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미국 UCLA 대학교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현지 병원에 나가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교수는 수업 중에 한 가지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 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 균으로 인해서 맹인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다. 셋째 아이는 부모의 병 때문에 청각 장애인이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의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수는 학생들에게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악성 베토벤은 바로 이런 악조건 가운데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입니다.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입니다. 형제들은 병들거나 죽었습니다. 베토벤은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베토벤도 나중에 청각 장애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결정이 오판일 수 있습니다. 교수는 말합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유대인들의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잘 못된 구세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맞지 않은 구세주를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입니다. 편견, 오만, 독선, 판단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트라이언 에드워즈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다. 편견은 진실을 볼 수 없도록 가리는 최악의 마귀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잣대로 남을 너무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살인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말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1. 판단중지
유대인들에게는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7월 10일은 속죄일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금식을 하는 날입니다. 레위기23:27에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괴롭게 하다’는 말이 ‘낮추다’, ‘억제하다’는 뜻으로 금식을 의미합니다. 속죄일의 금식은 모세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금식입니다. 유대인들은 부림절(아달월 24-25일, 양력2-3월)에도 금식을 했습니다. 페르시아 시대에 하만의 음모로 유대민족 전체가 몰살당할 번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금식기도로 유대인들이 몰살을 면하게 됩니다. 오히려 상황이 역전이 돼 유대인들이 원수 갚는 날이 되었습니다. 부림절은 이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된 날(바벨론이 시드기야 9년 10월에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시드기야 11년 4월 9일에 함락)에도 금식을 했습니다. 유다가 망한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전통에 따라 1년에 3-4일 정도를 금식했습니다. 물론 어린 아이, 산모, 노약자들은 제외됐습니다. 금식은 유대인들의 아주 중요한 전통입니다.
유대교의 한 분파인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전통을 엄수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BC 167-164년에는 마카비 독립 전쟁에도 참여했습니다. 애국지사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형식주의로 빠집니다. 태도가 고압적이고 오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책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종교적 열정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과 절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은 달랐을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금식은 유대인들의 경건을 측정하는 하나의 잣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금식은커녕 오히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습니다. 경건의 모습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 데 왜 당신의 제자들에게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비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판은 제자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비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랍비라는 사람이 왜 제자들에게 금식을 지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율법과 전통으로 제자들을 비아냥거렸습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예수님입니다. “당신 가짜 랍비죠?”, “당신 가짜 선지자죠?”, “진짜라면 이럴 수 없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주 심각한 편견입니다. 고칠 수 없는 편견입니다. 유대인들은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잣대를 가지고 교우를 판단하지 마세요. 정죄하지 마세요. 교우를 판단하는 것은 주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우리의 몸통이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제 형제를 욕해보세요. 제 3자가 속으로 참 웃기는 집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자기 집안을 욕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를 욕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 욕입니다. 누어서 침을 뱉는 격입니다. 교우들이 서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판단하고 욕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여러분! 예수님 앞에서 모든 판단을 중지하세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형제 판단의 잣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두 마리의 개가 있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충성합니다. 주인을 사랑합니다. 사람을 이롭게 합니다. 심지어 주인에게 목숨까지 바칩니다. 이것이 개입니다. 하지만 이 개들은 주인을 아주 힘들게 합니다. 상대방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병들게 합니다. 사회를 아프게 합니다. 세상을 파괴합니다. 이 개의 이름은 편견입니다. 다른 한 마리는 선입견입니다. 아주 못된 개들입니다. 사악한 개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개를 계속 키웁니다. 버리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자기 견해가 아주 객관적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판단이 아주 옳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김 집사님이 갖고 있는 저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정 집사님이 갖고 있는 저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두 분의 생각이 똑같을까요? 