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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멀홀랜드의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멀홀랜드 목사님이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엄마와 다섯 살 동생과 함께 슈퍼마켓을 갔습니다. 동생이 엄마를 잃어버렸습니다. 동생은 조금 전까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었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어머니를 놓친 것입니다. 키보다 높게 늘어선 선반들 사이에서 동생은 외톨이가 됐습니다. 주변에는 온통 낯선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때 동생이 울먹이는 소리로 “헬렌! 헬렌!”이라고 외쳤습니다. 어머니는 동생의 소리를 알아들었고 금세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힘껏 껴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엄마를 왜 헬렌이라고 불렀지?”라고 물었습니다. 동생은 “여기에는 엄마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헬렌은 한 사람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5살짜리 아이의 생각입니다. 엄마는 많지만 자기 엄마는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정말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일본에는 800만의 신이 있습니다. 인도에는 3억 3천만의 신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253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나라마다 다 다른 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신들이 있을까요? 셀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신들과 전혀 다른 신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 세상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감동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 어떤 사람들이 자기가 섬기는 신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까요? 오직 우리 크리스천만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아주 고유하고 독특한 명칭입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명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이해할 수 없는 우리만의 호칭입니다.
요즘 대학 입학원서를 쓰고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기도를 많이 할 때입니다. 11월 수학능력평가 시험을 보는 날에는 교회, 성당, 절, 산사, 각종 기도처에 사람들이 수없이 몰립니다. 제가 일산에 있을 때입니다. 집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절이 있었습니다. 시험 보는 날에는 절 앞에 차량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도 150여명의 학부모가 하루 종일 모여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시험을 보는 학교 정문에는 합장을 한 사람, 묵주를 손에 쥔 사람, 손을 모은 사람들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종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신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 신들이 모두 진짜일까요? 가짜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중에 진짜가 있지 않을까요? 그 진짜 신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가짜 신들에게 하는 기도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른 것이 주기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는 아주 광범위한 공동체입니다. 이 시간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1. ‘우리’를 위한 ‘우리’의 기도
주기도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주기도는 기도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안 나옵니다. ‘주’라는 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말도 안 나옵니다. 아주 특이한 기도문입니다. 그러면 무슨 말이 가장 많이 나올까요? ‘우리’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주기도문에 ‘우리’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그런데 헬라어 주기도문에는 8번이 나옵니다. 헬라어 주기도문 중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만 직역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우리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우리가 또한 탕감<용서>한 것 같이”, “우리를 용서하시옵소서”, “우리를 이끌어 들이지 마소서”, “우리를 구하여 주옵소서” 주기도에 계속해서 나오는 단어가 ‘우리’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라는 말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내가 나만을 위해서 하는 나만의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모델인 주기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위한 우리의 기도라면 하나님은 없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하나님 나라의 운동의 요약입니다. 주기도문에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범위, 울타리는 어디까지일까요?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입니다. 주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해야 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우리라는 말을 하실 때마다 목에 힘을 주시고 “우리의 ~”, “우리에게 ~”, “우리를 ~”이라고 소리를 높이지 않으셨을까요? 여러분! 주기도는 우리 모두를 위한 우리의 기도입니다. 주기도는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가르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나 밖에 없으면 안 됩니다. 내 가정, 내 인생, 내 자녀, 내 직장 내 것만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라는 말에 단순히 그리스도인들만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 땅의 모든 인류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5장 43-46절 때문입니다.
<마태복음5:43-46>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리(죄인)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십니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악인은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무조건 아무 때나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는 나의 필요가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용한 양식입니다. 내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입니다. 나의 시험이 아니라 우리의 시험입니다. 나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입니다. 주기도는 나의 필요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를 모범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나 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식 문제 때문에 내 자식과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을 위해서도 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세상에서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벧전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첫째가 고 3입니다. 제가 요즘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 기도합니다. 제가 아이를 위해서 기도할 때 제 아이를 위해서 바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 교회 젊은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직장생활, 가정, 미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이렇게 한 바퀴를 돈 다음에 저의 아이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전에는 이렇게 한 바퀴 돌고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요즘 대입 때문에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를 위해서 기도도 많이 하지 않아요. 많이 나오지도 않아요. “제 아이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로 가게 해주세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리에 있게 해주세요.”, “주님! 우리 아이에게 은혜주세요. 우리 아이를 인도해주세요” 이게 다예요. “하나님! 좋은 대학 가게 해주세요.”이렇게 기도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기도가 나오지를 않아요. 욕심 같아서요. 제가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제 기도를 제 욕심을 채우는데 써지지가 않아요.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서는 좋은 학교 가도록 기도합니다. 성공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이 결혼 잘 하도록 기도합니다. 안 될 것 같은 것도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형통하도록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기도가 되지 않아요.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기도 같아서 그렇게 기도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내 욕심만을 채우는 기도가 돼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짜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기도와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직장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그런데 나만을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직장 때문에 고민한다면 우리 주변에 직장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는 거예요. 자식 문제 때문에 기도할 때는 자식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 문제 때문에 우리 모두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요즘 기도를 한 가지 더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 입시제도입니다. 저는 학력고사 세대라 현 입시 제도에 대해서 그동안 잘 몰랐습니다. 아이 원서 쓴다고 해서 조금 알아봤어요. 돈을 많이 주면 대입 자기소개서를 대필해줍니다. 1학년 때부터 스펙 쌓으려고 여기 저기 다닙니다. 그런데 부모가 사회적 지위나 돈이 없으면 스펙 쌓기 어려워요. 제 아이는 스펙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저는 고등학생이 스펙을 쌓아야 되는지 몰랐어요.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1등 하는 학생들은 생활기록부를 자기가 직접 쓴대요. 선생님들이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쓰라고 한답니다. 명문대에 보내려고요. 그러니까 가짜 생활기록부 가지고 대학을 가는 거예요. 거기에 기록된 스펙은 많은 부분이 가짜인 거예요. 물론 현 입시제도에 좋은 점이 있습니다. 저는 그냥 현 입시제도가 어느 정도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점도 있어요. 입시 때문에 정말 억울한 사람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억울한지도 모르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입시 때문에 억울한 학생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게 됐습니다. 제 아이 때문에 현 입시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험생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골방에서 조용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골방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천은 교회에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교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울타리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필요 때문에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우리나라 그리고 인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기도입니다.
