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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에 개봉한 <컨테이젼(contagio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컨테이젼은 접촉전염, 접촉전염병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처럼 미래 인류에게 있을 수도 있는 바이러스 전염병에 관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맨 마지막에 보면 미치(맷 데이먼)가 카메라를 찾다가 홍콩에 출장 가서 찍은 아내 베스(기네스 팰트로)의 사진을 발견합니다. 이 사진에는 아내가 홍콩에서 호텔 식당 주방장과 악수하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어 있습니다. 그 주방장은 주방에서 돼지 요리를 하던 맨 손 그대로 나와 악수를 한 것입니다. 이 돼지는 박쥐 배설물을 먹고 낳은 새끼 돼지입니다. 이 새끼 돼지가 바이러스의 진원지였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박쥐 병균과 돼지 병균이 결합된 것입니다.
홍콩 출장에서 돌아온 ‘베스’는 고열과 기침, 어지럼증을 보이다가 발작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집니다.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급하게 병원으로 가지만 죽고 맙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아들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엄마에게 감염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픽픽 쓰러집니다. 마른기침, 고열, 발작, 뇌출혈, 그리고 사망 …, 숫자는 1명에서 2명으로, 2명이 4명, 4명이 16명, 그 다음에 수백 수천에 이릅니다. 숫자는 급증해 3개월 만에 전 세계 10억 명이 감염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 미어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하고 말하거나 신체 접촉하지 말아요.” 이 영화의 슬로건이 “아무 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만나지 마라!”입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유행하면서 이 영화 속에서 나오는 대사, 슬로건이 아주 실감납니다. “아무 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만나지 마라!” 사람을 만나고 스치는 것이 무섭습니다. 어제 교회에 소독약이 택배로 왔습니다. 택배 사장님에게 수고하시라고 하면서 사탕을 몇 개 드렸습니다. 사탕을 드리다가 손이 살짝 스쳤습니다. 사장님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요즘은 길에서 누구와 스치는 것도 무섭습니다.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것도 겁이 납니다. 길을 가면 사람들이 다 비켜 가요. 전에는 좁은 길에서 사람들과 스치거나 부딪치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부딪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제 오후에 교회에 있다고 잠깐 밖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깜빡하고 마스크를 안하고 나갔어요. 앞에서 어떤 부부가 오다가 불안했는지 멀리감치 피해서 가요.
요즘 코로나19로 교회가 예배를 중단하고 있습니다. 정부 당국에서 예배 중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예배를 중단하거나 영상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를 강행하면 사람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합니다. “돈 때문이다”, “성도 빼앗길까봐 그렇다”, “제 정신이냐?” 등등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칼럼니스트는 교회가 염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들으면서 저는 ‘우리 교회는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교회가 한 번도 예배를 쉰 적이 없는데’, ‘오늘 우리 시대 교회가 너무 쉽게 예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란 무엇인가?’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시간 예배가 무엇인지 성경에 나오는 예배에 관한 단어를 살펴보며 그 단어 속에 담겨진 예배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예배할 것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예배란 단어 속에 담겨있는 예배의 의미
예배는 예절 예(禮)자에 절할 절(拜)를 써서 <예의와 절> 또는 <예를 표해 절하다>라는 뜻입니다. 상대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존경, 감사, 경의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그리스도인의 예의입니다. 국어사전은 예배를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이라고 했습니다. 국어사전은 예배의 방법에 기도, 성경, 찬송을 꼽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섬김입니다. 영어로 예배를 service라고 합니다. 예배는 말씀, 기도, 찬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이라고도 합니다. worship는 가치라는 뜻의 wor(th)와 신분, ~을 보낸다는 뜻의 ship의 합성어입니다. worship는 어떤 가치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맞는 합당한 가치를 하나님께 합당하게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신약 성경 헬라어로 예배를 지칭하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고누페테오(γονυπετέω)입니다. 고누페테오는 ‘무릎을 꿇다’는 뜻입니다. 예배자의 내적 외적 태도(마음과 몸)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예배자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무릎 꿇음입니다. 그런데 이 무릎 꿇음은 굴종, 비굴의 의미가 아닙니다.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 앞에서 생기는 경외감입니다. 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생기는 겸허함입니다. 둘째, 프로스쿠네인(προσκυνεῖν)입니다. 프로스쿠네인은 ‘경의를 표하다, 절하다, 엎드리다, 입 맞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절을 할까요? 부모에게 합니다. 극히 존경하는 사람에게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입을 맞춥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춥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존경과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절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셋째, 호몰로기아(ὁμολογία)입니다. 호몰로기아는 고백, 시인이라는 뜻입니다. 동의하고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에 찬양, 칭송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배는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아름다운 노래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넷째,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입니다. 라트레이아는 섬김, 예배라는 뜻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며 봉사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에 service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예배는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섯째, 레이투르기아입니다. 레이투르기아는 봉사라는 뜻입니다. 레이투르기아는 사람들(백성)이라는 뜻의 라오스와 일(봉사, 직무)이라는 뜻의 에르곤의 합성어입니다. 두 단어를 합하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다’ 혹은 ‘사람들의 일’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시대의 로마시민의 의무를 규정하는 말입니다. 시민전체 모임이나 종교행사 참여에 관한 시민법뿐만 아니라 국가 행사 참여규정도 여기에 속합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사람들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행하는 국민적 의무로서 봉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를 예배라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시대 사람들은 매일매일 행하는 일상의 일들과 신앙생활에서의 예배를 서로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히브리어에서도 예배를 뜻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자바라는 단어입니다. 