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계정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
2 == 2 ok!
「웃으면 행복하고 웃기면 성공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유머 강사 1호인 박인옥 씨가 쓴 책입니다. 박인옥 씨가 유머 강사가 된 동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병원에서는 병명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박인옥 씨는 ‘저러다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공포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보험금을 타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어 20개나 되는 보험을 모두 해약했습니다. 그 보험금으로 남편의 회복을 위해서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박인옥 씨는 남편이 가는 날까지 편안하고 기쁘게 지내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 남편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을 병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낫게 한 것은 바로 '기쁨'이란 약이었습니다. 그 후로 박인옥 씨는 기쁨이 건강의 요법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연구한 끝에 책을 쓰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머 강사가 되었습니다.
18년간 웃음의 의학적 효과를 연구해 온 미국의 리버트 박사는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에게서 피를 뽑아 분석해 보면 암을 일으키는 종양세포를 공격하는 킬러 세포가 많이 생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웃음은 그 어떤 운동보다도 운동 효과가 있으며,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심리적 안정감을 더해주므로 감기와 같은 감염 질환은 물론이고 암과 성인병을 예방해준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오사카 대학 대학원 신경강좌팀은 웃음은 몸의 항체인 NK(내추럴 킬러) 세포 등 각종 항체를 분비시켜 암을 예방하고 치료한다고 했습니다. 박인옥 씨는 <웃음은 최고의 약>이라고 했습니다. 웃음은 우리 마음속의 병뿐 아니라 육체의 병도 치료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웃음이 최고의 약입니다. 웃으며 삽시다.
유머 강사 홍성현 씨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홍성현 씨는 아내와 다퉜습니다. 그날 밤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다가 팔이 장롱에 부딪혔습니다. “아~ 아파!”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순간 팔에 전기가 찌릿하면서 얼굴이 찡그려지고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거봐! 벌 받잖아”라고 했습니다. 홍 씨는 “이 밤에 벌이 어디 있어?”라고 대구했습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벌은 없어도 꽃은 있네요.” 홍성현 씨가 되묻습니다. “꽃이 어디 있어? 어디 있어?” 그러자 아내가 턱을 두 손으로 받히며 “여기 있잖아” 홍 씨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피식하고 터졌습니다. 서먹했던 부부 사이가 갑자기 부드러워졌습니다. 아내의 유머 한 마디로 싸움이 끝난 것입니다. 웃음은 갈등을 해결해주는 약입니다. 피아제 제랄드는 “유머는 삶의 갈등을 이겨내는 안전밸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 세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웃음이라는 갈등, 다툼, 시험의 치료약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둘째, 크리스천이 기쁨을 왜 예수님에게서 시작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천의 기쁨의 테두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갈등의 치료약은 주 안에서의 기쁨
먼저 웃음이라는 갈등, 다툼, 시험의 치료약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두 자매,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 어떤 요직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싸우는 사람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싸움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 안에 적지 않은 상처와 피해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공동체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왜 싸우는지 침묵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파고들지 않습니다. 문제를 그냥 덮어 둡니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의 갈등과 다툼을 치료하는 약을 처방합니다. 그것은 기쁨이라는 약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 안에서의 기쁨은 다툼으로 상처 입은 공동체를 치료하는 최고의 약입니다.
조직 사회에서 유머는 상사와 부하의 김장감을 완화시켜줍니다. 그래서 직원들 간의 유대감을 형성해줍니다. 또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기 때문에 믿음과 신뢰가 쌓입니다. 다니엘 맥닐은 “웃는 얼굴은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하고 굳은 얼굴은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한다.”고 했습니다. 로버트 오벤은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함께 웃을 수 없다는 것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박인옥 씨는 “웃음은 상대방의 허물까지 용서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웃음은 공동체를 치료해주는 약입니다. 웃음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영양제입니다. 기쁨은 다툼을 치료하는 최고의 약입니다.
또 기쁨은 시험을 이기는 약입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ποικίλος)라는 말이 헬라어로 ‘많은 색깔의, 여러 가지 색의, 가지각색의, 다채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인생에는 형형색색의 시험이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시험이 있습니다. 질병, 이별, 유혹, 아픔, 죽음, 실직, 낙방, 사고, 배신, 조롱, 무시, 실패, 유급 등등 아주 각양각색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있을 때 나타나는 반응도 매우 다양합니다.
