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주님 안에서 굳게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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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4:1~3
주일오전예배 | 2019-07-21
설교자 : 서요한 목사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사회발전조사기구(Social Progress Imperative)2018년 사회발전지수(SPI·Social Progress Index) 조사에서 한국이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18위를 차지했습니다. 캐나다가 14위이고 프랑스가 16위입니다. 스페인이 19위이고 미국이 25위입니다. 우리나라가 많은 부분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힘들다! 힘들다!”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좋은 시대에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탈입니다. 이탈이 우리 사회의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여유로움 속에서 여행, 레저, 취미, 스포츠 등 각종 문화를 통해 이탈을 경험합니다. 현대 문화는 일상의 일들을 답답하게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이탈을 경험하도록 유도합니다. 드라마, CF, 영화, 소설 등에서 이탈을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탈이 우리 사회를 흔드는 주범이 되었습니다. 이탈로 인해 우리 사회는 병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은 답답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나의 행복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우리와 우리 사회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자리를 떠나 죄에 빠진 아담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왜 네 자리를 떠났느냐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여왕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를 협박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누구의 협박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엘리야가 두려워 떠는 거예요.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해 굴에 숨었습니다. 굴에 숨어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 동굴은 선지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주 안에서 굳게 서라  

첫째, 바울은 먼저 주 안에서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1절 끝에 있는 서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테코(στκω, 능동태 명령형 στκετε)입니다. ‘스테코서다, 굳게 서다,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다, 진실되게 서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는 버티다, 확고하다, 계속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성경 시대에 스테코는 주로 군대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돌아가면서 초소경비를 섭니다. 군인이 초소에서 경비를 설 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다음 근무자가 올 때까지 그 자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경비병이 그 자리를 떠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부분 경계에 구멍이 뚫립니다. 결국 한 사람의 이탈로 부대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대가 위험에 빠지면 그 뒤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국민들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전쟁 중에 진지를 지키는 병사들은 적군에게 아무리 거센 공격을 받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래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진지를 떠나면 안 됩니다. 적군을 막다가 거기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테코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전쟁 중에 병사가 그 자리를 이탈하면 그곳을 통해 적군이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나라 최전방 감시초소를 GP라고 합니다. GP‘Guard Post’의 약자입니다. ‘경계·감시초소라는 뜻입니다. 바로 눈앞에 북한군이 보이는 곳입니다. 북한이 쳐들어오면 GP는 초소병들의 무덤이 되는 곳입니다. 도망갈 시간이 없습니다. 거기서 싸우다가 죽는 것입니다. 간부들은 GP에 근무하는 병사들에게 정신교육을 수 없이 합니다. 그때 병사들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듣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여기가 우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후퇴란 없다. 후퇴할 시간도 없다. 후방의 주력 부대가 전쟁에 대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바울이 말한 서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최전방에 있는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진지를 지키듯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서라는 바울의 말은 아주 굳건하게 서라는 의미입니다. 계속 서 있으라는 말입니다. 한결같이 서 있으라는 뜻입니다. 진실되게 서 있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떠나지 말아야할 진지는 어디일까요? 바울은 주 안에 서라고 했습니다. <주 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서 있어야 할 진지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 안>이라는 진지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사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이 지켜야 할 <진지>를 이탈하도록 끊임없이 시험합니다. 때로는 공격하고 때로는 유혹합니다. 어떤 때는 위협하고 어떤 때는 겁을 줍니다. 염려하게 하고 의심하게 합니다. 낙심하게 하고 포기하게 합니다. 실의에 빠지게 하고 우울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사탄은 나를 흔들어댑니다. 진지에서 떨어지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성난 파도와 같이 요동칩니다.  

