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간구, 기도, 도고,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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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디모데전서2:1~2
주일오전예배 | 2019-11-1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BC 800년 프리지아(지금의 터키의 한 지역)의 고르디우스 왕이 어느 날 신에게 특별한 헌신을 할 결심으로 신전에 자신의 마차를 바칩니다. 고르디우스는 그 마차를 아무도 사용할 수 없도록 신전의 기둥에 밧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밧줄을 풀지 못하도록 몇 가닥의 다른 밧줄로 밧줄의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도록 복잡한 장식 매듭을 만듭니다. 그 매듭으로 마차의 가로대와 나무로 된 차축을 함께 묶어버렸습니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매듭입니다. 정말 신기한 매듭이죠? 그것을 본 한 여사제가 이 신기한 매듭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 전역을 통치하는 지배자가 되리라.” 이때부터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이 매듭을 풀기 위해 프리지아의 신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매듭을 풀지 못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알 수 없는 매듭을 누가 풀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500여년이 흘렀습니다. BC 334(333 ?)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냐와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동방 원정길에 나섭니다. 알렉산더는 가장 먼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를 정복합니다. 정복 후 알렉산더는 프리자아에 들어섭니다. 알렉산더는 거기서 고르디우스 매듭에 관한 전설을 듣습니다. “이것을 푸는 자는 아시아를 정복하리라알렉산더는 매듭 풀기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너무 절묘하게 묶여 있어 매듭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알렉산더는 칼을 뽑아 고르디우스 매듭을 잘라버립니다. 500여 년 동안 묶여 있던 고르디우스 매듭이 풀렸습니다. 그 후 알렉산더는 13년 동안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배자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도 고르디우스 매듭이 있습니다. 얽히고설켜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어디서 끝이 나는지 알 수가 없는 삶의 매듭이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삶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지 못하도록 처음과 끝을 감추어버렸습니다. 사탄이 만든 고르디우스 매듭에 얽혀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사탄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기도라는 칼로 풀 수 있습니다. 사탄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자를 수 있는 칼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 크리스천의 영적 무기입니다. 기도의 칼로 얽히고설킨 사탄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잘라버리세요. 그러면 시작과 끝이 보입니다. 해결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는 결론을 내릴 때 쓰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므로앞에는 뭔가 원인이 되는 일들이 나옵니다. 119절에 사람들이 양심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버리다는 말이 멀리 밖으로 던져버리다’, ‘거부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을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믿음은 파선했습니다. 사탄에게 영적으로 패했습니다. 그들 중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들이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알렉산더는 율법주의자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어지럽히려고 했습니다. 알렉산더의 방해로 바울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디모데에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기도 칼을 사용하라”, “그러므로 너는 영적 칼을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기도의 네 가지 종류가 나옵니다. 그것은 간구, 기도, 도고, 감사입니다. 네 가지 기도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1. 간구  

간구는 정성(성심, 간절하다) ‘’()자에, 구할 ’()자를 써서 정성을 다하여 구하다’, ‘간절히 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정성을 다해 간절히 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생활의 필요 때문입니다. 간구가 헬라어로는 데에시스(δέησις)입니다. 데에시스는 데이(δει)라는 동사에서 파생됐습니다. 데이는 반드시 ~()야 한다’(must)는 뜻입니다. 직면한 처지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삶의 요구나 필요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간구는 사람이 어떤 특별한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꼭 필요로 하는 것의 성취를 위한 탄원이나 호소를 의미합니다. 간구라는 단어는 기도의 시작점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기도는 바로 우리의 필요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직면한 삶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구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네 종류 중에 첫 번째가 간구입니다.  

기도의 시작점은 우리 생활의 필요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어떤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것이 다 만족하고 충분한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만족한 삶을 살더라도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질의 문제, 자녀나 부모 배우자 고민, 직장이나 삶의 문제, 관계, 건강, 인생 진로, 신앙의 고민, 죄의 문제 등등 해결해야 할 어떤 필요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문제가 있고 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기도의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도의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무엇이든 부족함을 느낄 때 기도하세요. 조금이라도 필요를 느낀다면 기도하세요.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큰 필요도 기도하시고 작은 필요도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작은 신음 소리에도 응답하십니다. 시작점에 언제까지 서 계시지 마시고 한 발 앞으로 나가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2. 기도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는 빌 ’()자에 빌 ’()자를 씁니다. 기도는 비는 것입니다. 기도를 헬라어로 프로슈케라고 합니다. 프로슈케의 문자적인 의미는 누군가를 향해 구하다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비는 것,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라는 말은 성경에서 기도를 뜻하는 모든 단어를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공예배기도, 사적인 기도, 부르짖는 기도, 묵상기도, 금식기도, 작정기도, 특별기도, 중보기도, 새벽기도, 저녁기도, 식사기도 등등 모든 기도의 형태를 프로슈케라고 합니다. 우리는 집, , 차안, 일터, 예배장소 등 모든 자리와 모든 처해진 상황 - 슬플 때, 기쁠 때, 피곤할 때, 곤고할 때, 괴로울 때 등등 -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합심으로 기도할 때 큰 소리로 주여!”를 세 번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기도회 시간에 주여!”를 세 번 하고 기도합니다. 간절하게 집중해서 기도하기 위한 좋은 전통입니다. ‘주여를 세 번 부르는 전통은 아마도 다니엘 9:19에서 온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금식기도를 하며 주님을 세 번 부릅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가 없습니다. “또는 주님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단어(아도나이)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가 첨가되었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계신 아버지를 부를 때 아버지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라고 합니다. 주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따라서 주여!” 보다는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주님을 필요로 할 때 어디서든 주님!”이라고 부르며 기도합시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어디서든 들으십니다. 그렇다고 주여!”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는 알고 있자는 말입니다.