틀림없이 다릅니다. 그러면 두 분 중에 어떤 분의 생각이 객관적일까요? 저기 있는 목소리 청년은 저를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기 있는 성정현 청년은 저를 보고 좋다고 말합니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여기 주황색 노트가 있습니다. 제가 이 노트를 보고 느낀 주황색이 제 머리 속에 저장됐습니다. 그런데 저기 계신 한 권사님도 이 노트를 보고 느낀 주황색이 머릿속에 저장됐습니다. 권사님의 머릿속에 있는 주황색과 제 머리 속에 있는 주황색이 같을까요? 우리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것을 똑같이 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더 객관적일까요? 저일까요? 아니면 한 권사님일까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는 내가 맞고 한 권사님이 잘 못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사님이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절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힘들게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훗설(1859.4.8.-1938.4.27.)은 판단중지(epoche 에포케)라는 말을 했습니다. 판단중지는 무언가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판단중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판단 중지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앞에서 판단을 중지해야 합니다. 오직 판단은 하나님만 하셔야 합니다. 판단은 나도 불행하게 하고 상대도 불행하게 합니다. 생각 속에서 선입견, 편견이라는 개를 내쫓으세요. 그리고 사랑으로 판단하세요. 이해로만 판단하세요. 섬김으로 판단하세요. 그래야 나도 행복하고 상대도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신랑의 친구들에 비유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신랑의 친구들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마셔야 흥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의 친구들이 잔치에 참석해서 금식을 해보세요. 이것은 결혼잔치를 망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신랑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즐겁고 기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합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 잣대로 판단을 중지합시다. 그리고 함께 기뻐합시다. 하지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부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제자들도 금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서 할 일입니다. 하지만 금식하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가 필요할 때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기쁨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2.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새 천이 낡은 천을 당기어 낡은 천을 더 찢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생베 조각’의 헬라어 어의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천 조각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양털로 옷감을 만들었습니다. 갓 직조한 새 천은 물에 젖으면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요즘은 옷감 제조 기술이 발달해서 물에 빨아도 옷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20년 전만 해도 옷을 사서 빨면 사이즈가 줄어들었습니다. 두세 번만 빨면 확 줄어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물에 젖을 때마다 계속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줄어들면 더 이상 줄어들지 않습니다. 양모로 직조한 새 천도 물에 젖으면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낡은 옷은 줄어들 대로 줄어들어 물어 젖어도 더 이상 줄어들지 않습니다. 새 천 조각을 낡은 천에 대고 꿰매면 새 천이 물에 젖어 줄어들 때 낡은 천을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오히려 오래된 옷이 더 찢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새 천을 낡은 옷에 덧대고 꿰매지 않았습니다.
생베 조각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낡은 천은 유대인들의 전통, 율법주의, 구시대적 종교생활 등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이라는 새 천을 전통이라는 낡은 옷에 덧붙이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복음이라는 새로운 천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새 천을 여러분의 인격에 꿰매 쓰려고 하면 안 됩니다. 과거의 생활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미움을 버려야 합니다. 죄악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생베 조각을 입는 것입니다. 믿을 때 우리는 의의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과거의 낡은 삶을 버리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믿음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믿는 다는 것은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낡은 옷에 예수님의 새 천을 꿰매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생베 조각을 분노라는 헌 옷에 꿰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찢어집니다. 아파요 고통스러워요. 둘 다 쓸모가 없어집니다. 과거를 버리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세요. 믿음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탕자에게 가장 먼저 한 일은 새 옷을 입힌 것입니다.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벗겼습니다. 낡은 옷을 벗겼습니다. 과거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새 옷을 입혔습니다. 이제 탕자는 새로워졌습니다. 새 신분이 되었습니다. 스가랴 3장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불에 그슬린 나무처럼 더러웠습니다. 거무데데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천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믿을 때 예수님의 생 베 조각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이제 새 옷을 입었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새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옷을 다시 입지 마세요. 이전 옷을 그리워하지 마세요. 과거의 죄악의 옷을 입지 마세요.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지 마세요.