심리학에서 방어기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방어기제라는 것은 불안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가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방어기제의 종류는 수십 가지입니다. 이것들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병적인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억압(의식에서 용납하기 힘든 생각, 욕망, 충동들을 무의식 속으로 눌러 넣어버리는 것), 부정(현실에서 일어났던 위협적이거나 외상적인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는 것), 투사(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 합리화(자신의 문제행동에 대해 그럴듯한 핑계를 사용하여 받아들여질 수 있게끔 재해석하는 것), 퇴행(심한 스트레스나 좌절을 당했을 때, 현재의 발달단계보다 더 이전의 발달단계로 후퇴하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억제, 이타주의, 승화, 유머입니다. 억제는 감정을 잘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타주의는 자신의 욕구를 누르고 타인의 욕구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불편하고 힘든 감정이 생길 때마다 봉사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또 승화는 수용될 수 없는 충동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충동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맞았어요. 아주 억울해요. 그 사람을 실컷 때려주고 싶어요. 그런데 때리면 폭행자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욕구를 다른 곳으로 분출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격투기 선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챔피언을 먹는 거예요. 유머는 고통을 웃음으로 넘기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을 앞둔 유대인들을 붙들어주었던 것은 유머이었습니다. 고통, 죽음을 유머로 극복한 것입니다. 아주 성숙한 방법입니다. 유대 민족은 민족 전체가 성숙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네 가지 건강한 방어 기제 중에 유머를 최고 단계의 방어기제라고 말합니다. 고통과 슬픔 괴로움을 유머로 이기는 것입니다. 극한의 고통이 앞에 닥쳐왔는데도 유머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을 말합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는 최고의 방법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만날 때 ‘아, 뭔가 뜻이 있겠지!’하며 고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아주 좋은 신앙의 태도입니다. 시험을 참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기뻐하는 것은 더 좋은 방법입니다. 기쁨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기쁨이 최고의 약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에도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시험을 기쁘게 여기는 것이 가능할까요? 너무 슬픈데 웃는 것이 가능할까요?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안 돼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두 번째가 희락(기쁨)입니다. 사람은 안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능합니다. 은혜로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갈등과 다툼 시험 고통을 이기는 최고의 약입니다.
2. 참 기쁨은 여기서 시작된다
두 번째 크리스천이 기쁨을 왜 예수님에게서 시작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입니다. 성경 66권 중 첫 번째 책이 창세기입니다. 창세기는 천지창조 스토리로 시작합니다. 창조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는 뼈대 중의 하나가 기쁨입니다. 창세기 1장에 좋았더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천지가 창조될 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에덴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동산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기쁨의 책입니다. 성경은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천국에는 아주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성경 66권 중 마지막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기쁨의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기쁨을 뜻하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노래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찬송이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기뻐하다는 말이 2번 나옵니다. 혼인이라는 말 2번, 잔치라는 말 1번, 영광이라는 말 17번, 경배라는 말 20번, 신랑이라는 말 1번, 신부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 또 새 것이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새 노래’, ‘새 예루살렘’. 그리고 노래가 13곡 나옵니다.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신다고 했습니다(7:17). 또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세상 종말에 관한 책입니다. 동시에 천국의 기쁨과 감격 흥분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성경 시작이 기쁨입니다. 성경의 끝이 기쁨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시작될 때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렸던 에덴의 기쁨을 찾아가는 책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쁨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기쁨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한 밤 중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예수님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잃어버린 에덴의 기쁨을 다시 찾아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주님이 기쁨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기뻐하십시오. 기쁨은 예수 안에서 시작됩니다. 일시적인 성공을 기뻐하지 마십시오. 성공이라는 것은 어느 날 나비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사나 교회 봉사자들에게 사역 때문에 기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칠십인 전도대를 파송하셨습니다. 전도대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엄청난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흥분해서 예수님께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을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번영으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회사나 사회에서 가진 특권으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즐기는 것으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사람으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는 것들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세상 기쁨은 언제 아픔으로 바뀔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기쁨이라면 여러분의 기쁨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기쁨의 전부로 삼으십시오. 그 다음에 이 기쁨이 여러분의 모든 생각을 흡수하게 하십시오. 이 기쁨 속에 잠기십시오. 예수님은 기쁨의 바다입니다.
모든 인류는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과의 청정한 만남을 갈망합니다. 이 순결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 대용품을 찾습니다. 그 대용품에는 위안용 음식, 초콜릿, 일, 업무 실적, 인정받는 것, 병적 의존 관계, 흥분, 도박, 오락, 술, 성, 마약, 우상 등이 있습니다. 순간의 짜릿한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기쁨의 대용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거짓 기쁨을 만들어 냅니다. 기쁨의 대용품은 하면 할수록 만족도가 떨어집니다. 나중에는 아무리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허무뿐입니다. 그래서 더 자극적인 찾게 됩니다. 더 짜릿한 것을 찾게 됩니다.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서 기쁨의 대용품이 주는 쾌락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쾌락은 계속 감소시키고, 그것에 대한 갈증은 계속 증가시키는 것이 바로 사탄의 공식이다” 기쁨의 대용품은 하면 할수록 갈증이 생깁니다.
