력은 사람을 계속해서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그래서 하늘의 계신 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땅의 존재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중력에 의해 처단된 존재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연결한 아주 특별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중력과 같은 속성이 있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중력처럼 사람을 하늘로부터 끌어내립니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죄는 사람을 하늘의 존재가 아니라 땅의 존재가 되게 합니다. 천국의 존재가 아니라 지옥의 존재가 되게 합니다. 사람은 죄에 의해 처단된 존재입니다.
중력에 반하는 힘이 있을까요? 중력보다 강한 힘이 있을까요? 중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시몬 베유는 그 힘을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은총은 인간을 위로 들어 올립니다. 중력이 사람을 하늘로부터 끌어내린다면 은총은 사람을 땅으로부터 하늘로 들어 올립니다. 죄가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끌어내린다면 은총은 마귀로부터 사람을 들어 올립니다. 그래서 하늘의 존재가 되게 합니다. 중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은총 밖에 없습니다. 죄의 마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은총 밖에 없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은총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사람을 죄로부터 하늘로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은혜를 구하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세요. 그런데 그 은혜를 붙드는 방법이 회개입니다. 삶의 순간순간 회개하세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세요. 은혜가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은혜가 죄를 이기게 합니다. 은혜가 죄의 저주를 이기게 합니다. 은혜가 마귀를 이기게 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 오직 은혜
싯딤은 성경 시대에는 모압땅이었습니다. 지금은 요르단 지역(텔 엘 케프렌)입니다. 싯딤은 가시나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나무에 가시는 없습니다. 싯딤은 요단강에서 동쪽으로 10km, 사해에서 북(동)쪽으로 8km 떨어진 곳입니다. 차로 10분이면 가는 거리입니다. 가나안 땅이 지척인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40년 만에 싯딤에 도착합니다. 광야 40년 긴 여정이 마쳐지는 순간입니다. 광야를 졸업하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흥분과 감격의 순간입니다. 이곳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이곳에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냅니다. 싯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크게 배반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음행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자나입니다. 자나는 간음하다, 창녀(분사형)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음행이 단순한 음행이 아닙니다. 우상숭배와 이어지는 혼음입니다.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여자들은 요조 숙녀가 아닙니다. 바알 신전에 있는 창녀들입니다. 바알에게 제사할 때 의식 중에 하나가 신전에 있는 창기들과 집단 혼음을 하는 것입니다. 바알 종교는 아주 음란 종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신전에서 집단 혼음과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아주 음란해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여인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이방신전에서 이루어진 축제도 함께 즐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적 간음과 영적 간음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삶의 방식까지 문란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신앙훈련이 바알종교 앞에서 한 순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철저하게 허물어졌는지 성경기자는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했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바알브올은 브올의 바알이라는 말입니다. 브올 지방에서 섬기는 바알이라는 뜻입니다. 가담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차마드입니다. 차마드는 묶다, 조이다. 붙여지다, 섬기다(니팔)는 뜻입니다. 붙들어 매서 완전히 밀착된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 재귀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스스로를 묶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알브올에게 가담했다는 말은 자신을 바알브올에게 묶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바알의 종이 됐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에게 영혼을 팔았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40년 동안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았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혹독하게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까요?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을까요?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이 눈앞이라 긴장이 풀렸을까요? 예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이제 됐다.’하는 순간에 넘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12). 그래서 우리는 ‘아! 이제 됐다.’하는 순간을 조심해야 합니다. 모세의 부인이었던 십보라가 미디안 사람입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입니다. 미디안이나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친척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과 미디안 사람에게 경계를 풀었을까요? 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보다 가까운 사람에 의해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연약성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죄성이 아주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죄 앞에 연약한 존재임을 나타내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만이 인간의 연약함을 덮을 수 있습니다. 은혜만이 인간의 연약함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만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길은 오직 은혜 밖에 없습니다.
