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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여기 ‘실상’이라는 단어가 헬라어(휘포스타시스)로 실체, 본질, 확고함, 보증,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무언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 바라는 것은 허상입니다. 무언가를 바라려면 믿음으로 바라세요. 믿음없이 그냥 바라지 마세요. 꼭 믿음으로 바라세요. 믿음으로 바라지 않는 것은 다 안개와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11:2에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입니다. 문제의 해결, 인도하심, 장래의 소망, 승리의 삶, 은혜와 평강, 천국 등등. 그러면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간절히 바라신 적이 있으십니까?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은 임마누엘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없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을 바란 사람이기도 합니다. 참 이상하죠? 칸트는 ‘요청으로서의 신’을 주장합니다.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볼 때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합니다.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있고 내 마음에는 반짝이는 양심이 있다.” 이 양심은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명령의 형태로 옵니다. 이것을 명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싶어 하고, 하라는 것은 안 하고 싶어 해요.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요. 여기에 책임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보상과 보응이 있습니다. 명법에는 가언명법과 정언명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가언명법은 조건부 명법입니다. 예를 들면 ‘착한 일을 하면 칭찬 받겠지!’라고 생각하고 착한 일을 하는 거예요. 공부를 하는데 혼나지 않으려고 공부하는 거예요. 이게 가언명법입니다. 가언적 명령은 조건적입니다. 정언명법은 옳은 일이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 다른 이유 없어요.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아요. 이것을 정언명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상과 보응이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가 양심에 따라 사는지 몰라요. 사람은 속이고 감춥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해요. 그 존재가 신이라는 거예요. 사람은 반드시 영혼불멸해야 해요. 살아 있을 때 보상이나 보응을 받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 해요.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칸트의 신관입니다. 도덕적 신과, 요청된 신관입니다. 칸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모든 이치가 옳은 대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칸트는 철학, 도덕, 양심 때문에 신의 존재를 필요로 했어요.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다는 이 세상의 불편한 진실 때문에 신의 존재를 요청한 철학자가 칸트입니다.
주기도의 두 번째 간구는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 여기에 오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바라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도덕, 윤리, 양심, 불법, 불의, 포악, 강포, 거짓, 위선, 위조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죄악, 불법, 불의를 보고 가슴 아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오기를 소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철학자가 신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 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이 오시기를 갈망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의 두 번째 간구인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토대로 두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나라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임한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당신의 그 나라
먼저, 주기도에 말씀하신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또 이 나라는 누구의 나라일까요? 이 나라는 ‘아빠의 나라’입니다. 우리말 주기도문 ‘나라가 임하시오며’ 바로 앞에 ‘당신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우리 정서를 고려해 ‘당신의’라는 말을 생략한 것입니다. 즉 나라는 ‘당신의 나라’입니다. 여기 당신은 아빠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소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여기 아버지가 헬라어 파테르로 되어 있습니다. 이 파테르(πάτερ)는 아람어 아빠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아빠의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마귀의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빠가 주인이신 나라입니다. 우리 아빠의 소유된 나라입니다. 내 아빠께 속한 나라입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아빠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는 살기 부담스럽고 어려운 나라가 아닙니다. 정말 친근하고 편안한 아빠의 나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 가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부담스럽습니다. 좋은 집일수록 더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좋은 집 보다 더 부담스러운 집이 있어요. 거실 바닥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입니다. 거실 탁자에 먼지 하나 없는 집입니다. 그런 집은 더럽힐까봐 조심스러워요. 그 나라는 이 땅의 집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습니다. 더 깨끗합니다. 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한없이 편안합니다.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왜요? 우리 아빠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아빠이신 분이 주인이신 나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땅에 아빠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아빠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합시다.
