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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피할 수 없는 가라지는 즐겨라

조회수 : 984회

본문 : 마태복음 13:24~30, 36~43
주일오전예배 | 2019-10-2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강단에 선 한 교수가 크리스천인 한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는가?” 학생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수님!” 그러자 교수가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면 악도 존재하므로 악도 창조하신 것이 맞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우리가 누군지를 나타내는 원리에 근거한다면 하나님은 악이다.” 교수는 자신이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미신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며 으쓱해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교수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학생이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추위가 존재합니까?” 교수는 엉뚱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무슨 질문이 그런가? 당연히 추위가 존재하지. 자넨 추운 적이 없는가?” 다른 학생들은 이 학생의 뜬금없는 질문에 모두 낄낄거렸습니다. 학생은 개의치 않고 교수에게 말했습니다. “물리학에 근거하면 추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위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열이 부족한 상태일 뿐입니다. 그것도 명확한 기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포근한 날씨가 어떤 사람에게는 추위일 수 있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추위는 열이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나타내기 위한 인간이 만든 기준입니다. 열이 완전히 없는 절대0(섭씨 -2730)에는 모든 에너지가 사라진 상태, 즉 모든 움직임이 사라지는 상태죠. 이건 추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습니다. 학생은 교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교수님, 그럼 어두움은 존재합니까?” 교수가 대답합니다. “물론 존재하지학생이 말합니다. “다시 한 번 교수님이 틀렸습니다. 어두움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은 사실상 '빛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빛을 연구할 수 있지만 어두움은 그렇지 못합니다. 뉴턴이 프리즘을 이용하여 흰 불빛을 여러 가지 색으로 나누고, 각 빛깔의 다양한 파장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어두움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그마한 한 줄기 빛으로도 어두움을 깨고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장소가 얼마나 어두운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빛의 양만을 측정합니다. 이것이 옳지 않습니까? 어두움은 빛의 부재를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용어일 뿐입니다.” 학생은 다시 물었습니다. “교수님, 악은 존재합니까?” 교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이미 말한 대로야.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서 보지 않는가? 매일 일상에서 보는 인간의 잔인함이 존재하며 세상 곳곳의 각종 범죄와 폭력에도 존재한다네. 이러한 현상들을 악 이외에 무엇이라 하겠는가?” 학생은 말합니다. “제 논리에 따르면 악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스스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악은 선한 마음이 줄어든 상태죠. 완전한 선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악은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을 때 벌어지는 결과죠.” 교수를 아주 난처하게 한 이 학생은 누구일까요? 아인슈타인입니다. “악은 선의 결핍이다.” 이것을 철학에서 결핍론이라고 합니다. 현재까지 악을 설명하는 가장 완전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결핍론도 악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선이 모자란 곳에 악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악은 단순히 선의 모자람이 아닙니다. 악은 움직이는 실제입니다. 악은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실제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요? 왜 고통이 존재할까요? 선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기쁨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가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밭에는 알곡만 나지 않았습니다. 잡초도 났습니다. 여름 내내 알곡과 잡초는 같이 자랍니다. 그렇다고 알곡과 잡초의 운명이 영원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가을이 되면 운명이 갈라집니다. 알곡은 곳간을 들어갑니다. 반면에 잡초는 불에 태워지거나 버려집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의 내용입니다. 세상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독초가 있습니다. 좋은 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라지는 없고 좋은 씨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시간에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왜 세상에는 좋은 씨와 가라지 씨가 같이 존재하는지 생각해봅시다.

 

1. 밭에 가라지 원수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들이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잘 때라는 말은 씨를 뿌린 농부가 태만할 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잘 때는 모든 사람들이 쉬고 안식할 때를 가리킵니다. 아주 평안할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큰일을 잘 마치고 갖는 휴식은 아주 달콤합니다. ‘잘 때라는 말은 바로 농부가 씨를 뿌리는 일을 다 마치고 편히 쉬는 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안식의 때에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원수들입니다. 원수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는 밤에 몰래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원수들은 다른 사람의 밭에 왜 가라지를 뿌렸을까요? 가라지를 뿌린 자를 악한 자라고 했습니다. 가라지를 부린 이유는 원수들의 악한 본성 때문입니다(38). BC 2세기 경 로마법에는 남의 밭에 가라지를 뿌린 사람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밭에 모두가 자는 밤중에 가라지를 몰래 뿌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법으로 처벌 규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이 배가 아파 심술을 부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남의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내 인생이란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 밭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내 논에 물을 막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안을 누릴 때 그것이 완전한 평안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안할 때 누군가가 내 인생에 가라지를 뿌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평안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미움, 시기, 질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가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모르는 때에 방해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적인 원수를 마귀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원수는 육적인 원수를 격동해 우리 인생에 가라지를 뿌리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은 보이는 싸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보이지 않는 싸움입니다. 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입니다. 영적인 싸움은 영적인 무기인 기도 외에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기도하러 오세요. 영적인 무기를 사용하세요.  