2. 죄악과 죄악의 저주를 잠재운 비느하스의 열심
바알브올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에 전염병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결코 죄를 간과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심판 중에도 반드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샘물을 발견해야 합니다. 샘물 같은 은혜가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본문에는 심판 중에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심판을 면하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목매어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백성의 수령들’이라는 말을 히브리어 본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 백성의 모든 수령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모든’이라는 말이 생략됐습니다. 이 말씀에서 몇몇 수령들이 아니라 모든 수령들이 바알 신전에서 창기들과 혼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가 이스라엘 진영 아주 깊이 침투한 것입니다. 수령들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장정이 60만 명입니다. 그렇다면 천부장이 600명입니다. 그 밑에 백부장이 6,000명, 오십부장이 12,000명, 십부장이 60,000명이 있습니다. 모두 합하면 78,600명입니다. 78,600명의 수령들이 창기들과 놀아난 것입니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은 가담하지 않았을까요? 상당수가 가담했을 것입니다. 바알의 혼음 종교와 풍습이 백성들에게 아주 깊이 전파됐습니다. 하나님은 이 수령들을 모두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을 매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태양을 향하여’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심판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태양을 항하여 786,00명을 매달아야 합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5절>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재판관들에게 전합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 백성들의 재판을 담당했습니다. 따라서 재판관들이라는 것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입니다. 이들은 죽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죽어야 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모세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을까요? 추측컨대 너무 어마어마한 사건이라 수행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모든 수령들을 다 죽이면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까? 가나안 땅이 코앞인데! 게다가 이제 모세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훈련받은 백성의 지도자들을 다 죽이면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하루아침에 목자를 잃은 양의 신세가 됩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명령 앞에 어떻게 할지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음행을 하며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합니다. 바알브올 사건과 아주 흡사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려 하시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 차라리 내 이름을 천국에서 지워 버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세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그 사이에 전염병은 더욱 퍼진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8절에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음행을 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바알브올의 음행 사건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9절에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왜 숫자가 틀릴까요? 아마도 바알브올 사건으로 첫째 날에 1,000명이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자 둘째 날에 23,000명이 죽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백성들이 수 없이 죽어갑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죄가 더 깊어집니다. 보세요.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는데 그 가운데서 여전이 음행을 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6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얼마나 악했는지 수령 중에 한 사람이 미디안 여자 하나를 데리고 모세와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자기 막사로 들어갔습니다.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염병이 왜 퍼졌는지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전염병을 그치게 하려면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목을 매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전염병으로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한 명이 창기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뻔뻔합니다. 죄 앞에 담대합니다. 모두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아론도 이스라엘 어른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를 붙든 사람이 있습니다. 비느하스라는 청년입니다. 비느하스는 거룩한 울분을 가지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비느하스는 손에 창을 들고 그 남자를 따라 들어가 음행하고 있는 사람을 위에서 내리 찍습니다.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전혀 시행되지 않은 때입니다. 그 위대했던 모세도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때입니다.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때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이스라엘 중에 전염병을 그치게 했습니다. 아직 수령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78,600명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전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의 수령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염병이 그쳤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 밖에 죽지 않았는데 전염병이 그쳤을까요? 하나님은 그 이유를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질투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시기 질투나 하시는 속이 좁으신 분이신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질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나’입니다. 카나에는 ‘질투하다, 시기하다, 특심하다, 뜨거움, 열심, 열정, 정열’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카나를 우리말 성경은 대부분 질투로 번역했지만 열정, 열심, 정열, 불같은 뜨거움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열왕기상 19:10에 엘리야가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열심이 유별하다’는 말이 카나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불같은 열심히 있던 선지자가 엘리야입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불같은 열심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호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당한 성읍입니다(창14:8). 내가 에브라임을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 마음에 이스라엘을 향한 뜨거운 긍휼이 넘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는 말씀이 뜨거운 긍휼이 격하게 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노아의 홍수로도 끌 수 없습니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불같은 뜨거움이 비느하스의 마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 어마어마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항상 기도하던 모세가 기도도 못했습니다. 전염병은 계속 퍼져나갔고 여전히 백성들은 바알브올에게 미혹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불처럼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진영에 번지고 있는 죄악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그러자 삽시간에 24,000명을 삼켜버린 전염병이 멈췄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의 수령들 78,600명이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불같은 열정으로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모든 사람을 살렸습니다. 모든 죄악을 잠재웠습니다. 모든 전염병을 잠재웠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도 누그러뜨립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하나님의 심판을 은혜로 바꾸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십니다. 비느하스 후손이 영원히 제사장이 되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손들에게 계속되는 은혜입니다.
성경은 그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라는 말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라는 말이 7절과 11절에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강조는 하나님의 강조입니다. 출애굽기 2장에 모세 출생 기사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레위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가사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출2:1) 모세의 출생스토리에 모세의 부모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둘 다 레위지파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지파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역사에 가장 중요했던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흘러들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집시다. 모든 죄를 잠재울 수 있는 뜨거운 마음, 모든 전염병을 잠재울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집시다.
우리가 바로 이 사랑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불같이 뜨거운 열심히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 가정, 내 자녀들에게 막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등대교회에 막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사람이 되지 맙니다.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가정에 교회에 그리고 사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막힌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됐습니다. 우리도 비느하스처럼 뜨거운 열심을 가집시다. 그 열정으로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은혜로 바꾸는 사람이 됩시다. 오직 은혜만이 이 시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만이 나와 내 가정을 이 저주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 중력과 은혜라는 글이 있습니다.
중력은 자연적 움직임이다. 중력에 반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의감은 중력이다. 정죄함도 중력이다. 비난도 중력이다. 중력의 힘이다. 그 모든 것은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중력에 반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은혜뿐이다. 은혜는 받아본 자만이 안다.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은혜는 용서를 거친다. 용서는 상처와 아픔이라는 틈을 통과해서 온다. 따라서 은혜는 상처의 갈라진 틈으로 비춰지는 한 줄기 빛이다. 은혜는 공평의 법칙을 무시한다. 다소 불공정한 면이 있고, 불공평한 맛도 있다. 은혜는 이해의 벽을 뛰어넘는다. 때로는 논리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은혜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은혜도 개구리처럼 해부할 수 있지만, 해부하는 순간 이미 생명을 잃고 만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중력이다. 중력의 힘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을 지배하는 건 은혜다. 은혜의 힘이다. 성경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이전글 | 하나님께서 성전 문을 닫고 싶어 하시다 |
---|---|
다음글 | 염병 중에 예배를 생각하다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