무수한 사탄의 시험으로 신앙의 위험한 고비를 수 없이 넘긴 바울은 사탄의 시험으로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 안에 서라”, “주 안에 굳게 서라”, “흔들리지 마라”. “버티고 서 있으라  

여러분! 나의 인생, 나의 삶을 지키고 싶으십니까? 나의 믿음을 지키고 싶으십니까? 바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주 안에 서십시오!” 사탄의 시험으로 삶이 흔들고 있습니까? 오늘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는 권면을 들으세요. “주 안에 굳게 서십시오!” 뭔가를 결정할 아주 중요한 사한을 앞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 저는 그 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주 안에 서십시오!” 여러분! 주 안에 서십시오. 주 안에 서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주 안에 서는 것이 우리가 당한 현실에 벽을 뛰어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주 안이 어디입니까? 내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믿음의 자리가 있다면 거기가 바로 <주님 안>입니다. 거기가 내가 지켜야 할 진지입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군을 앞에 둔 병사가 목숨을 걸고 진지를 사수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이라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지를 사수합시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행복과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 내가 나갈 바가 있습니다.

2.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두 번째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여기 같은 마음하나의 마음을 말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이 모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답은 주님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여러분! 우리는 각자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다른 교육을 받았습니다.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생각, 사고, 가치관, 직업, 삶의 목적 등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같은 것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오시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가치관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지 않을 때 교회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로 이 문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아주 심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흔들렸습니다. 성도들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바울2차 선교여행 때 세워짐)가 어떻게 생겨난 지 아십니까? 한 여인의 희생으로 생겼습니다. 바울이 빌립보(마게도냐의 한 도시)에 갔을 때 일입니다. 바울이 강가(간디스 강)에서 장사하는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거기에 있던 루디아라는 여인이 주님을 영접합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시에서 온 자주색 옷감 장수(왕후귀족의 옷감장사)이었습니다.) 루디아로 인해 온 가족이 세례를 받습니다.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합니다. 이것이 빌립보 교회의 시작입니다. 한 여인의 헌신이 빌립보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된 또 다른 배경이 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못 가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이 사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비두니야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16:6-7) 바울이 애쓰고 힘쓰는데 안 되는 거예요. 왜요?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드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바울이 이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여러 지역을 거쳐 이른 곳이 바로 마게도냐입니다. 사도행전은 빌립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바울은 아시아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막으시고 바울을 강제로 끌고 오다시피 한 곳이 빌립보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빌립보 교회가 생겨진 과정입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갔다면 빌립보 교회는 없었습니다. 루디아, 유오디아, 순두게 모두 멸망할 자식으로 인생이 끝났을 것입니다. 정말 단발의 차이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단발의 차이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이렇게 한 끝 차이로 구원받은 성도가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이런 교회에서 이렇게 구원받은 두 여신도가 이견으로 싸우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심하게 싸웠는지 교회가 흔들흔들하는 거예요. 교회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온 거예요. 갈등이란 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어렵게 만듭니다. 역할이 큰 사람일수록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세워진지 안다면 우리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는 예수님이 피로 산 교회입니다. 저 서요한 목사가 누군지 아십니까? 여러분! 제가 얼마나 귀하고 비싼 사람인지 아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사람입니다. 저는 정말 보배로운 목사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목숨으로 사신 분들입니다. 얼마나 값지고 보배로운 존재입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 때문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왜 싸우면 안 되나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섬겨야 됩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설계입니다.  

여러분! 저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름에서 영적 메시지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유오디아라는 말은 순조로운 여행, 행복한 여행이라는 뜻입니다. 향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순두게는 행복한 기회, 행운, 다행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도,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교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순례자,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인생을 여행하는 항해자들입니다. 등대교회라는 한 배를 탔습니다. 등대교회 안에서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행복한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하나 된 마음을 품으라.”

