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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천국 문 앞에 도착했는데 천사가 가로막으며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어거스틴이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그리스도인 어거스틴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너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으로 가득 찼구나!” 결국 어거스틴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어거스틴은 통곡을 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지나온 삶을 조용히 돌아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또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고 어떻게 돌이켰는지를 아주 자세하고 솔직하게 글로 남겼습니다. 이것이 ‘참회록’입니다. 속에 있는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냅니다. 여러분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돈, 명예, 자랑, 이기심, 정욕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는 존재일까요?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위에 것을 찾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1절 “위의 것을 찾으라”, 2절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찾는다’는 말은 아주 집요하고 열성적으로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에 것은 하늘의 것, 신령한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 것, 하늘의 것을 아주 열성적으로 찾는 존재들입니다. 저 위에 것을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찾으세요. 끝까지 붙들고 계세요. 그러면 왜 우리는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찾는 존재일까요? 바울은 본문에서 왜 우리가 위에 것을 찾는 존재인지 네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죽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시 살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넷째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이 네 가지가 그리스도인이 위에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네 가지를 순서대로 살펴보며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영적 메시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 완전히 죽었다
먼저 죽었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3절에 “너희가 죽었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말이 헬라어로 ‘아포드네스코’(ἀποθνῄσκω)입니다. 아포드네스코는 ‘죽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완성, 분리, 중지, 역전, 출발’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ἀπό)와 ‘죽다, 사망하다, (은유적으로) 영적으로 죽다’의 뜻을 가진 ‘드네스코’(θνῄσκω)의 합성어로 ‘완전히 죽다, 죽음으로 완성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가짜 죽음이 있고 진짜 죽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죽음을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혼자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완전한 죽음입니다.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적당한 죽음이 아닙니다. 조금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는 시늉을 낸 것도 아닙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습니다. 양손에 커다란 못이 박혔습니다. 발에도 못을 박았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썼습니다.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자신에게 침을 뱉고 때리고 모욕하던 사람들에 대한 미움, 분노가 단 1도 없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미움과 분노도 함께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 욕망도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사람을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나누었습니다. 옛 사람은 믿기 전에 죄에 끌려 다니며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던 나를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 혈기, 시기, 질투, 미움, 욕심, 분쟁, 정죄, 불의, 추악, 수군수군하는 마음은 우리를 죄에 종노릇하게 합니다. 내가 죽었다는 말은 내가 믿을 때 나의 육신적인 옛 사람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새 사람은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나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이 죽은 사람입니다. 미워하지 마세요. 미워하는 것은 옛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정말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어요. 미워해도 이해해요. 미워해도 사람들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아요. 미워해도 되요. 세상에는 그럴 만한 정말 나쁜 사람이 있어요. 그래도, 그래도 크리스천은 미워하면 안 돼요. 그것은 다시 죄에 종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미움을 부활시키는 거예요. 미움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사형 당했습니다. 수군수군하지 마세요. 정죄하지 마세요. 시기하지 마세요. 분내지 마세요. 옛 사람으로 돌아가지 마세요. 십자가 이전으로 돌아가지 마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지 마세요. 나의 믿음을 쓸모없게 만들지 마세요. 세상 정욕, 옛 사람을 부활시키지 마세요. 그냥 새 사람으로 사세요. 우리는 옛 나에 대해 완전히 죽은 새 사람들입니다.