저의 첫째 아이가 고3입니다. 1학년 때 여름 하복을 맞췄습니다. 그런데 교복 상의가 너무 타이트한 거예요. 허리를 조금만 숙여도 옆구리가 다 보여요. 요즘은 학생 교복을 그렇게 만들어요. 옷이 불편해서 3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었어요. 계속 생활하복만 입었어요. 엄마가 두고두고 아까워하는 거예요. 교복이 아무리 아까워도 졸업하면 끝입니다. 다시 입지 않아요. 아깝다고 개조해서 입지 않아요. 이제 버려야 해요. 신분이 달라졌어요. 둘째가 고1입니다. 중학교 때 교복이 좋아요. 3년 동안 입었지만 깨끗해요. 아직 입을 만해요. 그렇다고 고등학교 들어가서 중학교 교복을 계속 입지는 않습니다. 중학교 교복을 개조해서 입지도 않습니다. 졸업하면 중학교 교복과는 안녕입니다. 고등학생이 됐습니다. 중학생이 아니에요.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다시는 중학교 교복을 입지 않습니다. 중학교 교복이 좋다고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지 않아요. 예수님이 새 천이듯이 우리도 새 천이 되었습니다. 신분이 달라졌어요. 이제 새 천으로 살아야 해요.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야 해요. 옛날 신분으로 살면 안 돼요.
예수님이 우리를 생베 조각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생베 조각으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러 개의 생베 조각이 하나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모여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낡은 천이 있으면 안돼요. 새 천과 낡은 천이 함께 꿰매지면 안 돼요. 나도 아프고 상대도 아파요. 그래서 모두가 새 천이 되어야 해요. 낡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갖고 계시지 마세요. 믿음으로 새로워지세요. 우리는 생베 조각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하나의 성전을 이룰 수 있어요.
둘째, 남을 돕는 생베 조각이 되라는 것입니다. 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피아노를 닦는 천이 있습니다. 강대상을 닦는 천이 있습니다. 바닥을 닦는 천이 있습니다. 얼굴을 닦는 천이 있습니다. 차를 닦는 천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생베 조각이 되시겠습니까? 세상을 위로하는 생베 조각이 되세요. 마음의 상처로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이 됩시다. 요즘은 아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또 세상사에 지치고 고된 사람들의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주는 수건이 됩니다. 사람들이 지쳐 있습니다. 또 세상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생베 조각이 되세요. 어제 새벽이었습니다. 누가 엘리베이터에 버튼에 침을 뱉었어요. 물티슈를 석장 뽑아서 닦고 또 닦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생베조각이 되세요. 여러분! 우리는 이제 생 베 조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낡은 천으로 살면 안 됩니다.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죽 부대는 유목민들에게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행할 때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 메고 다녔습니다. 가죽 부대를 만드는 법은 간단합니다. 양이나 염소를 잡아 머리 부분과 네 다리를 자릅니다. 그런 다음 고기와 기름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네 다리를 묶어버리면 끝입니다. 머리 부분은 입구로 사용했습니다. 네 다리를 앞뒤로 묶어서 어깨에 메면 아주 좋은 가죽 배낭이 됩니다.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좋습니다. 잘 늘어납니다. 복원력도 좋습니다. 그리고 아주 질깁니다. 하지만 낡은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없습니다. 질기지 않아요. 늘어날 대로 늘어 있어요. 잡아당기면 찢어집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 포도주는 이제 막 짜서 발효를 시작한 포도주를 말합니다. 발효되는 포도주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발효될 때 가스(이산화탄소)가 나옵니다. 포도주가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가죽 부대가 탱탱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새 가죽부대는 질기고 탄력성이 좋아 가스가 나와도 안전합니다. 하지만 낡은 가죽 부대는 탄력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버립니다. 그러면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버리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를 견디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맛입니다. 발효되는 포도주는 톡 쏘는 맛이 있습니다. 잘 발효된 포도주는 처음 뚜껑을 열 때 펑하는 소리가 납니다. 신선하다는 표입니다. 하지만 발효가 잘 되지 않은 포도주는 신 맛이 납니다. 포도주가 아니라 식초가 된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제 복음을 받아 영적 발효가 시작된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제자들 속에서 복음이 발효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힘이 용솟음쳤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낡은 옷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팠습니다. 미워하고 시기했습니다. 서로 다퉜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자 모든 낡은 것들이 떠났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복음이 발효되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낡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복음이 발효가 안돼요. 육신적인 생각을 버려야 해요. 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야 해요.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세요. 성령님을 의지하세요. 그때 복음이 발효돼서 끓어오르는 거예요. 그래야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는 성령으로 계속 끓어올라야 합니다. 성령의 포도주가 되어야 합니다. 톡 쏘는 맛이 있어야 합니다. 신선한 맛이 있어야 합니다. 김 빠진 포도주가 되면 안 됩니다. 포도 식초가 되면 안 됩니다.
