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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39권으로 BC 1,440년경부터 BC 400년경까지 약 1,000년 동안 30여명의 저자들의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스토리, 배경, 문체, 등장인물이 다 다릅니다. 아주 다양한 책들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모든 메시지는 십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 성경의 핵심입니다. 구약성경이 반지라면 십계명은 그 반지 가운데 박힌 다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이 십계명에 서론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요약하면 ‘나는 너를 구원한 여호와이다.’입니다. 십계명 서론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누구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론이 있기 때문에 십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서론이 없다면 십계명도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주기도문의 서론입니다. 이 서론에 주기도문의 탄생 배경이 있습니다. 또 주기도문의 사용 방법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고민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기도를 배우고 싶다면 주기도문을 자세히 보세요. 주기도를 묵상해보세요. 주기도문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모범 기도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 보다 더 완벽한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셀리는 “주기도는 기독교의 극치다.”라고 했습니다.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주기도문을 “가장 위대한 기도”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주기도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이 총괄되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주기도는 기도의 가장 완벽한 표본입니다. 기도를 배우기 원하신다면 주기도로 기도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에는 예수님의 기도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또 주님의 삶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처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하신대로 사셨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천국 운동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기도의 정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도한 만큼 삽니다. 산만큼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은 2,000년 전에 주님이 이 땅에 일으키셨던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 사역을 이 시대에 다시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로 기도하세요. 주님의 기도 정신을 본받으세요.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제자들이 해야 할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기도를 <제자들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은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나의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최고의 표준적인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할 때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됩니다. 기도할 때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해보세요. 우리의 기도를 주기도문에 비춰보세요. 그래야 우리는 바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두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기도의 향기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기도의 향기가 있었습니다. 이 향기가 바로 주기도의 탄생 배경입니다. 둘째, 주기도를 따라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주기도문, 예수님의 기도의 향기에서 태어나다
먼저, 예수님의 기도의 향기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기도하셨을까요? 잠깐 기도하셨을까요? 아니면 오래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래 기도하셨습니다. 본문이 아주 짧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잠깐 기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랜 시간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마치시매’라는 말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치시매’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우오마이입니다. 파우오마이는 ‘끝내다, 중지하다, 쉬다. 안식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멈추고 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마시치매’라는 말은 ‘마치시고 안식하시매’ 또는 ‘멈추고 쉬시매’라는 의미입니다. 일을 잠깐 하고 쉴까요? 아닙니다. 잠깐 일을 한 후에 쉬는 것은 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을 오랜 시간했기 때문에 쉬는 것입니다. 그때 쉼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안식하였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안식입니다.
또 쉰다는 말은 힘든 일을 한 후에 쉰다는 의미입니다. 쉬운 일을 하고 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힘든 일을 했기 때문에 쉬는 것입니다. 쉼이라는 것은 열심히 일을 한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런 티브이 광고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쉼의 기쁨은 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을 한 사람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안식의 원리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쉼의 의미를 모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오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묵상으로 조용히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힘쓰고 애쓰시며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안식하셨습니다. ‘마치시매’라는 말은 ‘안식하시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영혼의 안식입니다.
기도하신 후에 안식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상해보세요. 예수님이 안식하시는 모습이 어떠셨을까요? 너무 간절히 기도하셔서 지쳐 있으셨을까요? 에너지를 다 소진하셔서 기진맥진해 있으셨을까요? 힘이 빠져 축 늘어져 계셨을까요? 아니면 심한 스트레스로 얼굴이 새카맣게 되었을까요? 틀림없이 이런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평안한 모습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셨을 것입니다.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없이 인자한 미소가 얼굴에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기도 후에 누린 안식입니다. 기도는 심한 노동입니다.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기도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기도는 안식입니다.