분당에 가면 한신교회가 있습니다. 한신교회는 고 이중표 목사님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신학으로 유명합니다. 별세는 ‘세상과 헤어진다. 세상을 떠난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별세신학은 죽음의 신학입니다. 별세신학은 세상과 헤어지는 신학입니다. 크리스천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세상과 헤어져야 합니다. 죽지 않아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과 헤어지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의 삶’, ‘별세의 신학’, ‘별세의 목회’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중표 목사님이 별세의 신학을 외친 계기가 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분노를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문제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술만 드시면 행패를 부렸습니다. 길바닥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목회하면서 그대로 표출되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한신교회를 개척하기 전 한 교회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자신의 설교를 건성으로 듣고 설교를 빈정되던 성가대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설교를 빈정댔습니다. 화가 난 이중표 목사님은 설교 도중에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성도를 향해 성경책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 일로 이중표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사임하게 됐습니다. 그 후 이중표 목사님은 눈물로 기도하면서 마음 속에 분노를 치료했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별세신학을 외쳤습니다. 후대의 목회자들이 이중표 목사님을 죽어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죽어서 행복한 사람이 됐습니다. 죽어서 성공한 사람이 됐습니다. 크리스천은 별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존 헌터라는 생리학 교수는 “누구든지 화를 내게 되면, 화를 내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앞에 앉은 한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헌터 교수의 강의를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의 반박을 받은 헌터 교수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급기야 심장마비를 일으켜 강의 도중에 쓰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강의한 대로 화를 내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것을 임상실험으로 직접 보여준 경우가 되었습니다. 이거 웃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이 글을 읽으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구한말 황해도 안악군에 악명 높은 깡패 한 명이 있었습니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돈을 내라 하면 술상을 엎어 버렸습니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때리고 돈을 빼앗습니다. 사람들은 행여나 길에서 그 깡패를 만날까 노심초사했습니다. 얼마나 불안했는지 사람들은 성황당에 가서 그 깡패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에게 그 깡패가 죽었다는 부고장이 날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나쁜 짓만 골라서 하더니 속이다 시원하다며 이젠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 깡패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던 깡패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모두 이젠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어서 사색이 되어 앉아 있는데 깡패가 아주 의외의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동안 저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김익두는 나중에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다가 1950년에 인민군에게 총을 맞아 순교했습니다. 깡패였던 김익두가 죽어서 한국 교회사에 큰 별이 되었습니다. 걱정, 미움, 분노, 시기, 정죄 등 육신의 삶이 얼마나 죽었습니까? 삶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죽으면 됩니다. 죽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죽으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죽어야 행복합니다. 크리스천은 죽어서 사는 존재입니다. 크리스천은 죽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크리스천은 죽어야 행복합니다.
2. 살리심을 받았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1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 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산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2천 년 전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여기 ‘함께 다시 살다’라는 말이 ‘함께 살아나다’, ‘함께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의 시제가 ‘부정 과거’입니다. 부정과거는 과거에 이미 동작이 끝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미 완성된 동작입니다. 우리는 죽었었습니다. 그런데 믿을 때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일어난 사람들이예요.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된 거예요. 내 인생의 행복, 내 인생의 목표, 내 인생의 의미가 부활한 것입니다.
또 부정과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이미 일어난 사건처럼 과거 시제로 표현하는 용법입니다. 반드시 일어날 미래 사건을 부정 과거 시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2에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무너졌도다”가 부정 과거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로마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로마는 아주 찬란할 때였습니다. 결코 망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로마가 무너졌다’라고 했어요. 왜 부정 과거형을 썼을까요? 로마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부정 과거는 너무 확실한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실리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과거에 다시 살아났고 미래에도 반드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너무 확실한 거예요. 과거에 우리가 믿을 때 영혼이 부활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우리 몸이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부활과 미래의 부활 사이에서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거예요. 부활은 과거적인 것입니다. 동시에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적인 것입니다.
<요5: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부활은 소망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부활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부활을 지금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미래 어느 날부터 함께 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부활을 누리는 삶을 사세요. 오늘은 주일입니다. 주일은 오늘 하루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주에도 지킵니다. 그 다음 주에도 지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이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부활절 예배를 지키는 것입니다. 매일 부활절입니다. 부활은 현재형입니다. 성경은 현재형입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8:5에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는 거예요. 미래에 살지 마세요.
옛날에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의 이름을 손을 들고 한명씩 이야기 해 볼까요?”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저는 맥아더 장군을 가장 존경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손을 들더니 ‘저는 트루먼 대통령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다른 학생이 저는 ‘윈스턴 처칠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한 학생이 ‘선생님 저요!’ 하면서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래, 친구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누구죠?’라고 묻자 ‘네, 저는 예수님을 가장 존경합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야, 살아계신 분 중에서 말하라고 그랬지 누가 돌아가신 분 말하라고 했냐?’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도 ‘그래요, 옛날 사람 말고 지금 살아계신 분 중에서 말해 보세요.’ 그러자 학생은 아이들과 선생님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3. 감추어지다
세 번째로 감추어졌다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했습니다. ‘감추어졌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크륍토’입니다. 크륍토는 ‘덮다, 감추다, 숨기다, 비밀로 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은 천국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하나님의 덮개로 덮어놓으셨어요. 이 덮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치울 수 없어요. 가장 안전한 덮개예요. 예수님을 믿으시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가장 안전한 덮개로 덮여진다는 거예요. 이 덮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의 덮개입니다.