자바는 ‘짐승을 죽이다, 도살하다, 제사를 드리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시대 동물 제사를 지칭할 때 쓰였습니다. 구약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자의 희생이 있습니다. 희생이 없는 제사는 무효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희생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동물을 잡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의지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희생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제물이 되셨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둘째, 샤라트입니다. 샤라트는 섬기다는 뜻입니다. 샤라트는 섬김을 받은 대상과 섬기는 자가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주 특별한 예배입니다. 사람들이 무시해도 되는 예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드리라면 드리고 드리지 말라면 드리지 않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특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배 보다 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셋째, 샤카입니다. 샤카는 ‘엎드려 절하다, 경배하다’는 뜻입니다. 숭배, 순종, 봉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넷째, 아바드입니다. 아바드는 ‘경작하다, 일하다, 섬기다’는 뜻입니다.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에게 그 동산을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경작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바드입니다. 그런데 이 아바드라는 단어가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민4:19>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가 할 일(히, 아보다토)과 그가 멜 것을 지휘하게 할지니라
여기 ‘그 가 할 일’에서 일이 히브리어로 아바드입니다. 이 단어는 레위지파 사람들이 성막에서 반드시 해야 할 임무를 의미입니다. 또 아바드가 일반적인 일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레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히, 아보다)도 하지 말지며
여기 노동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바드입니다. 하나님은 일과 예배를 따로 떼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일과 예배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습니다. 일 따로 예배 따로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일과 예배의 정신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온 예배란 단어에 담긴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의 예배에는 하나님에 대한 드리는 자의 최고의 존경과 사랑 경의 섬김 봉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설 명절에 부모님께 절을 합니다. 다른 분에게는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에게만 합니다. 어떤 학자가 ‘절’은 ‘저를’의 축약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절을 한다는 것은 저를 드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예배, 신약성경 헬라어의 예배, 구약성경 히브리어의 예배라는 말에 동일하게 담겨 있는 뜻이 절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최고의 존경과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즉 예배는 기독교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최고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는 기독인의 삶 자체입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예배란 말에는 의무, 일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히브리어에서 일과 예배의 어원이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시대 인물들이 예배를 어떻게 여겼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에게 예배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은 사람과 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하며 삽니다. 일과 사람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은 일하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성도와 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입니다. 일, 예배, 성도 이 세 단어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일은 일이고 예배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은 직장이고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을 따로따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시대 사람들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일터로 나가는 것과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예배는 사람이 결코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강원도 태백시 외나무골에 가면 예수원이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예수원은 1965년에 대천덕이라는 성공회 수도사가 세운 곳입니다. 현재 어린이를 포함해 60여명 정도가 일과 기도를 병행하며 공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수도원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이고 하나는 노동입니다. 대천덕 수도사는 예수원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노동을 하되 하나님 섬기듯 정성을 다 하고, 기도에는 노동하듯 힘을 들여야 한다.” 이 가르침은 베네딕토 수도사의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는 것이 노동”이라는 가르침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천덕 수도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처럼 일을 했습니다. 노동하는 것처럼 힘써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일은 힘써서 하잖아요. 그런데 기도에는 힘을 쓰지 않습니다. 대충 예배하고 대충 기도합니다. 일을 기도처럼, 기도를 노동처럼. 이것이 대천덕 수도사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둘 중에 하나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육과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은 밥을 먹어야 삽니다. 하지만 영은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또 말씀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둘 다 먹어야 합니다. 밥과 말씀은 사람을 지탱하는 두 기둥입니다. 어느 것 하나로만 살 수 없습니다. 육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일하는 존재입니다. 영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예배입니다. 육은 먹고 일하고 쉬면 만족하지만 영은 하나님을 만나야 만족합니다. 일과 예배는 인생을 떠받치는 두 기둥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육적인 것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영적인 것은 너무 쉽게 포기 합니다. 예배는 결코 우리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우리 인생의 기둥입니다. 예배를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입니다.