 

3. 도고  

셋째, 도고입니다. 도고는 빌 ’()자에 알릴 ’()자를 써서 알리는 기도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알리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알리는 것입니다. 도고는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하나님께 알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알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위험에 처해 있지만 기도할 줄 모르고 기도의 필요성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대신 하는 기도가 도고입니다. 즉 도고는 대도(대신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중국어 성경은 도고를 대구라고 번역했습니다. 대신 할 ’()자에 구할 ’()자를 썼습니다. 도고는 대신 하는 기도, 대도(代禱)입니다. 도고는 헬라어로 엔튝시스입니다. 엔튝시스는 중재 기도라는 뜻입니다. 중재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도고를 중보기도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 기도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거저로 여기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많은 정말 사람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부모, 형제, 교우, 친구들이 정말 오랜 동안 기도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돼 지금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중보기도 열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중보기도는 예수님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십니다.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기도가 도고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도고의 기도를 해야 할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사회 정의를 위해서입니다. 도고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사회가 불의해집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사회는 아주 불의했습니다. 정의는 뒤로 물러나 있었고 공의는 멀리 서 있었습니다. 성실은 길바닥에 엎어지고 정직은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악을 떠나는 자가 불의한 자들의 사냥감(탈취를 당하다)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유다 사회를 위해 탄원하며 중재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59:14-16> 14.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15.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사람이 없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탄원하는 사람이 없다입니다. 중재자라는 말은 마주치거나 만난다는 뜻입니다. 즉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서 중재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상히 여기셨다는 말은 아연실색할 정도로 크게 놀라거나 황량해졌다는 말입니다. 사회가 불의합니다. 그런데 그 불의함을 보고 괴로워하며 탄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황량한 광야와 같은 느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 도고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세상은 황량해집니다. 불의해집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세상을 위해 도고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둘째, 처참한 지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욥은 사탄의 정죄로 전 재산과 자녀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이 닥쳤습니다. 하지만 그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한 친구들이 욥에게 숨은 죄를 회개하라고 정죄합니다. 이유 없이 이런 고난을 당할 리가 없다고 합니다. 부인까지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극한 고난입니다. 빠져나올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욥은 자신을 위한 중재가 없음을 탄식합니다.  

<9:32-33>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우리는 하나님과 욥입니다. 33절 말씀을 우리말 성경은 우리를 중재할 누군가가 있어 우리 둘 사이에 그 손을 얹어 줄 이도 없구나.”라고 번역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자신의 손과 하나님의 손을 이어줄 중재자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특히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손을 잡도록 이끌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배신의 자리에서 돌아와 어떻게 예수님의 대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간절한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베드로는 주님의 중보기도의 열매입니다.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도고의 기도가 사람을 살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정의롭게 합니다.

 

4. 감사  

마지막 기도의 형태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느낄 ’()자에 사례할 ’()자를 써서 느껴지는 것을 사례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헬라어로 좋다는 뜻입니다. 감사가 헬라어로 유카리스티아입니다. 유카리스티아는 좋다는 뜻의 유와 은혜라는 뜻의 카리스의 합성어입니다. 헬라어로 감사는 좋은 은혜또는 은혜가 좋다는 의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주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감사가 토다입니다. 토다는 찬송,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마지막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기도의 3요소는 감사, 회개, 간구입니다. 기도의 첫 번째가 감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사를 마지막에 놓은 것은 기도 마지막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시작점은 생활의 필요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끝점은 하나님 영광입니다. 감사와 찬송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의 필요 때문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날 때는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감사 찬송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는 원망, 불평, 고통, 슬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날 때는 감사와 찬송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시작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를 마치십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기도의 마침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마침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지럽습니다. 서울에서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제는 바닥입니다. 영적으로도 어지럽습니다. 한쪽에서는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한쪽에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이 통과돼 동성애가 합법화 된다면 성경의 법과 위배됩니다. 동성애는 차별금지와 다른 차원입니다. 만약 동성애법이 통과된다면 기독교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퀴어 축제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우리나라에서 계속 증가되고 있습니다. 연간 이슬람 세력에서 의해 피살되는 기독교 인구가 3600여명입니다.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의 아주 큰 적입니다. 또 이단들의 도전이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한 때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적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탄의 앞잡이가 됐습니다. 그들이 기독교를 욕하며 박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부모, 자녀, 배우자, 형제, 교우들을 위해서 도고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첫째가 경건, 즉 신앙생활입니다. 둘째가 우리 사회의 평안입니다. 이는 전쟁이나 사회적 혼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기도의 칼을 사용하는 것은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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