제가 간절히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을 때 저에게 생기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왠지 모르는 기쁨이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또 평안함이 있습니다. 마음이 잔잔한 호수와 같아집니다. ‘아 좋다.’ 이런 마음이 듭니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갑니다. 또 삶에 대한 의욕이 솟구쳐납니다. 무슨 일이든 막 하고 싶어져요. 가만히 있고 싶지가 않아요. 또 확신이 넘칩니다. 안 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면 다 될 것 같아요. 여러분! 그런데 한 시간을 기도해도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 후에도 별 달라진 것이 없어요. 기도를 한 것 같은데 뭐했나 싶어요. 여러분! 정말 간절히 기도해보세요. 기도는 안식입니다. 기도는 쉼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충전지입니다. 기도의 맛이 있습니다. 그 기도의 맛을 좀 보세요.
사람은 영혼과 육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혼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육(몸)은 땅에서 왔습니다. 육은 땅의 것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땅에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오직 하늘에 계신 분으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내가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야 안식을 느낍니다. 기도할 때 우리 영혼은 하나님과 접촉됩니다. 그때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느낍니다. 여러분! 기도로 영혼을 하나님과 접촉시키세요. 하나님 안에서 영혼의 쉼을 얻으세요.
기도 후에 오는 영혼의 안식은 기도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에게서는 늘 기도의 향기가 났습니다. 한적 한 곳에서, 새벽 아직 밝기도 전에, 새벽 미명에, 따로 산에 올라가셔서 늘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늘 기도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실 뿐 제자들에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랍비들은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혼자 기도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마다 기도의 향기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기도의 향기를 맡은 제자들은 기도에 대한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 나도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싶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주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 말은 “예수님, 기도가 궁금해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게 기도를 가르쳐주세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향기를 맡은 제자들에게 기도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없을까요? “당신을 보니까 기도하고 싶네요. 당신을 보니까 교회 가고 싶네요. 당신을 보니까 예수 믿고 싶네요.”, “당신 교회 다녀? 아!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을 달라.”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교회 다녀요? 등대교회 다녀요? 그 교회 어디 있어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이런 말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이런 말을 들어면 안 됩니다. “아요, 당신 교회 다녀? 그래, 참, 당신을 보니까 교회 다니고 싶지 않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
초대교회는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교회를 오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어 했습니다. 베드로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몬이라는 사람이 보았습니다. 시몬이 돈을 주고 그 권능을 사려고 합니다. 베드로처럼 하고 싶었던 거예요.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처럼 하고 싶어야 하지 않을까요? 2002년 월드컵 영웅 중에 한 명인 이천수를 아시죠? 이천수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동료들이 골을 넣으면 기도 세레모니를 했습니다. 이천수 씨가 기도 세레모니가 너무 멋있더래요. 그래서 자기도 골을 넣고 기도 세레모니를 했다는 거예요.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온갖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었습니다. 그랬더니 병이 났고 악귀가 떠났습니다. 이 광경을 본 유대인 마술사 한 명이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 제사장의 아들 일곱 명도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흉내를 낸 것입니다. 너무 웃기지 않아요?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흉내를 낸 거예요.
이 모든 권능이 어디서 왔을까요? 기도에서 왔습니다. 4복음서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복음서가 누가복음입니다. 기도를 배우려면 누가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을 기도장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18장에서 다시 기도를 강조합니다. 11장은 주기도문 탄생장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기도의 향기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후편이 사도행전입니다. 두 책은 짝입니다. 사도행전의 권능은 기도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의 기도향기가 제자들의 몸에 뱄습니다. 그 기도향기로 세상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초대교회 기도향기가 오늘 우리 시대 교회에서 왜 사라졌을까요? 교회를 오래 다녀도 왜 안식이 없을까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향기가 납니다. 성도는 기도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기도하러 오세요. 우리 삶을 기도 향기로 채웁시다. 우리 교회를 기도 향기로 가득 채웁시다. 그래서 그 향기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이 지역에 가득 차게 합시다.