당신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시편106:5에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시편 145:11에도 “그들이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업적을 일러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의 나라’라는 말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당신의 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주의 나라’라는 말이 5회 나옵니다. 히브리 성경 원문에는 5번 중 4번이 ‘당신의 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45:6, 145:13). 1회는 그의 나라(145:12)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 성경의 주의 나라(당신의 나라)가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13:20에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픈 것입니다.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나라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 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을 치료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나라’라는 말이 헬라어로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입니다. 바실레이아(신약-155번)의 뜻은 ‘왕권, 왕령, 왕국, 왕토’입니다. 바실레이아는 왕의 땅, 왕의 나라, 왕의 명령이 미치는 범위, 통치권, 지배권 등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나라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왕국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우리말 성경에는 대부분 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딱 한 번만 왕국으로 번역했습니다. 사도행전12:20절에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왕국은 왕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당신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통치가 있는 나라입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어려움 중에 많은 부분이 사람 왕의 잘 못된 통치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를 망치려는 지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가 노력하고 애쓰지만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왜요? 사람 왕은 안 됩니다. 사람 왕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오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원문 주기도문에는 ‘나라’ 바로 앞에 ‘그’라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당신의 그 나라’입니다. 갑자기 생긴 나라가 아닙니다. 이전부터 있는 나라입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영원 전부터 있었습니다. 시편 145:13에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7:18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나라는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있는 피조물도 잠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아버지와 영원히 사는 존재들입니다. 제가 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느끼는 기쁨은 잠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잠깐입니다. 정말 짧습니다. 반면에 수고와 애씀은 계속됩니다. 고통의 순간은 기쁨의 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깁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기쁨이 계속됩니다. 고통이 없습니다. 수고와 애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가 오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천국입니다. 천국이 ‘하늘나라’라는 말입니다. 땅의 나라가 아닙니다. 당신의 나라를 마태는 천국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마태복음 13:11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천국이라는 말이 37번 나옵니다. 그중에 마태복음에만 36번 나옵니다(딤후4:18에는 천국).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땅의 나라가 아닙니다. 유한한 나라가 아닙니다. 초월적인 나라입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몸은 땅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나는 것을 먹으면 만족합니다. 우리 영혼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나는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동물은 영혼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의 것만 먹도 만족합니다. 배만 부르면 돼요. 하지만 사람은 땅의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밥만 먹어서는 안돼요. 그래서 이 땅에 하늘나라가 오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에 말씀하신 나라는 아빠의 나라입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왕국입니다. 영원하고 영원하고 또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땅의 나라, 세상 나라, 마귀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그 나라가 오기를 기도해아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그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강포, 불법, 슬픔, 눈물이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2. 이 땅에 오게 하소서
두 번째, “임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여기에 없는 천국이 기도하면 여기로 내려오는 것이구나!’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천국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이 언제 임합니까?”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눅10:9)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 못하는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이미 천국이 너희 가운데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서 곧 내려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천국이 내려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온다는 천국이 도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다.”
<눅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안에’라는 말이 헬라어로 엔토스입니다. 엔토스(ἐντός)는 ‘~ 안에’(within), ‘~ 가운데’(among)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안에’는 ‘너희 가운데’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천국이 너희 마음 속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천국이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은 제자들 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어디로 올까요? 우리 마음 속으로 옵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 가운데 옵니다. 아니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기도하면 오고 기도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우리 마음 속에 와 있습니다.
틀림없이 천국은 미래의 어느 날 우리가 죽으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5:20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죽으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우리 마음 속에, 우리 가운데에 천국이 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오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와 있습니다. 만약 천국이 죽어서만 가는 나라라면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기만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우리에게 오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기만 하지 마세요. 생각만 하지 마세요. 천국을 누리며 사세요. 천국은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습니다.
조선조 중엽 충북 충주에 고비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실제인물입니다. 선조(先祖)의 제삿날마다 '지방'을 다시 쓰는 종이가 아까워서 한번 썼던 것을 기름에 절여서 두고두고 다시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절인고비’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변해서 ‘자린고비’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도 반찬을 사 먹지 않으니까 이웃 사람들이 새우젓 한 단지를 고비의 집 울안에 살짝 들여 놓았습니다. 자린고비는 “어어 밥 도둑놈이 들어왔네. 이놈의 새우젓이 있으면 밥이 헤퍼서 못 써”라고 하며 다시 집 밖으로 내 보냈다고 합니다.
