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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어거스틴은 「신국론」(413~426년)이란 책에서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두 개의 도성이 발전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천상의 도성이고 인간의 도성은 땅의 도성입니다. 하늘의 도성은 영원하지만 땅의 도성은 순간적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로마는 철의 제국이었습니다. 갈수록 번영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로마는 결코 멸망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망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는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진행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세요.
이 땅에는 천상의 도성과 지상이 도성이 섞여 있습니다. 교회는 땅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땅의 도성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상의 도성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천상의 도성은 아닙니다. 교회는 천상의 도성도 땅의 도성도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천상의 도성의 표지판입니다. 교회는 두 도성이 혼재되어 있는 세상에서 천상의 도성의 안내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의 도성의 안내판입니다. 우리는 순례자들입니다. 교회는 하늘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손, 나그네들이 있는 곳입니다.
두 개의 도성은 ‘두 개의 사회’입니다. 하나의 사회는 ‘가인’에게서 시작합니다. 이 사회는 ‘사람의 도성’입니다. 가인은 에녹을 낳고 성을 쌓은 후에 에녹성이라고 부릅니다. 가인은 인류 최초로 땅의 도성을 쌓은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의 사회는 ‘아벨’에게서 시작합니다. 이 사회는 ‘하나님의 도성’에 속했습니다. 지상의 도성은 타락한 가인, 동생을 죽인 살인자에 의해 시작됩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동생의 피가 흐릅니다. 그런데 로마의 시작 역시 동생을 죽인 형 로물루스에게서 시작됩니다. 우연한 일치일까요? 저는 여기에 세상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도성은 살인자에게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싸웠습니다. 땅의 도성과 천상의 도성의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사람의 도성은 죄, 살인, 욕망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은혜와 사랑으로 시작됐습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인간의 도성은 가인의 후손들을 통해 견고해집니다. 가인의 후손이 발전시킵니다. 하지만 노아의 홍수로 가인의 족보를 끝이 납니다. 그런데도 가인의 족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족보는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을 통해 니므롯에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가인이 쌓았던 성을 니므롯이 다시 쌓았습니다. 그 성이 바벨론과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무너진 바벨탑을 다시 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인이 쌓은 성에 속해 있습니까? 아니면 아벨에게서 시작된 성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 천상의 도성에 속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1. 두 개의 도시, 바벨론과 예루살렘
니므롯과 그의 추종자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니므롯은 노아의 3대손, 즉 증손자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노아의 후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5절에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아담의 아들들’입니다. 히브리어 ‘아담’은 인류의 시조 아담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후손들> 또는 <사람의 후손들>이라고 번역이 가능한 말입니다. 왜 성경기자는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을 노아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아담의 후손들>, <사람들 후손들>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홍수로 가인의 후예들이 멸망당했음에도 아담의 죄성이 여전히 사람들 속에 뿌리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의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바벨탑을 세운 것입니다. 이 땅에 최초로 인간의 도성을 쌓은 가인의 후예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이 지구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는 두 계보 중에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과 아벨의 계보입니다.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 대신 셋이라는 아들을 주십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가인의 계보와 셋(셋)의 계보로 나누어집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은 후에 성을 쌓고 이름을 에녹성이라고 합니다. 에녹은 ‘봉헌하다’는 뜻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무엇을 봉헌했을까요? 아닙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하나님께 봉헌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인은 에녹성에서 이상한 종교행위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인의 5대 손이 라멕입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얻습니다. 인류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시행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라멕은 자신의 할아버지 보다 더한 살인자가 됩니다.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는 사람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라멕은 소년을 죽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상함은 타박상을 말합니다. 라멕은 어떤 소년에 의해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약간 멍이 든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멍 때문에 소년을 죽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악할 때로 악해져 갔습니다.
반면에 셋의 후예들에게는 믿음이 계승됩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습니다. 에노스가 태어났을 때 인류는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사람들이 공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에노스 때에 공적인 예배가 시작됐습니다. 셋의 5대 손이 에녹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369세에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해 버립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자가 됩니다. 므두셀라의 손자가 바로 노아입니다. 셋의 후손들에게 믿음이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만을 남겨두시고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십니다. 홍수가 지나간 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아가 술에 하체를 드러내놓고 잤습니다. 그것을 본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를 조롱합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 셈과 셋째 아들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립니다. 이로 인해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습니다. 반면에 함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 함의 손자가 바로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은 자신의 추종자들 함께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니므롯은 노아의 3대 손입니다. 노아는 950세까지 삽니다. 성경에 빠진 족보가 없다면 니므롯이 탑을 쌓을 노아는 살아 있었습니다. 큰 할아버지 셈과 작은 할아버지 야벳도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면 노아 셈 야벳은 바벨탑을 함께 건축했을까요? 틀림없이 안했을 것입니다. 노아와 셈과 야벳을 따르는 사람들은 바벨탑을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니므롯을 따라 동방으로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2절에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바벨론은 사탄의 작전 기지가 됩니다. 사탄이 시날 땅 바벨을 자신의 작전 기지로 삼은 것입니다. 사탄이 니므롯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바벨로 인도한 것입니다. 비옥한 땅입니다. 살기 좋은 땅입니다. 인류의 최고의 문명이 발달한 곳입니다. 사탄은 여기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3대 제국을 일으킵니다. 앗수르를 일으킵니다. 바벨론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메대 파사를 일으킵니다. 이 3대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며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예루살렘을 작전 기지로 삼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바벨론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초청하십니다.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십니다. 그 땅에서 아브라함을 번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모리아 산에 세웁니다. 그 땅의 이름이 여호와 이레가 됩니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으로 장차 예루살렘이 인류 구원을 위한 평화의 도성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산입니다. 척박한 땅입니다. 물이 없는 곳입니다. 더운 곳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입니다. 시날 땅과는 아주 대조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을 인류 구원을 위한 작전 기지로 삼으십니다.
