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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주기도문 강해6 - 가장 위대한 기도의 머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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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6:9
주일오전예배 | 2020-01-26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개구리는 신체 기관 중에 머리가 먼저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머리에서 꼬리가 나오고 꼬리에서 다리가 나옵니다. 개구리는 머리가 먼저 생깁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이 먼저 생길까요? 제가 산부인과 의사에게 문의를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은 처음부터 통으로 생긴답니다. 작지만 손과 발 머리가 동시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제가 연거푸 머리가 먼저 생기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 몸은 전체가 하나입니다. 따로 따로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이 먼저라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도 중심은 있습니다. 몸에 팔과 다리가 달려 있습니다. 몸이 다리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머리는 몸에 붙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몸이 머리에 붙어 있는 것일까요? 아주 애매한 물음입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 물어봤더니 머리가 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우리 몸의 구조를 보면 머리가 몸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머리, , 다리가 몸통을 중심으로 위, 좌우, 아래에 있습니다. 몸이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런 몸의 구조를 생각하면 머리가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저는 몸이 머리에 붙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뇌가 모든 신체 기능을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태아의 신체 중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기 시작하는 부분이 뇌입니다. 또 인간의 뇌는 돌이 되기 전까지 거의 다 자랍니다. 하지만 나머지 신체 기관은 25세 전후까지 자랍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뇌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몸의 중심은 뇌라고 생각합니다. 구조적으로 몸통이 가운데에 있지만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은 머리입니다. 뇌가 가장 중요합니다. 머리가 먼저입니다. 모든 신체는 머리의 지시를 받습니다. 몸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도 머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 기도는 모든 기도의 머리입니다. 이 시간에 기도의 머리가 되는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머리 기도

주기도문에는 일곱 가지 간구가 있습니다. 일곱 중에 앞의 셋은 하나님을 위한 간구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당신의) 나라가 임하는 것,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뒤의 넷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입니다.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시험에 들지 않는 것, 악에서의 구원입니다. 이 일곱 가지 간구 중에 첫 번째가 “(당신의) 이름의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천국에는 마귀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없습니다. 악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천사와 같을 것입니다. 더 이상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 직장, , 집 때문에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더 이상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와 시험에 들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두 번째 간구인 나라가 임하는 것, 세 번째 간구인 뜻이 이루어지는 것도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노래는 영원히 계속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기도가 첫 번째로 온 이유입니다. 첫 번째라는 것은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라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으뜸이 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 중에 으뜸이 되는 기도를 꼭 하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기도는 이 기도 다음에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기도는 이 기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기도는 이 기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계란에는 겉껍질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흰자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노른자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핵이 있습니다. 그리고 노른자 한 쪽에 배아원반이 있습니다. 계란은 이 외에 기실(공기방), 안쪽 세포막, 바깥 세포막, 알끈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배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배가 나중에 병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노른자에서 병아리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노른자가 중요합니다. 그래도 노른자는 그냥 영양분일 뿐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계란의 배와 같습니다. 이 기도가 진짜입니다. 이 기도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기도에 영원이 있습니다. 나머지 기도는 첫 번째 기도를 받쳐주는 받침과 같습니다. 첫 번째 기도는 배를 움직이는 키와 같습니다. 키가 있어야 차가 움직입니다. 이 기도의 키로 기도를 운전하세요

바느질을 할 때 실은 바늘이 가는 대로 따라갑니다. 실이 앞에 가지 못합니다. 첫 번째 간구는 바늘과 같습니다. 나머지 6가지 간구는 실과 같습니다. 여섯 가지 간구는 첫 번째 간구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간구가 앞에 있으면 안 됩니다. 셔츠에 단추가 있습니다. 정신없이 옷을 입다보면 단추가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단추를 두 번째 구멍에 채웠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첫 번째 단추는 첫째 홈에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나머지가 제대로 맞아 돌아갑니다. 우리의 삶에 급박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무수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 보다 더 급한 문제는 없습니다. 화가 나도 참아야 합니다. 급해도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기도 정신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저희 학원으로 오세요.