하루는 자린고비가 국 맛이 좋았습니다. 며느리에게 국 맛이 좋은 까닭을 물었습니다. 며느리가 “오늘 반찬장수가 왔길래 사는 척 하고 이것저것 만져만 보다가 그냥 보내고 '손'을 '국솥'에다 씻었더니 국 맛이 이렇게 좋네요.”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자린고비 노발대발합니다. “살림을 그렇게 헤프게 하면 못 써. '손'을 우물에다 씻어 넣었으면 두고두고 맛있게 먹을 게 아니냐?”라며 아쉬워했습니다. 어느 날 자린고비가 장에 갔다가 큰 맘 먹고 굴비를 한 마리 사 왔는데 소금이 덕지덕지 붙어 보기만 해도 짠 굴비였습니다. 이것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가락 입에 넣고 굴비 한 번 쳐다보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겸상으로 아들과 밥을 먹는데 아들이 두 번 쳐다보니 호통을 칩니다. 밤에 자다가 물켜려고 두 번이나 쳐다보느냐고 했습니다. 자린고비는 사람들이 주어도 먹지 않습니다. 있어도 먹지 않습니다. 굴비가 있으면 뭐합니까? 천정에 달아 놓고 먹지 않는데. 바라보면 짠 맛이 납니다. 고기 맛이 납니까? 먹어야지 맛있죠? 천국은 천장에 달아놓고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가는 게 아니에요. 누리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이 땅에서 천국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가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예레미야 23:24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처럼 천국은 온 세상에 충만합니다. 천국이 여기는 있고 저기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우리 속에 와 있습니다. 온 세상에 충만하게 와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천국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공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저 밖에도 있습니다. 천안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충만합니다. 일본에도 있습니다. 북한에도 있습니다. 중국에도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기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천국은 여기에 있습니다. 저 밖에도 있습니다. 일본에도 와 있습니다. 북한 땅에도 와 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천국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천국이 밝히 드러나도록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천국은 묻혀 있습니다. 가루 서 말 속에 있는 누룩처럼 천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천국은 드러나야 합니다. 천국이 드러날 때 이 땅에서 우리는 천국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어떻게 천국이 드러날까요? 답이 오늘 말씀에 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이 땅에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이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천국이 우리 중에 들어나게 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기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와 같습니다. 열고 들어가면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이 나옵니다. 그 열쇠를 가지고만 계시지 마세요. 그 열쇠를 쓰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세요. 그래야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일곱 가지 간구가 있습니다. 앞에 세 가지는 하나님을 위한 간구입니다. 뒤의 네 가지는 우리 사람을 위한 간구입니다. 그런데 뒤의 것만이 아니라 앞의 것 또한 우리를 위한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때 우리에게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질 때 우리에게 참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그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한 것입니다. 기도의 열쇠를 사용하지 않으면 은혜가 있어도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천국은 구경하다가 죽으면 가는 하늘에 매달려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천국을 기도로 누리세요. 자린고비 크리스천이 되면 안 됩니다. 천국이 있으면 뭐합니까? 입맛만 다시는데. 은혜가 있으면 뭐합니까? 목이 마른데. 은혜를 천정에 매달아 놓고 쳐다만 보면 영혼의 만족이 있나요? 그 은혜를 먹어야 만족이 있죠. 성경책을 책상에 놓고 매일 바라보면 은혜가 옵니까? 펼쳐서 읽어야 은혜가 있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먹고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와 가운데 있는 천국을 누리세요. 그래야 사람들이 천국 구경을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란 우리 중에 있는 천국이 드러나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찬양을 드립니다. 기도를 합니다. 성도의 교제를 합니다. 왜 예배를 드릴까요? 왜 기도하고 찬양을 할까요?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교우에게 천국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세요. 지옥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우리가 사람들에게 천국을 보여줄 때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누구입니까? 이 땅에 기도로 천국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교회를 다니고 싶어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천국이 밝히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이 땅에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은 주님의 소원입니다.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합시다. 그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갈망합니다. 그 나라는 공평의 나라입니다. 시편45:6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불의, 불법, 불공평, 패역, 강포, 강탈, 음모가 가득한 이 세상에 그 나라가 임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게 합시다. 크리스천은 기도로 이 땅에 그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천은 천국생활로 그 나라를 이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 주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이 땅에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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