저는 학창시절에 꿈이 참 많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저는 제 인생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반백년을 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계획하고 뜻한 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인생을 가로막는 가라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밭에는 독초가 있습니다. 원수가 있습니다. 육적인 원수, 영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그 가라지 원수가 우리 인생을 아프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낙심해야 하나요? 소망을 버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밭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돌보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 사람과 같으니’(24)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사람과 같으니라는 말을 직역하면 천국은 ~사람과 같이 만들어졌다또는 천국은 ~사람과 닮았다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을 닮았습니다. 또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처럼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밭에서는 천국의 일원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씨만 뿌려 놓으면 저절로 천국의 일원이 만들어질까요? 아닙니다. 돌보아야 합니다. 농부는 끊임없이 자기 밭을 돌봅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곡식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큰다.”라는 말을 합니다. 농부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까지 쉬지 않고 돌아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세상이라는 자신의 밭에 천국씨를 뿌리고 끊임없이 돌아보십니다. 가라지가 있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독초가 있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밭의 주인되신 주님의 돌보심이 있습니다. 그 돌보심을 신뢰합시다.

 

2. 피할 수 없는 가라지는 즐겨라  

인생에는 비극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가라지와 세상이라는 밭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가라지와 함께 해야 하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싹이 나고 결실하기 시작할 때에 밭에 밀과 함께 가라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농부의 아들입니다. 들에 많이 가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잡초는 싹이 날 때부터 다릅니다. 구분이 아주 명확하게 됩니다. 그런데 싹이 날 때는 구분이 잘 안 되는 잡초가 간혹 있습니다. 어떤 것은 너무 흡사해서 한 참을 자라야 구분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심지어 다 자랄 때까지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구분이 다 됩니다. 그것은 열매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속여도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곡식이 패기 시작할 때 종들은 밭에서 가라지를 발견했습니다.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가라지는 헬라어로 지자니온입니다. 지나지온을 NIV는 잡초(weed)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지지나온은 단순히 잡초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잡초와 밀은 자랄 때부터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KJV‘tare’(독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독보리는 밀과 아주 흡사합니다.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지자니온을 독보리라고 합니다. 종들은 여름 내내 밀밭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밀밭에 독보리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곡식이 패기 시작하면 구분이 됩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종들은 가라지가 어디서 온지 몰랐습니다. 또 가라지를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인이 좋은 씨만 뿌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가라지가 어디서 온지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28절에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원수를 알고 있습니다. 또 종들의 말에 즉시 대답한 것을 보면 주인은 가라지가 자랄 것을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은 압니다. 그런데 종들은 모릅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짐작도 못했습니다. 그냥 알곡만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인생에 행복만 생각합니다. 좋은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라지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라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가라지를 만나면 낙심합니다. 가라지의 원인도 모릅니다. 그래서 원망합니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 가라지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우리가 가서 가라지를 뽑을까요?” 주인이 말합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 수 있으니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가라지와 밀은 한 곳에서 같이 자랍니다. 뿌리가 서로 엉켜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면 밀까지 같이 뽑힙니다. 그래서 주인은 가라지를 그냥 두라고 합니다. 가라지 원수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종종 가정에서 발견됩니다. 때로 남편이, 때로 아내가, 때로 자식이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장 좋은 협력자가 가장 무서운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가 자기에게 가라지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는 죄악에 쓴 뿌리가 있습니다.  

<29: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인생의 밭에 가라지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우리 인생의 운명입니다. 가라지는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잡초처럼 뽑아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받아들였습니다. 알곡과 함께 그냥 자라도록 두었습니다. 가라지를 피할 수 없다면 가라지를 즐깁시다. 가라지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가라지에 매이지 마세요. 그냥 그까짓 거 하세요. 가라지에 매이면 인생이 슬퍼집니다. 밭의 주인은 마귀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밭을 돌보십니다. 주님의 돌보심을 의지하고 인생 가라지를 받아들이세요. 이것이 가라지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미국 네브라스카 의과 대학 교수이고 심장의학 전문의사인 로버트 엘리엇(Robert S. Eliet) 박사의 스트레스에서 건강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엘리엇은 심장병의 근본 원인을 스트레스로 보았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엇 교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작은 일에 땀 흘리지 않는다. 작은 일, 별것도 아닌 일에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시한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작은 일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둘째, 모든 것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충격적인 말이 아닙니까? “모든 일은 다 작은 일이다.” 다 시시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다 작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 다 시시하고 별 볼일 없는 거예요. 크게 생각하면 크게 스트레스 받아요. 작게 생각하면 작게 스트레스 받아요. 아무리 큰일도 그까짓 것하며 삽시다. 셋째, 싸울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으면 흐르는 대로 자신을 맡겨 흐르게 하라. 피할 수 없으면 그 일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3. 추수 때가 오고 있다  

추수 때가 됐습니다. 천사들에게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30)라고 했습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악한 자는 사탄입니다. 사탄의 아들들은 천사들에게 묶여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제가 더 이상 이 말씀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여러분은 불타는 것인지 무엇인지 알고 있으실 것입니다. 그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밭에 난 가라지는 불 타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가라지는 불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불은 영원히 타는 불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거기에는 죽음도 없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여기 계신 누구도 그 불 속에 들어가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또 명령하십니다.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곡식만이 주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곡식은 주님의 씨앗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씨앗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씨앗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심은 씨앗입니까? 부모님이 심은 씨앗입니까? 아니면 배우자가 심은 씨앗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불타는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천국 씨앗은 인자가 심은 씨앗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믿음의 씨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원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씨앗입니다.  