3.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세 번째로 바울은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나와 멍에를 같이 한이라고 했습니다. ‘멍에는 소가 밭을 갈 때 쟁기를 끌기 위해 어깨에 메는 도구입니다. 소가 멍에를 메는 것은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멍에를 메고 쉬지 않습니다. 멍에를 메고 소풍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와 멍에를 같이한이라는 말이 원문 성경에는 나와 한 멍에를 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하나의 멍에를 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모두 동일한 멍에를 메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나라는 소 한 마리가 멍에를 하나 멥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소 두 마리가 하나의 멍에를 멥니다. 멍에가 큽니다. 성경에서 소 한 겨리는 소 두 마리를 말합니다. 멍에를 함께 메고 있는 소는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멍에를 멥 소들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방향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또 멍에를 같이 메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둘이 같이 멍에를 메면 두 배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너지 효과를 말합니다. 신명기 32:30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고 했습니다. 하나가 천을 쫓으면 둘이면 이천을 쫓는다는 산술적인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는 천인데 둘은 만이라고 했습니다. 둘이 힘을 합하면 다섯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멍에를 함께 멜 때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라는 말은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동역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구를 특별히 지정한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을 바울은 한 멍에를 멘 협력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부탁합니다.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바울은 이 여인들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들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둘 중에 하나가 잘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둘 다 잘 못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을 따지다 보면 잘 못한 쪽이 나옵니다. 그런데 잘잘못을 따지다 보면 둘 다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주변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사탄의 시험을 받아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잘잘못을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잘잘못을 떠나서 이 두 여인들을 모두가 도와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두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이유는 무엇인지 모릅니다. “단지 함께 신앙 생활하다가 연약해진 이 두 여인, 아픔을 겪고 있는 이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바울의 부탁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돕다라는 동사는 헬라어에서 함께’(συν)라는 부사와 붙잡다’(λαμβανω)는 동사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용된 돕다는 동사의 의미는 무언가를 함께 붙잡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함께 붙들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를 도와달라는 말은 나의 동역자를 함께 붙들어 달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를 붙드는 곳입니다. 두 개를 붙들면 안 됩니다. 하나를 붙들어야 합니다. 다른 것을 붙들면 안 됩니다. 같은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서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주님 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함께 서야 합니다. 함께 서기 위해서는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또 하나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것을 붙들고 주 안에서 굳게 서십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리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 이사야가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15171031일 시골의 한 교수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의 주제>를 붙였습니다. 95개의 주제는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를 비롯한 각종 가톨릭 교리에 대한 학문적 토론과 팩트 체크를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황권에 정면도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95개 조항이 인쇄가 되어 2주 만에 독일 전역에 배포가 된 것입니다. 4주 만에는 전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중세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입니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에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시골 교수이며 신부이었던 루터를 파문했습니다. 교황이 파문하면 누가 루터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루터의 재산을 빼앗아도 괜찮습니다. 이제 루터의 인생은 종잇장같이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루터를 보름스 종교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루터에게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면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형을 당하든지 누군가에 의해 암살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자신을 말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내가 가는 길에 불을 질러 그 불꽃이 하늘에 닿을 지라도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간다. 나는 맹수의 입안으로 들어가 그 이를 부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다. 마귀가 보름스 의사당 지붕의 기왓장만큼 많아도 나는 간다.”  

루터가 보름스에 도착했습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루터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여 있던 2천여 명의 사람들이 루터를 환호했습니다. 종교 재판이 열렸습니다. 루터가 로마 황제 앞에 섰습니다. 양쪽에 고관대작들이 늘어 서 있습니다. 트리니에 대주교의 고문관이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루터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이 모두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책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모두 취소하라는 것입니다. 그 책의 내용은 믿음, 영혼 구원, 말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취소하는 순간 자유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으면 화형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터는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다음날 같은 자리에 섰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슨 말이 나올까 루터의 입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루터가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한참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굴복하며, 제 양심은 말씀 안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건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 제가 여기 서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휴가철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바캉스 갈 때는 마음이 반 쯤 열려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구멍이 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탈선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휴가철에도 세상이 바뀌어도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키세요. 남편의 자리를 지키세요. 아내의 자리를 지키세요. 부모의 자리를 지키세요. 자녀의 자리를 지키세요.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키세요. 이것이 주 안에서 굳게 서는 방법입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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