성경은 두 개의 도시 스토리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입니다. 두 도시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예루살렘은 아주 작습니다. 반면에 바벨론은 아주 광대한 성입니다. 예루살렘은 산골입니다. 반면에 바벨론은 도시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핍박한 것처럼 바벨론은 끊임없이 예루살렘을 핍박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은 바벨론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날 땅에서 일어난 제국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메대 파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땅은 지금 황무지가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막의 들짐승이 승냥이와 함께 거기에 살겠고 타조도 그 가운데에 살 것이요 영원히 주민이 없으며 대대에 살 자가 없으리라”(렘50:39)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사13:19) 선지자의 예언처럼 시날 평지는 황무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아직도 건재합니다.
인류 역사는 두 도시 이야기입니다. 교회라는 도성과 세상이라는 도성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핍박한 것처럼 세상 도성은 교회 도성을 핍박합니다. 세상 도성과 교회 도성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발전합니다. 더 찬란해집니다. 세상에 비해 교회는 초라합니다. 갈수록 쇠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교회는 세상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바벨론을 이긴 것처럼 교회는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 나라는 멸망하지만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사시다가 세상이 당신을 위협하면 쫄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상은 망하도록 작정되어진 도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합니다. 여러분은 천상의 도성에 속해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세요.
2. 여호와께서 땅으로 내려오시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고 있는 시날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5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기 내려오셨다는 말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시18:9>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실(강림) 때에, 그 발 아래에는 짙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표준새번역)
<사64:1> 주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강림),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표준새번역)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약 40여 번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 대부분 ‘강림’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강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는 인류를 심판하셨습니다. 언어가 쪼개졌습니다. 인류는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너무 사악해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들의 죄를 멈추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 때까지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다가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런데 세상은 갈 때까지 가보자고 합니다. 끝까지 가자고 합니다. 끝장을 보자고 합니다. 하지만 안 됩니다. 끝까지 가면 안 됩니다. 가다가 멈추어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니므롯이 탑을 더 이상 쌓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악해지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도 이 은혜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은혜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창기들과 함께 다 먹어버렸습니다. 돈이 떨어졌습니다. 탕자는 타국에서 돼지 먹이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비참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자신의 의를 가지고 왔습니까? 집을 나간 자신이 내세울 게 있습니까? 없어요. 탕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품꾼으로라도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붙든 것입니다. 탕자를 살린 것은 은혜입니다.
12명의 정탐꾼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보고합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거인이라는 것입니다. 성읍은 크고 그들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메뚜기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우리는 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갈렙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은 우리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갈렙이 붙든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광야를 어떻게 지났습니까? 은혜로 지났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은혜로 살았습니다. 은혜 아니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은 은혜의 땅입니다. 10명은 자신들의 모습을 붙들었습니다. 이것저것 계산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갈렙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었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따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순간에도 은혜를 붙드세요. 은혜를 붙들면 절대 죽지 않습니다.
둘째,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바로의 학정이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져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십니다.
<출3:7-8>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분명히 보셨습니다. 그들의 근심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그들이 당하는 아픔을 당신이 직접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려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저었습니다. 힘겹게 한다는 말이 지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바람과 바다가 제자들을 지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다 아직도 가운데예요. 날이 세려해요.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로 지친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예수님이 나를 만나기 위해 머리에 밤이슬을 맞으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합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내가 먹는 것을 주님이 드시려고요. 내 삶의 아픔을 담당하시려고요. 여러분! 우리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참고 기다리세요. 주님이 내려오십니다.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오시면 됩니다.
<약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늘로 오르려고 합니다. 니므롯처럼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높이 더 높이. BC 626년에 나보폴라사르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바벨탑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쌓는 중에 죽습니다.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이 바벨탑을 완성을 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7년 동안 들에서 풀을 먹고 삽니다. 머리털이 독수리 털처럼 자랐습니다. 손톱은 새의 발톱처럼 자랐습니다. BC 323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바벨탑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1만 여명을 동원하여 두 달 동아 성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돌연 중단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33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습니다. 왜 죽었을까요? 역사가들이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저는 바벨탑의 저주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1979년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바벨론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을 이어 고대 바벨론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중단됩니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합니다. 걸프전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후세인은 연합군에 붙잡혀 2006년 12월에 사형당합니다.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사람들은 그 말로가 다 좋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그 땅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성의 기초를 쌓을 때 맏아들을 잃게 되고 성문을 세울 때는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550여년 지났습니다. 아합왕 때입니다.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합니다. 저주가 있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주위에서 말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을 다시 쌓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예언처럼 성의 기초를 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이 죽습니다. 그런데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 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이 죽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조롱합니다. 성경에 반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세요. 역사는 성경대로 됩니다. 성경에 따라 사세요. 세상의 도성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세요. 가인이 쌓은 도성, 바벨탑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을 쌓는 사람이 되세요. 세상 나라는 망하지만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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