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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증거했습니다. 이사야63:16에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했습니다. 64:8에도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라고 했습니다. 또 2:10에도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아버지가 아닌 거예요.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아무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아주 모순적인 상황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아빠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아빠’(abba)라는 말은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 아빠입니다. 우리말과 발음이 똑같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번에 ‘아빠 아버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당당함, 친근함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저희 앞집에 2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삽니다. 아침에 아빠가 출근할 때 문 앞에 나와 아주 귀여운 소리로 “아빠! 일찍 와”라고 합니다. 여러분! 2살짜리 여자 아이가 아빠를 부르듯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보세요. ‘아빠!’라는 말은 친근함입니다. 그런데 아빠라는 말에는 친근함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아빠 아버지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하나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나오는 당신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 자유와 소망의 메아리, 아빠 아버지
먼저 아빠 아버지라는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30년을 살았습니다. 요셉이 30세에 총리가 되어 110세에 죽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난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게는 350년에서 적게는 300년 정도를 종살이 했을 것입니다. 노예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보내십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애굽에서 내보내라고 합니다.
<출4:22-23>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모세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그것도 큰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집트에서 나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노예해방, 자유, 구원 그리고 새로운 희망에 대한 사인(표)인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는 자유입니다. 아버지는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들 가운데 나와 같은 선지자를 하나 일으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신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는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이라는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의 노예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구원과 자유의 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새 희망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름은 자유와 희망의 메아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진심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보세요. 우리 삶에 새로운 희망이 메아리처럼 울릴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세 비유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또 비유는 항상 잔치로 끝이 납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잃었다가 다시 찾습니다. 목자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합니다. 양은 목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어떤 여인이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주인은 가까스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다시 찾습니다. 여인은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합니다. 드라크마와 함께 여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잃어버린 아들,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와 식구들에게 아주 몹쓸 짓을 합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신데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주 호래자식입니다. 그 재산을 가지고 먼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와 집이 어떻게 되든 나 몰라라 하고 떠났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날려버립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탕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탕자는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15:18-19)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품꾼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주인님이라고 부르겠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에게 좋은 옷을 입힙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줍니다. 반지는 아들 된 표입니다. 신발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유인의 표시입니다. 아버지 집의 품꾼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아버지 집의 종은 아버지 집에서 30년을 종살이해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아들만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들은 하루를 살아도 아버지입니다. 지금 들어와도 아버지입니다. 비유는 잔치로 끝이 납니다. 탕자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홍길동은 억울했습니다. 어느 날 홍길동이 아버지 홍 판서에게 묻습니다.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대감마마라고 해야 하나요?” 아버지는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버릇이 없어질까 봐 꾸짖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정식 부인의 아이가 아니면 자식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홍길동은 홍 판서의 본부인이 아닌 종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종의 아들은 종입니다. 아버지는 양반입니다.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인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은 양반인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홍길동은 집을 나갑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는 이유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고 한다는 것은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기도문 두 번째 설교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자고 했습니다. 설교 후에 저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봤습니다. 너무 어색했습니다. 여러 번 해보았습니다. 그래도 어색했습니다. 어제도 아빠라고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색했습니다. ‘하나님 아빠라는 말이 언제까지 어색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유교문화권에 있습니다. 양반문화입니다. 체면문화입니다. 저는 자라면서 아버지를 한 번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일생동안 누구에게 아빠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더 어색할 것입니다. 저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해봅시다. 주변 환경, 내가 살아온 환경, 자녀답지 못한 내 삶, 하나님에 대한 나의 편견 등등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어색하게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봅시다. 아빠라는 말에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새로운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새벽입니다. 아빠라는 말을 해보았습니다. 여전히 어색하고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했습니다. 10번, 20번이 지나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와락 쏟아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보세요. 아빠라는 말에 우리가 구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아빠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마침, 목적도 아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아빠! 아버지! 여기에 우리 기도가 다 들어 있습니다.
2. 나의 당신님!