2.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두 번째로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 기도에 들어 있는 기도의 정신을 따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는 두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둘째, 우리 인간을 위한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사람을 위한 기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를 위한 기도가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기도는 항상 이 순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타국에서 가서 창기와 함께 다 먹어버렸습니다. 돈이 떨어졌어요. 잘 곳이 없어요. 먹을 것도 없어요. 신발도 옷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먹을 것이 없어 돼지가 먹는 것을 먹고 있어요. 지금 탕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먹을 것이 제일 필요합니다. 옷이 제일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옷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옷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돈이 제일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 돈, 돈, 합니다. 하지만 돈 보다 하나님이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먼저예요. 하나님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거예요. 이것이 기도의 순서예요.
주기도문은 다시 일곱 개의 간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간구 세 가지와 인간을 위한 간구 네 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한 간구 세 가지는 ①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②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③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간구 네 가지는 ①일용할 양식, ②우리의 죄 용서, ③시험에 들지 않는 것, ④악에서의 구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일곱 가지 주제를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평상시 하시던 기도 내용의 요약입니다. 이 기도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이 순서에 따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먼저입니다. 자식 문제가 급해도 하나님 먼저입니다. 돈 문제가 급해도 하나님 먼저입니다. 항상 이 순서입니다.
일곱 가지 주제에 나의 삶에 문제가 없습니다. 직장의 문제도 없습니다. 자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녀 문제를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자녀를 통해 주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하는데 시험에 들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이 시험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이 시험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문제를 주기도문에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은 ‘저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저렇게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하지 말아야 할 기도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외식기도입니다(마6:5). 외식은 헬라어로 가면이라는 말입니다(휘포크리테스). 외식기도는 가면기도입니다. 속마음과 겉이 다른 기도입니다. 진심이 없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기도입니다. 사람만 있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사람을 의식하지 마세요.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세요. 가면기도 하지 맙시다. 둘째, 중언부언기도입니다. 중언부언은 정확하지 않은 말입니다. 의미 없는 말입니다. 중언부언기도는 정확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기도 한 마디를 해도 정확한 기도를 하세요. 주기도문은 짧습니다. 하지만 분명합니다. 분명한 기도를 하세요.
지난 장마철입니다. 이 앞에 연못이 있습니다. 건조할 때는 물이 없습니다. 비가 오자 맹꽁이들이 나왔습니다. 맹꽁이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울어대는지 하루 종일 우는 거예요. 비가 오는 동안 내내 울어요. 개골개골, 개골개골, 개골개골, 개골개골, 하루 종일 우는데 다른 말은 없어요. 오직 개골개골입니다. 개구리는 오지 개골개골 외에는 없습니다. 의미 없습니다. 뜻이 없습니다. 그냥 개골개골입니다. 이것이 중언부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개구리 합창이 돼서는 안 됩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는 마음의 소원과 합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입에서 나오는 기도는 심령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루터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기도의 본질이자 정수는 고양된 심령임을 말한다. 심령을 울려 드리지 않는 것은 기도라고 할 수 없다.” 여러분! 마음을 올려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은 ‘이것으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것으로 기도하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주기도문으로만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기도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으로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여러 개 나옵니다. 기도가 다 다릅니다. 비슷하지도 않아요. 주기도문이 두 개 나옵니다. 그런데 두 주기도문이 다릅니다. 암송했다면 똑같아야지요. 하지만 기도의 기본 정신은 같습니다. 사도들도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주기도문으로 기도한 흔적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문헌에도 주기도로 기도한 흔적이 없습니다. 예배를 주기도로 마친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것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수요저녁예배, 새벽예배, 가정예배, 구역예배 그리고 기타 여러 모임과 예배의 마침으로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습니다. 아마 한 사람이 1년에 수 백 번의 주기도문을 암송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주기도로 기도함으로 주님의 기도의 정신을 본받는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기계적이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게 됩니다. 중언부언입니다. 그런데 이 전통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예배를 주기도로 마치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깁니다.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그냥 기도 후에 아멘으로 마치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주기도문을 적어도 1만 정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생각 없이 무의미하게 줄줄 외우고 끝냈습니다. 주기도의 기도 정신을 마음에 음미하며 외운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학생 때는 그냥 하니까 따라했어요. 무슨 뜻인지도 왜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람직한 가요? 어떤 종파는 하루에 다섯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합니다. 기도시간이 되면 아랍어로 된 기도문을 외웁니다. 하지만 뜻을 몰라요. 하라니까 하는 거예요. 불자가 불경을 외우듯 이교도가 기도문을 외우듯 주기도문을 그냥 맹목적으로 외우는 거예요. 이것이 바람직합니까? 주기도문이 주문이에요?
