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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 목사님은 주기도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리스도께서 이 기도만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좋은 모델로 주신 것 같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기도를 할 수가 있고 그와 같은 자세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기도문을 매우 유익한 모델과 본으로 삼고 신실하고 진실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델입니다.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암송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법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기도는 마법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주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외우지 마시고 진심으로 묵상하세요.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주기도문을 건물의 모형에 비유했습니다. 건축가는 건물을 짓기 전에 먼저 짓고자 하는 건물의 모형을 만듭니다. 그 모형을 따라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건축가는 건물이 제대로 지어져 가는지 모형과 건물을 수시로 비교합니다. 건물을 생각나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짓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형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기도건축가입니다. 주기도문은 기도건축가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주기도문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제대로 건축됩니다.
화실에 가면 여러 종류의 석고상이 있습니다. 화가 지망생들은 그것을 보면서 그리기 훈련을 합니다. 조금 그리고 보고 조금 그리고 보고 조금 그리고 또 다시 봅니다. 수없이 봅니다. 아주 꼼꼼히 봅니다. 한 번만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그림을 여러 차례 그립니다. 그러면서 그림의 완성도를 높여 갑니다. 또 대가들의 그림을 봅니다. 대가들은 어떻게 그림을 그렸는지 살핍니다. 우리는 기도를 스케치할 때 대가들의 기도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 모세의 기도, 엘리야의 기도, 여호사밧의 기도, 성경에는 대가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기도는 주기도입니다. 기도를 스케치할 때 주기도를 보세요. 아주 꼼꼼히 보아야 합니다. 보고 또 보세요. 그래야 기도가 제대로 그려집니다.
지도에는 바다가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 위에 그려져 있는 바다를 사람들이 항해하지는 않습니다. 바다 표시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지도를 본다고 해서 항해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가 있는 것은 진짜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같은 원리가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근본 뜻과는 거리가 먼 기도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기도를 주신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위해서입니다. 주기도를 보고 진짜 기도의 바다를 항해하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중얼거리며 기도 흉내를 내라고 주기도문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기도 선생님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말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 원문 주기도문은 ‘아버지’가 맨 앞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늘’이라는 말은 그 뒤에 나옵니다. 원래 주기도문은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아버지’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여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에 첫 번째 가르침은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심각한 불경죄입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십계명 중 세 번째 계명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계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아도나이(주님)’라고 돌려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호와를 하나님도 아닌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경악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버지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죄목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습니다(시68:5, 89:26).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어떤 문헌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예요.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아버지가 있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원래는 ‘아빠’입니다. 모든 성경학자들이 주기도문의 첫 단어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로 아람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빠’라는 아람어를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 아람어가 몇 군데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마가복음 14장 3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말은 ‘아빠’입니다. 아빠는 아버지의 친근한 표현입니다. 기도는 어린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듯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말은 하나님께 신뢰감, 친근감, 자신감, 담대함을 가지고 당당하게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보세요. 이상하세요? 저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 봤지만 정말 이상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경하다고 할 만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을 아빠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한 번 해보세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거예요. 저를 따라서 하겠습니다. “아빠 아버지”
지난 7월이었습니다. 041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와요. 모르는 번호예요. 거부했어요. 그랬더니 20-30초 만에 다시 와요. 또 끊었어요. 그런데 다시 와요. 그러게 4-5번을 거부를 눌렀어요. 그러다가 무슨 전화가 자꾸 오나 싶어 받았더니 셋째가 콜렉트 콜로 학교에서 전화를 한 거예요. 비 오니까 태우러 오라는 거예요. 목소리가 화가 나 있어요. 제가 전화를 계속 끊었잖아요. “아빠, 비와, 빨~리 와! 끊어”하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바쁜지, 올 수 있는지 묻지 않아요. 어디로 오라는 말도 없어요. 그냥 무조건 오라는 거예요. 제가 알아서 학교에 가서 아이를 찾아야 해요. 이 아이의 당당함이 어디서 나올까요? 아들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태우러 오라고 하는데 “아버님 저 강유입니다. 아버님 지금 굉장히 바쁘신가요? 날도 더운데 얼마나 수고가 많으세요. 점심은 드셨어요? 제가 전화를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지금 비가 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산이 없습니다. 죄송한데 저를 태우러 오실 수 있나요? 혹시 몇 시 까지 오실 수 있나요? 바쁘시면 천천히 오세요.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이렇게 안 해요. 아들이 이러면 얼마나 징그러워요. “아빠, 비 오니까 빨리 와! 끊어.” 이게 다예요. 이거면 충분해요. 제 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좋아요. 그래서 제가 기쁨으로 달려갑니다.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위엄이 하늘에 가득 하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이렇게 안 하셔도 돼요. 물론 필요에 따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아빠!”, “아빠 아버지!” 이거면 충분해요.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 친근감, 담대함을 가지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습니다. 돌을 지나면 조금씩 말을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아이를 안고 “엄마 해봐, 엄마! 엄마!”라고 말을 가르쳐요. 아빠는 “아빠라고 해봐, 아빠! 아빠!”라고 해요. 조금 지나면 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해요. 그런데 엄마 아빠 소리 빨리 듣고 싶어서 엄마 아빠를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아기가 “엄마”라고 하면 너무 좋아해요. 아빠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6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영,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니까 성령님이 오신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세요.