2. 에녹처럼 예배하라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예배해야할까요? 크리스천은 에녹처럼 예배해야 합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의 365년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동행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할라크입니다. 할라크는 걷다, 산책하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산책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산책하십니까? 아주 가까운 사람과 산책하지 않습니까? 할라크는 부부처럼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저녁 먹은 후에 손을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듯이 에녹이 하나님과 산책하듯 걸어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인생을 하나님과 산책하듯 걸어간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에녹의 믿음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갔을까요? 예배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늘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있었을까요? 늘 교회에서 기도만 하고 있었을까요? 가정도 돌아보지 않고 늘 교회에서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에녹은 삶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300년 동안 아이를 낳으며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22절) 하나님과의 동행과 자녀를 낳은 것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앙과 현실의 삶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정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과 삶에 충실했습니다. 에녹이 얼마나 바빴을까요? 에녹은 자녀를 300년 동안 낳았습니다. 요즘처럼 하나나 둘만 낳고 만 것이 아닙니다. 300년 동안 계속 아이를 낳았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10년에 한 명 낳았으면 아이가 30명입니다. 5년에 한 명씩 낳았다면 60명입니다. 에녹은 얼마나 바빴을까요? 정말 말도 못하게 바빴을 것입니다. 저의 집에 아이가 셋입니다. 방학이 되면 세 아이가 다 집에 있습니다.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합니다. 아침 먹고 나면 점심을 준비합니다. 점심 먹고 나면 저녁을 준비합니다. 중간 중간에 뭐 먹을 것 없냐고 왔다가 갔다 합니다. 정말 바빠요. 방학만 되면 아내가 세 아이의 식사에 간식에 먹는 것 해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방학만 되면 식비가 두 배로 들어요. 그런데 에녹은 40-50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고 돌봤습니다. 얼마나 바빴을까요? 에녹은 족장이었습니다. 자녀들이 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자녀들이 또 자녀를 낳았습니다. 손자, 증손자, 고손자, 5대손, 6대손, 7대손 줄줄이 자녀를 낳았습니다. 아마도 집안 식솔들이 수천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다 통솔했습니다. 정말 바빴을 것입니다. 바쁜 정도가 아니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울고 싸고 다투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쁜 와중에 에녹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안식일마다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삶의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에녹의 삶은 그 자체가 예배였습니다. 일상이 예배였습니다. 에녹은 일을 예배처럼 했습니다. 예배를 일처럼 했습니다. 에녹은 예배자였습니다. 에녹은 삶의 예배자였습니다. 에녹의 예배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표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는 일입니다. 일이 예배입니다. 일상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일상입니다. 이것이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원하셨던 삶입니다. 예배와 일, 일상의 삶이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에녹처럼 하나님께 예배자로 나아갑시다. 예배시간에만 하나님께 나아가지 마시고 삶 속에서 삶의 예배로 하나님께 나갑시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산책하는 예배자의 삶을 삽시다.