자녀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냥 집으로 가세요.

저렴하고 수준 높은 학원을 원하시면

저희 학원뿐입니다.

공부만을 강조하시는 것은

아무소용 없습니다.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력은

소중합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만

신경쓰지 않습니다.

내성적인 학생이나 왕따 모두

챙깁니다.

촌지는 절대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무모들의 관심은

꼭 필요합니다.

학생들은 저희에게

믿고 맡기세요.

 

위의 글은 위에서 아래로 읽는 것입니다. 밑에서 위로 읽어보세요. 우습게 됩니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가 바뀌면 아주 우습게 됩니다. 우리는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순서, 질서대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순서, 질서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6:33)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삶에 순서를 지키세요. 그리고 기도의 순서를 지키세요. 신앙의 순서를 지키세요.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입니다. 머리 자리에는 머리가 있어야 합니다. 머리 자리에 다리가 있으면 안 됩니다. 머리의 자리에 팔이 있으면 안 됩니다. 팔의 자리에 머리가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는 머리 기도입니다. 첫 번째 기도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영어로 GOD라고 합니다. GOD을 거꾸로 읽으면 DOG가 됩니다. 사람이 존귀합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2. 그 이름의 신비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신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아주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시편 91:14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신비를 알아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배웠습니다. 저도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일까요? 이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계시된 과정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80세의 노인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십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세 가지 시제로 계시하십니다. 첫째, 과거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현재와 관련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현재의 고통에서 건져주실 분이십니다. 셋째, 미래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분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 시제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 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신을 떼어 놓고 생각합니다. 따로 따로 생각해요. 하나님과 나 자신을 떼어 놓고 생각하마세요. 친구는 안보면 멀어집니다. 부부도 헤어지면 끝입니다. 이것이 사람 관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명심하세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너희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십니다.  

<3:14-15>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여호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스스로 생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셨는지 그 존재의 양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는 이름이 아닙니다. 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을 직역하면 나는 나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는 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 나는 나야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가 보냈다라는 말은 나라는 분이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와를 당신의 영원한 이름이라고 하셨습니다. 야호와는 이름이면서 이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에는 아주 놀랍고 신비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시지 않고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다 이름이 있습니다. 또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단어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분입니다. ‘나는 나야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신비입니다.  

삼손의 출생 스토리가 있습니다. 사사 시대 어떤 노부부에게 아들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삼손 부모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때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하십니다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기묘는 히브리어로 펠레입니다. 펠레는 경이롭다. 불가사의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사람에게는 기묘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기묘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어떤 일을 하실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시작과 끝은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묘입니다. 신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증거합니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의 이름은 정말 놀라운 신비입니다.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40년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까 즉시로 일어나 걷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병든 자가 치료 받아요. 예수 이름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요. 정말 신비하지 않아요. 어떻게 이름만 대면 병이 치료될까요? 하나님의 이름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신비를 경험하세요. 오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의 신비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사도 성도도 하나님의 이름의 신비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의 신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의 신비를 회복하세요. 예수 이름 의지해서 기도해보세요. 예수 이름을 묵상해보세요. 예수 이름을 깊이 생각해보세요. 예수 이름을 사랑해보세요. 그러면 그 이름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입니다. 두 번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입니다. 세 번째가 칼빈의 기독교강요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 한 분이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저서를 쌓으면 우리 키만큼 된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엄청난 양의 책을 쓴 사람입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은 읽기도 아주 어려운 전문 서적입니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왕, 천사적 박사라고 불린 학자입니다. 1273126일 니콜라스 채플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는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아주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가 무슨 체험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부터 그는 신학서적을 더 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썼던 모든 것이 나에게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술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놀라운 체험을 기록해 놓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신비로워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 않았을까요? 사도 바울이 천국에 올라갑니다. 그 체험을 고린도후서 12장에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체험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큰 체험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의 신비를 회복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을 구별하라

