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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여러분! “반성하는 주기도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할 때
“하늘에 계신”이라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 하지 마라. 너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면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마라.
온 천지가 네 뜻대로 되기를 갈망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잔뜩 쌓아두려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원한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호시탐탐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지 마라.
그 모든 것들이 온통 네 것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너의 기도로 드리지 않으면서.
이 글은 우루과이 어떤 교회 예배당 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구절마다 글을 쓴 사람의 반성이 들어 있습니다. 읽다 보면 ‘아! 내가 그랬지.’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글입니다. 제가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 동안 주기도문을 입으로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앵무새처럼 기계적으로 외운 것입니다. 가짜 기도를 수 없이 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도 수 없이 주기도를 가짜로 드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글을 읽은 후에 저는 정말 제대로 주기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다시 옛날처럼 주기도문을 앵무새처럼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를 수 없이 합니다. 그런데 주기도처럼 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기도와 반대의 삶을 살죠. 주기도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주기도문을 하세요. 주기도문을 하셨으면 주기도문을 따라 사세요.
오늘은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은 복음서 기자 중에 거의 마태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시간에 마태에게 하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하늘에 계신’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1. 마태의 하늘
‘하늘에 계신’이 우리말 성경에는 주기도문 맨 앞에 나오지만 성경 원문 주기도문에 세 번째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은 ‘아버지’의 수식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에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은 주로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어휘입니다. 마태는 성경을 기록하면서 다른 복음서 기자들 보다 ‘하늘’이라는 말을 훨씬 많이 씁니다. 마가복음에 하늘이라는 말이 16번, 누가복음에 28번, 요한복음에 17번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이라는 말이 48번 나옵니다. 또 천국이라는 말이 마태복음에만 37번 나옵니다.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는 천국이라는 말이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천국이 헬라어로 ‘하늘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하늘이라는 말이 모두 85번 나오는 셈입니다. 마태는 성경을 기록하면서 계속 하늘, 하늘, 하늘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하늘을 아주 소중이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가 누가 요한이 하늘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가 누가 요한도 하늘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들은 하늘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세 사람은 하늘 대신 하나님 나라를 외쳤습니다. 그러면 왜 마태는 하늘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을까요? 하늘에는 천사가 살고 있어서요? 하늘에 금은보화가 많아서요? 하늘에 가면 영원히 살 수 있어서요? 아닙니다. 마태가 하늘을 소중히 여긴 이유는 하늘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16번 나옵니다. 그 중에 15번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나머지 1번은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 아버지’, ‘하늘에 계신 이’ 등의 표현이 18번 나옵니다. 다른 성경에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만 하늘 아버지(11:13)라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세리였습니다. 그는 지배국 로마에게 동족들의 세금을 수탈해 바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국노입니다. 민족의 역적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친일파입니다. 돈 때문에 민족을 배반하고 이웃을 배반하고 살았습니다. 돈, 돈, 돈하며 살았습니다. 돈 때문에 외톨이가 됐습니다. 마태는 돈에 매여 돈에 끌려 다니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돈이 전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마태는 돈이 아니라 하늘, 하늘, 하늘하며 살았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나라를 전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마태에게 하늘은 삶의 소망이었고 인생의 사명이었습니다. 마태에게 하늘은 인생의 의미였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늘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무엇입니까? 땅의 일에 심취하지 마세요.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저는 종종 아내에게 내가 갑자기 죽어도 울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어제 저녁에도 밥을 먹으면서 이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위해 의롭게 죽을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죽으려고요. 저에게는 저 하늘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을 바라보며 사세요. 이 세상 별것 아닙니다. 제가 인생을 오래 살지 않았지만 살면 살수록 인생은 허무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은 모두 지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하늘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사세요. 하늘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입니다.