알곡의 목적은 오직 하나 주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밭에 있는 곡식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우리가 자라는 목적은 오직 우리 주인의 곳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낮에는 뜨거운 햇볕을 참고 밤에는 찬 이슬을 견디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거센 바람과 쏟아지는 비를 견디고 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독초를 참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인의 곳간에 들어가는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 잘 사세요. 그리스도인들은 잘 살아야 합니다. 작년에 어떤 성도님이 감사헌금 봉투에 착하고 예쁘게 살게 해주세요.”라고 써서 헌금을 하셨어요. 그 기도제목이 좋아서 기도 수첩에 적어놓고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 기도를 합니다. 선하게 의롭게 잘 사세요. 그런데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곳간으로 가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세상에 오는 것은 순서대로 옵니다.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천국에 먼저 가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울지만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는 가라지가 아니라 천국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씨를 뿌린 이를 인자라고 했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입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인자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마태복음 20:18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8: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했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을 여호와 사자 또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멋진 표현을 마다하고 왜 자신을 인자라고 지칭하셨을까요? 인자라는 말에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천상의 존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7:13-14>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우리 주님은 세상에 천국 씨를 뿌리셨습니다. 주님은 천국의 씨들을 모으고 계십니다. 추수가 끝나면 천국은 완성이 될 것입니다. 세상 밭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가라지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가라지가 없습니다. 비바람이 없습니다. 한 밤 중의 추위도 없습니다. 한 낮의 뜨거움도 없습니다. 독초도 없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 마귀도 없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 주님의 천국 곳간은 안전한 곳입니다.  

원시 농경시대부터, 밥그릇 주변에 붙어서 사는 밥풀떼기가 있었습니다. 밥풀떼기들은 다 같은 밥이었는데 밥그릇 속이 아니라 밥그릇 겉에 붙어 피와 살이 되지 못하고, 설거지 할 때 수세미에 박박 긁혔다가 하수구로 허무하게 쓸려가는 것이 원망이 되었습니다. 밥풀떼기들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각성과 함께 밥권위(밥풀떼기 권익보호 위원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뽑았습니다. 회장에 뽑힌 밥풀떼기는 취임사에서 강성 발언을 했습니다. “운전미숙으로 밥을 밥풀떼기로 전락시킨 밥주걱에게 경고한다. 밥풀떼기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중단하고, 주변세력으로 밀린 밥풀떼기들도 인간의 살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라. 밥풀떼기들의 마지막 경고를 가벼이 듣지 말고 밥풀떼기들을 적극 보호하라. 그렇지 않으면 밥풀떼기들은 밥그릇 밖에서 장외 투쟁을 하겠다.”  

흥분한 탓인지 회장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호소합니다. 밥을 밥풀떼기로 추락시킨 주걱들에게 벌을 주시고, 밥풀떼기들의 애환을 생각하시어 밥풀이 아예 붙지 않는 그릇을 창조해 주세요. 밥풀떼기가 밥으로 대우받는 세상을 열어주세요. 두려움과 정감을 동시에 지니신 신이시여, 같은 밥으로 태어나 외곽으로 밀리는 저희들의 고통을 가엽게 여기시어 근본적인 해결을 해주세요.” 신이 대답했습니다. “밥풀떼기가 생기는 것은 밥주걱 때문이 아니다. 밥풀떼기는 점액질이 강한 밥알이 밥그릇으로 떨어지지 않고 미련 떨다가 주걱에게 뒤통수를 맞은 결과물이며, 밥을 푸는 순서(밥한 그릇 퍼는 데는 통상 4회의 주걱 운동)에 밀려 마지막 4회 차에 퍼졌다가 밥그릇 외곽으로 붙기 때문이다. 앞으로 밥풀떼기의 운명을 면하려면 가운데로 가라. 그래도 밥풀떼기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그냥 즐겨라.”  

제가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라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다는 것입니다. 가라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정말 지루할 정도로 깁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됩니다.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반면에 좋은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금방 끝이 납니다. 저는 이것이 인생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을 비극으로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희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인생의 밭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희극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현재의 가라지를 보며 비극으로 살지 말고 저 앞에 있는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소망 중에 현재의 가라지를 즐기며 삽니다. 가라지를 보면서 너희들 가라지 운명은 불이다. 하지만 내 운명은 주인님의 곳간이다. 너희들의 운명은 불이다. 하지만 내 운명은 영원한 기쁨이다라고 선포합시다. 우리를 괴롭히는 가라지를 조롱하며 삽시다. 가라지를 비웃으며 삽시다. 가라지를 즐기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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