셋째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깨끗함, 성스러움, 신비로움 등입니다. 이 깨끗함과 성스러움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리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깨끗함을 포함한 분리, 구별, 나누어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다는 말이 신약성경 헬라어로는 하기아조(ἁγιάζω)입니다. 하기아조는 성별하다, 거룩하게 하다, 깨끗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 히브리어로 거룩하다는 말이 카도쉬입니다. 카도쉬는 거룩하다, 구별하다, 분리하다는 뜻입니다. 모두 분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성경에서 거룩의 중심 개념은 구별, 분리입니다. 분리되지 않으면 거룩할 수 없습니다. 구별없는 거룩은 거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 성전에서 사용되는 기구나 물건은 올리브기름을 발라 따로 구분해놓았습니다. 이렇게 구별된 물건은 하나님을 위한 일 이외에 다른 어떤 용도로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다른 물건과 섞지도 않았습니다. 일반 생활 용품처럼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중에서 끊어졌습니다. 거룩은 철저한 구별, 완전한 분리입니다.   

이런 언어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라, 민족, 지역에 따라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따로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8백만 개의 신이 있습니다. 인도에는 33천만 개의 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간설화에도 마당신, 방신, 다락방신, 아궁이신, 부엌신, 석가래신, 나무신 등 수 백 개의 신이 있습니다. 한 집, 한 공간 안에도 많은 신들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 십, 수 백 억 개의 잡신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떤 신과도 구별되시는 분이십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 가짜 신과 구별하라는 말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가 20(-3, -11, -6) 나옵니다. 이 중 19번이 귀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 귀신은 더러운 존재입니다. 온갖 악한 것으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다르십니다. 하나님께는 깨끗함, 순결함, 성스러움 등 우리가 모르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같이 대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구별하세요. 마음으로 하나님을 다른 모든 신들과 분리하세요. 우리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입니다.   

안산제일교회 고훈 원로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고훈 목사님이 목회하실 때 지역 신문사의 주관으로 목사님 두 분과 스님 세 분이 오찬 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불교 대표로 스님이 먼저 기도하고 기독교 대표로 고훈 목사님이 기도했습니다. 스님이 진지하게 국가와 시정을 위해 기도를 하고 마지막에 하나님과 부처님 이름 합하여 기도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고훈 목사님은 아멘이라고 할 뻔했다고 합니다. 고훈 목사님이 기도할 차례가 되어 조국과 국가 안정을 위해 기도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 스님들과 기도회 갖기가 두려웠다고 합니다. 이것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고훈 목사님은 누구 이름으로 기도한들 무슨 소용인가. 기도만 하면 됐지. 승려인 나도 하나님 이름 넣고 기도했으니 목사인 당신도 부처님 이름 넣고 기도하시오.”라고 요구하는 듯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부처님 공자님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도덕군자 중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다른 신과 동일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많은 신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두 번째, 우리 자신을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해야 합니다.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독불장군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유별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구별되는 바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역시 달라!” 이런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어도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이 똑같습니다. 말과 행동이 똑같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 검색하다가 반기독교 사이트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설문 조사 중에 이런 문항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아름다웠던 종교이 말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달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에이 교회 다니는 것들도 똑같아!”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나를 구별합시다. 내 삶을 구별합시다. 내 말을 구별합시다. 내가 있는 장소를 구별합시다. 아무데나 가지 맙시다. 먹는 것을 구별합시다. 보는 것을 구별합시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달라!”, “저 사람 교회 다니더니 달라졌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나를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어떻게 중보자가 될 수 있을까요? 거룩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어떻게 축복할 수 있을까요? 거룩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이 새겨진 패를 항상 띠고 있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들에게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거룩은 제사장의 존재 이유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에 흘러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할 때 하나님의 복이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구별했습니까? 하나님이 구별하셨습니다. 성도에게는 두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별하신 것처럼 나도 내 자신을 세상에서 구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라고 합니다. 이사야 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 사람에게 큰 복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의 기준입니다. 역사 이래 이 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기도의 첫 번째 간구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첫 번째라는 것은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은 기도 중에 백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죠?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이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면 가장 위대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만약 기도 중에 이 기도를 한 적이 없다면 가장 위대한 기도를 빼먹은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 이 가장 위대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96: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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