여러분! 기쁨의 대용품에게 속지 마십시오. 사탄이 주는 거짓 기쁨에 속지 마십시오,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을 갈망하십시오. 주님에게서 여러분의 욕구를 충족하십시오. 주님 앞에는 기쁨의 심연이 있습니다. 이 기쁨이 진짜 기쁨입니다. 주님에게서 기쁨을 시작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기쁨에 빠져드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십시오. 삶의 잔에 주님의 축복의 기름이 흘러넘쳐도 그것으로 기뻐하지 마시고 그것을 주신 예수님으로 기뻐하세요.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3. 구별된 기쁨
마지막으로 크리스천의 기쁨의 테두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주 안’은 크리스천의 기쁨의 테두리를 말합니다. 주 안은 크리스천의 기쁨의 경계입니다. 주 안은 크리스천의 기쁨의 범위입니다. 주 안은 크리스천이 기쁨을 누리는 공간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주님 안에서만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주님 밖에서는 기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님 밖에 있는 기쁨을 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라는 고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을 벗어나 밖으로 나간다면 참으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 아닌 밖에 있는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이 세상의 기쁨을 찾아 나선다면 반드시 괴로움이 따라올 것입니다. 세상 기쁨은 기쁨처럼 보이지만 저주입니다. 죄악스러운 것을 결코 기뻐하지 마십시오. 그런 모든 기쁨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기쁨은 피하십시오. 그런 것들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나눌 수 없는 기쁨은 올바른 기쁨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크리스천이 기쁨을 어디서 누려야 하는지 그 테두리를 정해주는 말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기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이 기쁨은 예배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찬송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운 것입니다. 이 기쁨은 순결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 기쁨은 파급력이 강합니다. 이 기쁨에서는 아름다운 주님의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예쁜 나비들과 꿀벌이 모여듭니다. 하지만 거짓 기쁨에서는 악취가 납니다. 음란한 웃음, 음흉한 웃음, 간사한 웃음, 묘한 웃음, 거짓 웃음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파리들이 모여듭니다.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가득한 은혜스러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은혜스러운 크리스천이 되세요. 향기로운 크리스천이 되세요. 얼굴에서 악취가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곤욕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서 아름다운 꽃향기가 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아름다우신 주님의 향기가 나기를 바랍니다.
한 변호사가 여행 중이었습니다. 변호사는 주일 아침에 교통순경에게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교통순경은 주변에 한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변호사는 교통순경에게 가까운 교회도 많은데 왜 그 교회를 소개했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순경이 대답했습니다. “어느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저는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면서 보니 그 교회에서 나오는 교인들의 표정이 가장 밝고 기뻐 보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기뻐해야 할 시간을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기뻐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지금 즉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조금 후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일이 생길 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즉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모든 순간을 다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온전히’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스입니다. 파스는 ‘모든 종류의’, ‘온갖’, ‘어떤 것이든지 다’, ‘전체’, ‘모든’, ‘매’라는 뜻입니다. 각양각색의 모든 종류의 시험을 다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다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다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가까운 사람은 기뻐하고 가깝지 않은 사람은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도 기뻐하고 가깝지 않은 사람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기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왜 기쁨이 서신일까요? 빌립보 교회에 기뻐할 일이 많아서요? 좋은 일이 많아서요?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툼과 갈등 분쟁이 있었습니다. 허영과 자랑이 있었습니다. 개처럼 달려들며 싸움을 거는 싸움꾼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할 일이 없는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짜증나고 울고 싶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기뻐합시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우니까 슬퍼진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슬퍼서 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울어서 슬퍼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웃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웃기는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해서 기쁜 것이다.” 기뻐하면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크 트웨인은 “유머의 원천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천국에는 유머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천국에는 유머가 필요 없습니다. 왜요? 기쁨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슬픔 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십자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슬픔의 자리에서도 기쁨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슬픔, 아픔, 고통, 괴로움, 다툼, 갈등, 낙심, 절망이 있으십니까? 거기서 기쁨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이 거기서 기쁨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슬픔을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한 주간도 주 안에서 기뻐합시다.
이전글 | 바벨탑 - 인류 최초로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들 |
---|---|
다음글 | 상하는 양식, 상하지 않는 양식 |
코멘트 작성하려면 SNS계정으로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