저의 첫째 아이가 11개월 됐을 때입니다. 아직 말을 못할 때입니다. “어푸어푸 어버버버” 이럴 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빠’ 하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아빠라는 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서 “아빠라고 해봐. 아빠, 아빠.”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못하는 거예요. 어쩌다가 실수로 비슷하게 발음이 나온 거예요. 진짜 아빠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실수로 나온 아빠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입니다. 어쩌다가 실수로 아빠라고 했다고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싱글벙글하는 거예요. 이게 아빠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빠라고 부르길 원하세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때 하나님이 기뻐하세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세요. 자녀들이 아버지라고 부르질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애가 타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세요. 교회 오시면 눈을 감고 진심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보세요. 여기는 아버지 집입니다. 아버지를 부르세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최고로 좋은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첫째가 고3이예요. 내년이면 대학생입니다. 어느 새 이렇게 컸나 싶어요. 문득 지난 18년을 돌아보게 됐어요. 아이를 혼낸 것 밖에 생각이 안나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를 처음 하는 거라 지혜가 없었구나! 참 미련한 아버지였구나! 어쩌다가 준비도 없이 아버지가 돼서 자식들이 힘들었겠구나!’ 그러면 두 번째 하면 잘 할까요? 아닙니다. 둘째 딸에게도 똑같이 못했어요. 셋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아버지는 연습을 해도 불안전한 아버지이고 연습을 해도 불완전한 아버지입니다. 몰라서 못하고 알아도 못하는 연약한 사람 아버지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쩌다가 아버지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버지이십니다.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가장 완전하신 아버지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주시지 않겠습니까? 주기도문에 우리 사람을 위한 첫 번째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입니다. 두 번째가 우리의 죄 용서입니다. 세 번째가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악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먹는 것 보다 죄 용서가 더 시급해요. 더 본질적인 문제예요. 주님이 이것을 모르실까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물질문제를 첫 번째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물질 문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시급한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를 이해하시는 분이세요. 우리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세요. 마태복음 6장을 보세요. 기도에 관한 말씀이 끝난 다음에 물질문제를 말씀하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것들 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가 너희를 그냥 두겠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시급한 문제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있습니다. 좋으신 아버지에게 물질 문제를 맡기세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평안하세요. 우리에게는 좋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아버지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우리를 위협해 오는 이 세상의 여러 가지 공격을 막아서지 않을까요? 제가 아이들과 횡단보도를 건널 때 차가 오면 저의 아이들이 다 건널 때까지 횡단보도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 건널 때까지 등으로 차를 막아섭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이 건너가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낸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쫓아왔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습니다. 광야에 갇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군대 사이에 서셨습니다. 그래서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위험을 막아서신 것입니다.