두 번째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당신’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주기도문에 ‘당신’이라는 말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말 주기도문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원문 주기도문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영어 주기도문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어 주기도문에도 ‘당신’이 있습니다. 일본어 성경에도 ‘당신’이 있습니다. 우리말 주기도문에만 ‘당신’이 없습니다. 왜 우리말 주기도문에만 ‘당신’이 없을까요? 한국인들의 정서로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 당신이라는 말을 생략한 것입니다. 새 번역 주기도문에는 ‘당신’ 대신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살려보려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아버지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고
‘당신’은 상대를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반대로 상대를 얕잡아 부를 때도 쓰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의미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너’라는 말은 해도 ‘당신’이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당신’이라고 하면 “뭐! 당신? 당신 지금 나한테 당신이라고 했어?”라며 화를 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을 번역할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시편8:4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주께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당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를’이라는 말은 ‘나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는 말씀이 히브리 성경에는 ‘당신이 나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로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할 수 없어서 ‘주께서’라고 의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박윤선 박사님은 ‘당신’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성경의 원래 의미가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할 수 없으니 ‘당신님’이라고 하자고 했습니다. “당신님!” 우리 국문법에는 없는 아주 특이한 표현이지만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당신님!” 시편 8편 4절은 나와 당신과의 관계입니다. 1인칭 2인칭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입니다. 나와 당신입니다. 나와 그와의 관계가 아닙니다. 나의 당신님 되시는 아버지의 돌보심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분이 돌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의 당신님입니다. 박윤선 박사님(1905-1988)은 총신대학원장을 하신 목사님입니다. 또 고신대학교 교장과 수원 합동신학교 명예 교장을 하신 분입니다. 박 목사님은 신구약 성경 전권을 주석하신 학자 중의 학자십니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버(1878년~1965년)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종교철학자입니다. 부버는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만남이 없으면 삶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은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또 부버는 인간 본질의 핵심이 “관계”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만남과 관계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나와 너와의 관계는 인간화된 관계입니다. 바람직한 관계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이유가 그 사람이 좋아서입니다. 인간을 순수하게 목적으로 대하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비인간화된 관계입니다. 단절된 관계입니다. 타락한 관계입니다. 나의 목적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관계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이유가 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비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부버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의 진지함으로 말하노니 그대여. 사람은 그것(소유물)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나와 당신과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나와 당신과의 관계에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1인칭 2인칭 관계에서 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어떤 제 3자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어딘가에 계실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계신 그 하나님을 2인칭, 당신으로 부르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불러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더 깊은 믿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빠라는 말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친근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당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말에서 유일하게 ‘당신’이란 말이 자연스러운 경우가 부부관계입니다. 아내에게 당신이라고 하는 것은 친근한 표현입니다. 당신은 당할 당(當)자에 신(身)자를 씁니다. 어떤 분이 이 말을 해석하기를 당신과 같은 내 몸이라고 했습니다. 내 몸과 같이 소중한 당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렵다면 박윤선 목사님처럼 ‘당신님’이라고 해봅시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 나의 당신님께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나의 당신님이여!”
강릉선교교회의 어떤 성도님 이야기입니다. 큰딸 시현이가 어렸을 때였습니다. “시현아, 자기 전에 기도하자. 엄마 따라해,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했더니 시현이가 “하나님, 우리 외할아버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 당시 시현이는 가족관계에 관심이 많아서 “엄마, 엄마의 아버지는 내 외할아버지지?”, “엄마의 엄마는 외할머니지?”, “엄마의 언니는 이모지?”, “엄마의 오빠는 큰외삼촌이지?”라고 묻곤 했습니다. 엄마가 부르는 명칭과 자기가 부르는 명칭이 다른 것을 신기해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버지’라고 하자 무조건 ‘외할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부인은 틈만 나면 남편과 아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남편은 무신론자였고, 아들은 신앙이 뭔지 전혀 몰랐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부인은 억지로 남편과 아들을 이끌고 교회에 나가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영혼을 구혼하여 주시고...” 그러자 남편도 부인을 따라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장인어른!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아들도 얼떨결에 아버지를 따라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외할아버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여러분! 하나님이 장인어른, 외할아버지, 시아버지가 돼서는 안 됩니다. 엄마의 하나님, 아내의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의 생명은 소유격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를 만져보라.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소유격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거기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향해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를 때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정확하게 알아요.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2:19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을 믿어요.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지 알아요. 이 세상 누구 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아요. 아마 저 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거예요. 그런데 귀신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은혜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구원받았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왜요? 믿음이 나의 믿음예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나의 지식이에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믿어져요. 그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어요.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세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세요. 하지만 마귀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예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못해요. 마귀에게는 구원이 없어요. 아버지의 자유가 없어요. 아버지의 희망이 없어요. 믿음이 자기 것이 아니에요. 모두 가짜예요. 거짓이에요. 여러분! 신앙은 소유격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외할아버지가 아니에요. 저 분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예요.
데이빗 루이스의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라는 책에 나오는 간증 스토리입니다. 데이빗 루이스 목사님이 태국의 어떤 집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였습니다. 목사님이 ‘아빠’(abba) 또는 ‘아버지’라고 말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뭔가 핵심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통역관에서 ‘아버지’라는 말을 뭐라고 통역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통역관이 하나님(God)에 해당하는 태국어를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에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목사님은 다른 말로 통역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통역관은 태국 문화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예요. 문화의 차이예요. 루이스 목사님은 찬송을 부를 때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면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국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크리스천이 없는 거예요. 문화적으로 안 되는 거예요. 목사님은 아주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데이빗 루이스 목사님은 그들에게 “아빠 아버지”를 뭐라고 부를지 성령께 여쭈어보라고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그때 회중 가운데 어떤 여성이 아빠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 외침은 영혼 깊은 곳에서 나왔습니다. 무언가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울며 탄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에 눈물이 넘치고 많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데이빗 루이스 목사님은 강당을 울리며 울부짖는 그들의 영혼을 성령이 증거했기 때문에 그런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다고 믿었습니다. 루이스 목사님은 그런 일은 거의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배가 완전히 새로운 깊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많은 사람이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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