제가 고등학교 때 주기도문을 한 자리에서 1천 번 하면 신비한 체험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디 기도원에 가면 주기도문을 1천 번 시킨다더라.” 이런 말을 해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작정을 했습니다. 먼저 시간을 계산했습니다. 주기도를 빨리하면 20초 걸립니다. 천 번이면 5시간 55분예요.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거예요. 넉넉하게 7시간 잡았습니다. 밤11시에 예배실에 무릎을 꿇었어요.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5시간 정도 외웠습니다. 그리고 잠들은 것 같아요. 천 번을 채우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100번 정도 외우니까 주기도문이 입에서 따다다 나오는 거예요. 아주 빨라져요. 20초가 아니라 10초면 끝나요. 여러분! 이런 게 의미가 있어요? 주기도문이 마술사의 주문이에요?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주문이에요?
언급하기가 참 조심스러운데요. 주기도문 1만 번 드리기 운동을 하시는 목사님이 계세요. 만도기도 판매하세요. 한 번 외울 때마다 만보기처럼 계수하는 거예요. 주기도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그 목사님의 정신을 높이 삽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기도문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마틴 루터의 기도」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대단한 문장(주기도문)을 허겁지겁 넘어가다 보니 엉망이 되고 만다. 대단한 주님의 기도가 세상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한 해 동안 주님의 기도를 수 천 번씩 반복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이 그렇게 천 년을 반복한다고 해도 그 기도를 일점일획도 맛보지 못했거나 기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비극이다. 루터는 이렇게 평가한다. “주님의 기도는 지상에서 최고의 순교자이다. 누구든지 고문하고 학대한다. 제대로 사용해서 위안과 기쁨이 되는 경우는 드물기만 하다.” 그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라는 낱말은 더욱 심해서 거기에 포함된 무한한 가치를 철저히 무시하고 그냥 떠들어 댄다는 것이다(123-124 p).
윌리엄 버클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린 아이처럼 그 기도문을 암송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 기도의 모범 유형을 보여주려 하셨던 것이다. … 그것은 단순히 그대로 암송해야만 하는 기도로서가 아니라 우리 기도를 위한 모범 유형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여러분!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범입니다. 이를 통해 기도를 배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바른 기도를 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이 기도를 주문처럼 암송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암송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암송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암송해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주기도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갑자기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간절히 항상 기도하시던 예수님 자신의 기도 내용을 요약한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너희도 이 주제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주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의 틀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이 우리입니다. 이 기도의 틀을 너희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처럼 사셨습니다. 주기도문에 예수님의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으로 기도합시다. 그러나 앵무새처럼 암송하는 것은 하지 맙시다. 입은 주기도문을 줄줄 외우고 있는데 마음은 딴 곳에 가서 있는 기도는 하지 맙시다. 진심으로 마음을 드리는 기도를 합시다. 주기도를 개구리 합창이 되게 하지 맙시다. 큰 교회는 수백 명 수 천 명이 예배를 드립니다. 수 천 명이 주기도를 생각없이 암송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주기도가 개구리 합창이 아닐까요? 여러분! 주기도를 개구리 합창이 되게 하지 마세요. 한 마디를 해도 정확하고 분명하게 하세요. 마음을 담아서 기도하세요. 물론 필요에 따라 암송할 수 있습니다. 암송한다면 주님의 기도의 정신을 깊이 생각하며 암송합시다. 루터는 아이처럼 주기도문을 마신다고 했습니다. 또 어른처럼 먹고 마신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주기도문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나는 그 기도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암송하는 것은 경계했습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을 사형시키지 마세요. 순교자로 만들지 마세요. 주기도문을 살려주세요. 주기도문을 주신 예수님의 본 뜻을 마음에 새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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