2. ‘하늘에 계신’의 의미
두 번째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나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편재, 무소부재).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성경 원문에는 ‘하늘들 안에 계신’, ‘하늘들에 계신’입니다. 하늘이 복수입니다. 왜 하늘이 복수일까요? 유대인들은 하늘이 3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층 하늘은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입니다. 2층 하늘은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 보다 높은 하늘입니다. 우주 공간입니다. 3층 하늘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하늘도 궁창(firmament, skies)에 속합니다. 사실상 1층천과 2층천은 같은 것입니다. 또 하늘이 복수로 쓰인 이유는 히브리어는 아주 큰 것을 나타낼 때는 복수형으로 씁니다. 하늘은 너무 큰 것이기 때문이 복수형으로 쓴 것입니다. 실제로 하늘은 인간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위에 있는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밑에 있는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7)
그런데 이 하늘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저기 높은 하늘만 하늘이 아닙니다. 여기 얕은 공간도 하늘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여기도 하늘입니다. 하늘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늘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늘은 비행을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딴 세계처럼 보이지만 딴 세계가 아닙니다. 하늘은 우리에게 항상 경험되어지는 세계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하늘을 경험하며 살면서도 하늘을 경험하는 것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어렸을 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참 신기했습니다. 구름이 산에 걸린 것을 보면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한 번 가보고 싶었어요.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보고 싶었어요. 초등학교를 다닐 때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이 언덕 아래에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려면 언덕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늦가을이 되면 마을에 아침에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가방을 매고 학교 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언덕에는 안개가 조금 밖에 없어요. 마을을 내려다보면 안개에 덥여 있어요. 제가 그 안개 속에서 잠을 자고 아침을 먹은 거예요. 안개가 짙을 때는 바로 앞에 있는 마을이 안 보여요. 안개가 흐릴 때는 마을이 흐릿하게 보여요. 언덕 맞은편도 저지대였어요. 거기도 안개가 자욱해요. 저는 그 사이를 걷는 거예요. 그런데 안개가 구름이고 구름이 안개입니다. 저는 가을마다 구름을 경험하며 살았던 거예요. 하지만 구름을 경험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구름은 항상 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내가 구름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하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가 우주에 떠 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공중에 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는 하늘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도 가까이 있습니다. 보이는 하늘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천국 하늘은 이미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그 열린 하늘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10:7)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에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고 했습니다. 밭은 세상입니다. 이미 천국이 세상 가운데 와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17장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가까이에 와 있는 하늘을 스데반 집사님이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열린 하늘을 경험했습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딴 세상입니다. 동시에 이 세상 안에 이미 임한 또 하나의 세상입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은 하늘이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은 하늘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에요.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은 어린 아이가 옆에 있는 아빠를 부르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멀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외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귀를 막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여러분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안 떠나십니다.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삶의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세요. 그래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은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계신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시편 115편 3절에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안 되는 일, 힘든 일,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 맡겨보세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입김으로 산을 날려버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손가락으로 우주를 붙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통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4:2에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보좌는 다스림,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 보좌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말은 초월적인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초월적인 통치입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통치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통치입니다. 세상 왕의 보좌는 땅에 있습니다. 땅을 다스립니다. 세상 왕이 자신의 뜻대로 역사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절대로 세상 왕의 뜻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상 왕은 제한적입니다. 유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역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끌고 갑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세요. 그분의 손에 이끌려 사세요. 그래야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가정주부가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합니다. 가족에게 밥을 먹입니다. 아이에게 옷을 입힙니다. 학교에 보냅니다. 집안을 정리합니다. 설거지를 합니다. 청소기를 돌립니다. 가정주부는 매일 같이 집안을 돌봅니다. 하루만 쉬어도 집안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가정주부가 매일 집안을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매일같이 돌보십니다. 가정주부가 설거지를 하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삶을 설거지 하십니다. 가정주부가 아이에게 간식을 먹이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인류에게 간식을 먹이십니다. 매일 가정주부가 집안을 돌보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인류를 돌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은 어디나 계셔서 그 무한하신 능력으로 인류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돌보시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어제 밤 10시쯤이었습니다. 셋째가 화장실 쪽 복도에서 ‘아빠!’하고 불러요. 저는 사무실에 앉아있었습니다. 제가 “왜?”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빠, 잠깐 이리 와보세요.” 제가 다시 “왜?”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뭐가 들어왔어요?”라고 해요. 복도 창문을 열어놨더니 불빛을 보고 뭐가 들어온 것 같아서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복도에 벌레가 들어와 있어서 화장실에 갔다가 오지 못하고 서 있는 거예요. 제가 셋째가 보는 앞에서 벌레를 밟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빠예요. 