현대사회는 이기주의 사회입니다. 또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요리후지 가츠히로의 「현명한 이기주의」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리후지 가츠히로는 오사카 대학에서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요리후지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선심 파입니다. 선심 파는 마냥 착한 사람이에요. 손해를 봐도 마냥 도와주기만 하는 사람이에요. 선도 선으로 갚고 악도 선으로 갚는 사람입니다. 그냥 속아주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이타주의자입니다. 둘째, 사기파입니다.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이에요. 아주 극단적 이기주의자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있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셋째, 나이스파입니다. 나이스파는 나이스 가이(nice guy)의 줄임말입니다. 나이스 파는 상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는 사람예요. 악은 악으로 갚고 선은 선으로 갚는 사람이에요. 한 번은 사기꾼에게 속아서 협력할지 모르지만 다음부터는 사기꾼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우리 사회가 건강하려면 기브 앤 테이크가 분명한 나이스파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심파가 많으면 등쳐먹고 사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선심파가 착하게 보이지만 사기파에게 악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여러분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저도 공감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현대 사회에 이기주의를 은근히 부추기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익 사회의 관점에서 써진 책입니다. 일본 사람다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은 아닙니다. 성경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물론 속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한 번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사람에게 이용당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악을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실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악은 악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받은 만큼 해주라고 말합니다.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기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 나를 박해하는 사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이 가진 공동체 정신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족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녀를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우자를 내가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셨다고 합니다. 가족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운명공동체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과 운명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1인칭 복수입니다. 아버지는 단수입니다. 자녀는 많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 분입니다. 아버지가 백 명, 천 명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자녀는 여럿입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동시에 저기 있는 성도의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도 아버지이십니다. 동시에 내가 싫어하는 성도의 아버지이십니다. 부자의 아버지도 되시지만 가난한 자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강한 자의 아버지시지만 약한 자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우리는 아버지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툽니다. 미워합니다. 하지만 싸우면 안 됩니다.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입니다.
저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들 중에 제가 특히 좋아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두 아이가 어렸을 때 나무 밑에서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입니다. 어제 저녁에 둘째가 열이 39도까지 올라갔습니다. 금요기도회 후에 언니가 동생에게 과일을 갖다 주는 거예요. 언니가 아픈 동생을 챙기는 모습, 이것이 형제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때 부모의 마음이 흐뭇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형제가 매일 같이 집에서 싸운다고 생각해보세요.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내가 사랑하는 교우도 사랑하시고 내가 미워하는 교우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범생 성도도 사랑하시고 말썽꾸러기 성도도 사랑하십니다.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우리 눈에 나빠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에서 형제들이 “내가 잘 났다. 네가 못 났다.”라며 싸운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미워하는 성도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는 이상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 이상한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범생입니다. 순종적이고 바른 아들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둘째는 이상한 아들입니다. 불량하고 반항적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들입니다. 어느 날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 중 자신의 몫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나는 아버지가 필요 없어요. 나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어요. 나에는 아버지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내 몫의 재산을 지금 주세요.” 유대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일입니다. 첫째 아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큰일 났습니다. 아버지가 날벼락을 치실 것입니다. 어쩌면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재산을 떼어 줍니다. 모범생인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이상했습니다. 둘째는 재산을 처분하자마자 타국으로 떠나버립니다. 집안이 뒤집어졌어요. 하지만 둘째 아들은 신이 났습니다. 돈을 흥청망청 썼습니다. 둘째는 술과 여자로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돼지우리에서 돼지처럼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탕자는 부끄러웠지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달려 나와 안아주고 입을 맞춥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껴줍니다.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깁니다.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즐거워하게 합니다. 첫째 아들이 밭에서 돌아오다가 집에서 나는 풍악소리를 듣고 하인을 불렀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이상했습니다.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다시 뛰어나옵니다. 첫째 아들이 불만을 터트립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까지 아버지 명을 어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으신 적이 있으세요? 그런데 아버지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저 이상한 녀석을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군요?” 아버지는 첫째 아들도 혼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첫째야! 내 것이 다 네 거야. 둘째는 죽었다고 다시 살아난 거야. 그러니 우리 함께 기뻐하자.” 아버지는 모범생인 첫째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한 둘째 아들도 사랑하십니다. 모범생의 아버지이지만 탕자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부의 비유입니다. 둘째 탕자와 첫째 모범생 모두를 위해 사랑을 탕진한 탕부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수천 년 유대 역사에 한 번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있을 수도,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탕자의 아버지 같은 분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탕부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탕부이십니까? 하나님은 허랑방탕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탕부이십니까? 하나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둘째 아들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사랑을 허비하시기 때문이십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부의 비유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저런 사람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저런 사람이 교회 다녀?” 예, 맞습니다. 저런 사람도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크리스천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사랑입니다. 첫째 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첫째 아들의 아버지이시며 둘째 아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 아버지는 내 아버지이시며 동시에 저 성도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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