<겔16: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덮개로 덮어진 사람들입니다. 나오미란 여인이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모압에서 두 아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죽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도 죽었어요. 사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나오미는 첫째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고엘이라는 법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족이 아들이 없이 죽은 형제의 처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고엘은 “값을 주고 되찾다, 구속하다”의 뜻입니다. 또 “기업 무를 자”라는 뜻입니다. 고엘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룻의 근족 중에 하나가 보아스이었습니다. 보리를 타작할 때입니다. 보리를 타작할 때 주인은 노적가리에서 잠을 잡니다. 보아스가 자신의 노적가리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룻이 보아스의 발치 눕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보아스가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때 룻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여기서 덮는다는 것은 결혼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덮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덮개는 누구도 벗길 수 없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평안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어요. 기독교의 은혜는 덮는 은혜입니다.
경기도 안양에 열린교회라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자매가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집안의 온갖 물건을 집어던지며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10년도 훨씬 넘게 지속되자, 그 자매는 이혼까지 생각하며 새벽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상담 후 교회에서 말씀 교육을 받으면서 은혜를 받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했습니다. 그 무렵 남편에게 뇌졸증이 왔습니다. 남편이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그 자매는 남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매는 그 시련의 때를 자신이 남편에게 사랑을 베풀 기회로 삼았습니다. 영적으로 반신불수 같은 삶을 살아온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남편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갔을 때, 그 자매는 얼굴에 마비 증세가 와서 침까지 흘리는 남편의 볼에 얼굴을 부비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목사님은 진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이 뭐가 사랑스럽겠어요. 평생 때리며 못살게 굴다가 반신불수가 됐는데요. 미워해야 정상입니다. 이혼해야 정상입니다. 이혼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 없습니다. 미워해도 다 이해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상처와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덮어 치유하고 이기게 합니다. 사랑의 덮개로 덮어주니까 행복한 거예요. 기독교는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는 거예요. 들추어내서 정죄하고 욕하는 게 아니에요. 덮어 주어야 행복합니다. 정죄하면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불행합니다. 야고보가 외칩니다.
<약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4. 영광 중에 나타나다
넷째. 우리 영혼은 주님께서 오실 때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4절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했습니다. 나타나다는 말이 헬라어로 파네로오(πανερόω)입니다. 파네로오는 ‘계시하다, 드러나다, 알리다’는 뜻입니다. 감추어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눈에 보이도록 아주 명백하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은 하늘에 덮여 있습니다. 여기 살지만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여기는 초라하지만 하늘의 생명은 영광스럽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에 의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늘은 10월 중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심습니다. 마늘을 심은 다음에 왕겨나 볏짚으로 덮어줍니다. 겨울의 추위로부터 보온(보호)을 해주는 것입니다. 기온이 더 내려가면 비닐을 한 번 더 덮어줍니다. 그러다가 3월이 되면 비닐을 걷어냅니다. 그러면 파란 마늘 싹이 볏짚 사이로 조금 나와 있어요. 시커먼 땅에 파란 새싹이 돋아나 있어요. 참 신비해요. 겨울의 추위를 다 이기고 볏짚과 비닐 속에서 아주 조금씩 자랐던 거예요. 덮개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명의 싹이 난 거예요. 마늘은 덮여 있다가 봄이 되면 싹이 밖으로 들어납니다. 마늘은 계속 자랍니다. 마늘의 모습이 점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어요. 우리는 지금 여기 땅에 살지만 이미 저 천국에 살고 있어요. 우리 생명을 하나님이 감추어놓으셨어요.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하나님의 덮개로 덮어놓으셨어요. 이 덮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치울 수 없어요. 이 세상에 추운 겨울이 다 지나고 우리 영혼의 봄이 오면 우리의 새 생명이 드러나게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가장 안전한 덮개로 덮여진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평안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감추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위에 것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2절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생각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고삐를 빼다는 뜻에서 온 단어입니다. 고삐는 말이나 소의 코뚜레를 매는 줄입니다. 주인이 소에게 코뚜레를 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니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을 잘 듣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땅에 것에 코 꿰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땅의 것에 코 꿰지 마세요. 땅은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코를 꿰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를 마음대로 끌고 다니려고 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하늘의 것을 생각하세요. 생각하라는 말은 계속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하늘의 것에 코를 꿰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가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불렸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높이 달아 맵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쳐다본즉 살더라” 위를 본 사람이 사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님이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어요. 그때 하늘을 우러러 보았어요. 그때 하늘의 문이 열렸어요.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맙시다. 하늘의 것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하늘의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땅을 바라보지 마세요.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땅에 것에 이끌리지 마세요. 위에 것을 바라보세요. 위에 것을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세요.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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