<출14:19-20> 19.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디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입니다.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서자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건널 때까지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 한 가운데 굳게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건너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건너왔습니다. 법궤가 물에 가장 먼저 들어가고 법궤가 물에서 가장 나중에 나왔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이 행진할 때 항상 맨 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협을 막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거예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 공격을 막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자녀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 31장20절에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기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창자가 들끓으니”라는 말을 개역성경은 “내 마음이 측은한즉”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가슴 절여하십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당신의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당하실 때 하나님이 얼마나 아파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사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이리 가운데 양을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흉악한 마귀에게 노출되어 있는 제자들을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부자 관계는 끊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의 압제를 받을 때입니다. 성경기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삿10:16)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존귀하신 분의 아들들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덕쟁이가 아니세요. 아버지와 아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 관계에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폐륜을 저질렀습니다. 어느 날 탕자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죽은 후에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버지께 빨리 죽어달라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도 아랍 지역에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아주 심각한 폐륜입니다. 그럼에도 탕자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떠날 때도 탕자는 여전히 그 아버지에 아들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쓸 때도 탕자는 여전히 그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허랑방탕하게 온갖 죄악 속에 살아도 여전히 그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탕자가 돼지 먹이를 먹으며 거지처럼 살아도 탕자는 그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부자 관계는 어떤 순간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잘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못해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허랑방탕한 탕자를 보며 저 아들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요?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누가복음 15:20절에 측은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측은하다는 말이 내장이 일렁일 정도로 마음이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애가 탔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아주 간사합니다. 우리 마음이 연약해질 때 “그러고도 네까짓 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너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야. 너는 자격 없어.”라고 우리 마음속에 속삭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은 마귀가 만들어준 것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저는 둘만 낳으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셋째가 생겼습니다. 아내가 우는 거예요. 둘도 힘든데 셋을 어떻게 키우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셋째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는 거예요. 하나나 둘 더 낳을 걸 그랬다는 거예요. 어렸을 때 셋째 아팠어요. 서울로 일산으로 좋다는 병원을 찾아다녔어요. 피곤하고 힘들어요. 돈도 많이 들어요. 하지만 셋째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자고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럽고 미안하고 애가 타요. 오히려 저 아이가 없어지면 어떻게 할까 노심초사합니다. 조금만 늦게 들어오면 걱정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특권 중에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은 피조물을 만드셨습니다. 지구상에 사는 동물의 종류가 100에서 120만 정도로 추정합니다. 곤충의 종류는 86만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 곤충의 종류가 300만이나 됩니다.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 바다 속에는 20,000종의 물고기 살고 있습니다. 식물은 35만종입니다. 지구상에 나무가 3조 그루라고 합니다. 풀, 꽃은 얼마나 많을까요? 지구상의 동식물은 셀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피조물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사들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들입니까? 또 천사들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존재들입니까? 그럼에도 천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자녀로 삼으시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존귀하지만 그냥 피조물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아버지 자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 이상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천사 이상의 존재입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특권 중에 특권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의 여동생이야기입니다. 여동생에게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척들이 딸을 놀렸습니다. “네 엄마 진짜 엄마 아냐! 네가 어릴 때 너네 엄마가 집 앞에 있는 다리 밑에서 너를 주어왔어. 내가 다 봤어. 너 업동이야!” 그러자 딸이 “아니야, 아니야, 내 엄마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런데 이모도 삼촌도 모두 자신을 주어왔다는 거예요. 친엄마가 아니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봤다는 거예요. 이제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요.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갑자기 고아가 된 거예요. 하루아침에 엄마가 아줌마가 됐어요. 이제 우리 집이 아니에요. 아줌마 아저씨 집이 됐어요. 이제 엄마도 제대로 부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우울하게 초등학교 중학교를 지내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의 고등학교 때 친구가 놀러왔어요. 엄마 친구가 딸에게 그러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엄마 고등학교 때 하고 똑같니?” 그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 ‘내가 왜 엄마를 닮아, 나는 엄마 딸이 아닌데! 이게 무슨 말이지!’ 생각하던 딸이 방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엄마 고등학교 때 앨범을 봤어요. 그랬더니 엄마 고등학교 때 모습이 지금 자기와 너무 똑같은 거예요. 10여년을 친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엄마를 진짜 엄마라고 부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진짜 자기 엄마였어요. 엄마라고 확인하는 순간 엄마에게 달려가서 부둥켜 않고 “엄마! 엄마! 내 엄마 맞지? 내 엄마 맞지?”라며 막 우는 거예요. 아무나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예요. 딸만이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거예요. 옆집 아이가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요. 지나가는데 누가 저에게 아빠라고 한다고 해보세요. 끔찍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특권입니다. 여러분! 이 특권을 좀 사용하세요. 예수님이 이 특권을 사용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하는 종교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해보세요. 아빠라고 불러지지 않으세요? 쑥스러우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세요.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세요. 성령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당당하게 삽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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