저는 오래 전에 여러 가지 효소를 담아본 적이 있습니다. 버찌, 아카시아, 뱀 딸기, 산딸기, 무, 배, 토마토, 질경이, 매실, 앵두, 살구, 파뿌리, 오가피, 수세미, 자두 등등. 20가지는 넘는 효소를 만들어 봤습니다. 모든 효소들이 발효되는 과정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오가피 효소는 아주 특별합니다. 제가 콜라병 보다 조금 작은 병에 오카피를 넣어서 설탕으로 재워놓았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랬더니 거품이 뚜껑까지 올라왔습니다. 심지어 뚜껑 사이로 거품이 나와 있어요. 뚜껑을 열었더니 거품 폭발하듯이 밖으로 막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거품이 계속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예요. 거품을 다 제거한 후에 다시 뚜껑을 닫았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다시 거품이 꽉 차 있는 거예요. 뚜껑을 열었더니 또 거품이 또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요. 그렇게 몇 차례를 했습니다. 유리병이라 아니라 비닐이나 플라스틱이었다면 펑하고 터졌을 것입니다. 모두 이산화탄소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톡 쏘는 맛이 납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발효될 때 톡 쏘는 맛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하루 음료 섭취량 1위가 탄산음료수입니다. 탄산음료수의 매력이 어디 있습니까? 톡 쏘는 맛에 있습니다. 탄산음료수는 이산화탄소로 만듭니다. 이산화탄소에 높은 압력을 가하면 물에 녹습니다. 탄산음료수의 톡 쏘는 맛은 물에 녹아 있던 이산화탄소가 밖으로 나오면서 기체로 변할 때 나는 맛입니다. 그래서 톡 쏘는 맛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톡 튀는 느낌입니다. 이산화탄소가 많이 녹아 있을수록 입속에서 톡톡 튀는 맛이 강하게 납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두면 가스가 다 빠집니다. 그러면 탄산음료가 아니라 설탕물이 됩니다. 김빠진 콜라가 됩니다. 김빠진 콜라는 더 이상 콜라가 아닙니다. 설탕물입니다. 김빠진 콜라는 하수구에 버려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김빠진 콜라가 되면 안 됩니다. 열면 펑하는 소리가 나는 신선한 포도주가 되어야 합니다.
웨인 다이어는 “사람을 판단할 때, 당신은 그들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욕하는 것입니다. 정죄하는 사람의 정죄를 믿지 마세요. 듣지 마세요. 그것은 낡은 옷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우리 생 베 조각을 못 쓰게 합니다. 우리가 새 포도주를 버리게 합니다. 우리는 생 베 조각입니다.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오래 전 브라질에서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콜롬비아로 가는 노파가 있었습니다. 오토바이 뒤에는 주머니가 하나 있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세관원이 몇 번 노파를 검문, 수색했으나 혐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주머니에는 언제나 모래만 들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 달 후 세관원이 “체포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 봐요. 밀수하는 게 있지요 그게 뭡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거요. 오토바이” 노파는 오토바이를 밀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래주머니는 세관원을 속이기 위한 미끼였습니다. 어쩌면 현대 크리스천들은 사탄이 주는 미끼 때문에 “중요한 단서”를 놓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숲을 보아야 합니다. 큰 것을 보아야 합니다. 가장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신적인 잣대를 버리고 새 가죽 부대가 될 수 이 있습니다.
이전글 | 예수님의 수수께끼 |
---|---|
다음글 | 주기도문 강해⑤ - 나의 당신님 아버지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