하나님은 우리와 딴 세상에서 뒷짐 지고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막연하게 우주 어느 귀퉁이에 계신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아빠예요. 자기 자녀를 돌보시는 아빠예요. 구경만 하는 아빠가 아니에요. 뒷짐만 지고 있는 아빠는 아빠가 아니에요. 아빠는 자녀가 부르면 달려갑니다. 아빠가 자녀를 돌보듯이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돌보시는 아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3.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주는 유익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합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에 계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피조물입니다.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의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땅의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의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땅에 있는 피조물을 생각하듯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어린 아이가 아빠를 부르듯이 친근함,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쉽게 말하고 쉽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어린 아이 갖은 마음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에라스무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너무 인간적이오.”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함과 경외감, 이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땅에 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전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또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기도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땅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다 보면 우리가 가지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땅의 것은 우리에게 좋아 보이나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것을 구하지만 그 땅에 있는 것이 하늘에 있는 것을 돕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기도할 때 하늘 위에 계신 분을 우러러 보게 합니다. 기도는 위를 보며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땅을 바라보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옆을 바라보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을 바라보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주변 환경을 계산하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빈들에 계실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녁이 됐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다가는 광야에서 사람들이 기진 할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장정만 5천 명입니다. 노인, 여자, 아이를 포함하면 20,000명이 넘었습니다. 제자들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해 보았습니다. 200 데나리온 이상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하루 품삯입니다. 13만원씩 계산하면 2,600만원입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은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턱 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늘을 바라보시고 기도하십니다.
<마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우러러’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나플레포입니다. 아나플레포는 ‘위를 쳐다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쳐다보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돈과 사람 숫자를 계산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늘을 쳐다보며 하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사람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헤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의 능력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 아래를 보지 마세요. 절망뿐입니다. 기도할 때는 주변을 보지 마세요. 한 숨뿐입니다. 기도할 때는 위를 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러러 보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121:1-2) 나의 도움은 저 높은 곳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의 분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땅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입니다(눅18:10). 바리새인이 섰습니다. 섰다는 말은 하나님을 우러러 봤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들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눅18:11-12).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불렀지만 사실은 사람을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본 것 같지만 사람을 바라본 것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는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눅18:13)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린드 존슨 대통령(36대)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린드 존슨은 케네디가 대통령일 때 부통령이었던 사람입니다.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린드 존슨이 대통령 자리에 오릅니다. 어느 날, 대통령이 보좌관들과 함께 백안관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으로 평가받는 빌 모이어스가 백악관 대변인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빌 모이어스에게 식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일제히 눈을 감자 모이어스가 기도를 하는데, 음성이 너무 작은 겁니다. 그러자 다혈질로 유명한 존슨 대통령이 소리를 칩니다. “빌 더 크게 기도해요! 잘 안 들려요.” 그러자 빌 모이어스가 대답합니다. “각하 저는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대통령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기도가 아닙니다. 주변 환경을 생각하는 것도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는 것입니다. 명상, 참선, 마음공부는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명상, 마음공부 그 이상입니다. 기도는 나 외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회개는 자기를 돌아보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회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내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아버지 앞에 서 있는 것 아닙니다. 크셔도 너무 크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기도는 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J. B. 필립스의 「네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필립스는 어른 크리스천이 주일학교 어린이 수준의 하나님을 가지고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작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종종 느낀다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非基督敎人)들은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인(成人)의 하나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하나님은 성경책의 페이지들 사이에서만 또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하는 ‘온실(溫室)의 하나님’에 불과할 것이다. 교회의 예배에 동참한다는 것은 거대한 위선자 집단의 일원이 되어 진리를 포기하고 그 대가로 안정감을 얻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의지(意志)를 가진 많은 사람들은 이런 거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필립스는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현실의 삶의 풍랑을 5분도 견딜 수 없는 어린아이 같은 하나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일학교 어린이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의 개념에서 벗어납시다. 우리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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