요즘 코로나19로 예배를 안 쉬는 대형 교회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예배를 쉬지 않는다. 신도 빼앗길까봐 예배를 쉬지 않는다. 전염병 진압에 교회가 발목을 잡는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칼럼니스트는 교회가 염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이 전염병의 원인이 교회 때문입니까? 누구 탓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를 탓하자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전혀 막지 않는 정부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벌어진 일을 교회 탓으로 돌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한 여름에 창문 방문 현관문 다 열어놓고 모기를 잡으면 모기가 없어집니까? 교회가 그렇게 코로나 위험지역입니까? 마트, 백화점이 더 위험하지 않습니까? 식당이 더 위험하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얼굴 맞대고 일하는 사무실이 더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교회만 문을 닫으라고 강요를 하나요? 밤새도록 술 마시고 춤추고 노는 클럽은 문을 닫지 않습니다. 마트에서 간염된 것은 어쩔 수 없고 교회에서 감염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까? 어제 경남 창원시 의창구청에서 각 교회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300만원 벌금이라고. 다른 곳에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교회에만 보냈습니다. 삼성전자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확진자가 나오면 3일간 그곳을 폐쇄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2주간을 폐쇄합니다. 왜 2주간을 폐쇄해야하지요? 메르스 때 38명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교회를 닫지 않았습니다. 교회 탓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에 예배드리지 말라고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배를 드리면 교회가 욕을 먹어야 하나요? 교회를 왜 희생 제물로 삼나요? 왜 화살을 교회로 돌리나요? 박정희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당시에도 교회 예배를 못 드리게 한 적은 없습니다. 군부 독재 시절 목사님들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가기는 해도 교회 문을 닫게는 안 했습니다. 심지어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강요하던 때에도 예배를 못 드리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는 예배를 못 드리게 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코로나19로 교회가 비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현재까지 예배인원이 56퍼센트가 줄었습니다. 반 이상 줄어든 것입니다. 설문 조사에서 앞으로 코로나19가 계속된다면 80퍼센트가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20퍼센트만이 코로나19가 계속 되도 교회를 계속 가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예배 때문에 코로나19로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심각하게 문제된 것이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혹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앞장서서 전염병을 예방을 해야 합니다. 예방의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방을 핑계 삼아 너무 쉽게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의무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요?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 신앙생활이 최고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마크 립시치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 24일 미국 시사주간지 애틀랜틱에 기고한 칼럼에서 “많은 사람이 가볍게 증상이 있거나 무증상일 수도 있지만 향후 1년간 전 세계 인구의 40~70%가 코로나19에 걸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립시치 교수뿐 아니라 다른 역학자들도 비슷하게 주장했습니다. 다른 역학자들은 코로나19가 계절마다 반복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립시치 교수는 “코로나19 사태가 지금처럼 계속 심각하다면 사람들은 겨울을 ‘감기와 독감의 계절’이 아닌 ‘감기와 독감과 코로나19의 계절’로 부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겨울마다 코로나19가 유행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최평균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월 28일 “이전에 새로 들어온 바이러스 경험을 비춰보면 최악의 경우 전 국민의 40%까지 감염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만약 학자들의 주장이 맞게 된다면 1년 동안 교회 문을 닫아야 하나요? 겨울철 코로나가 유행할 때마다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나요? 이것이 교회인가요?
지난 며칠 전에 교회 복도에 있는 카랑코에에 노란 꽃이 세 송이 피었습니다. 작년 봄에 꽃이 다 진 다음에 화분을 베란다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벌레가 잎을 갉아먹는 거예요. 가만히 살펴보니 배추벌레가 잎 사이에 여러 마리가 있어요. 잡아도 잡아도 벌레가 계속 나와요. 그런 중에도 카랑코에는 계속 자라는 거예요. 지금도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이 잎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여름, 가을 그리고 추운 겨울이 지났습니다. 겨울 내내 햇볕 좋은 창틀에 올려놓았더니 2월 중순에 노란 꽃이 한 송이 피었어요. 너무 신기하고 기특한 거예요. 오다가다 그 노란 꽃을 보면서 ‘너는 이 난리 중에도 네 할 일을 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잎에 벌레의 흔적이 있는데 노란 꽃이 핀 거예요. 앞으로 꽃이 계속 필 것입니다. 큰물이 뛰놀든지 바람이 세차게 불든지 전염병이 창궐하든지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합시다. 우리의 갈 길을 갑시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배자입니다. 예배를 포기하지 마세요.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에녹처럼 예배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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