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깊은데서 부르짖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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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130:1~8
주일오전예배 | 2019-06-30
설교자 : 서요한 목사

201067일 충남 서산군 도당리에서 64세 된 최 모씨가 아내(65)와 함께 5m정도 되는 지하 고구마 저장고에서 숨진 채 발견이 되었습니다. 마을 이장 김 모씨(52)가 최 씨와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집으로 갔다가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고구마가 썩을 때 나는 가스로 인한 질식사이었습니다. 5m이면 깊은 웅덩입니다. 고구마 저장고면 좁은 곳일 것입니다. 어두컴컴한 곳입니다. 그냥 들어가도 답답한 곳입니다. 유독 가스까지 차 있습니다. 들어가면 가스로 숨이 턱턱 막히는 곳입니다. 두 사람은 웅덩이 가스 속에서 죽기 직전까지 얼마나 애타게 소리를 질렀을까요?  

여러분은 물 속 깊은 데에 빠져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장마철이 되면 개천에 물이 많이 불어납니다. 이때 익사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개천이나 저수지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을 번 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치다가 지쳐서 가만히 있으면 물속으로 한없이 내려갑니다. 그런데 물속에 들어가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를 낼 수도 없고 밖에서 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물소리만 들립니다. 그때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곡을 붙여 시편 130편으로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칼빈의 제자인 베자는 임종하는 순간에 시편 130편을 낭송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성 바울 채플에서 시편 130편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는 갑자기 엠마오로는 내려가는 두 제자처럼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에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다가 기도하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130편은 첫 번째 단어로 인해서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은 하나님의 백성의 애가의 원형으로 간주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주 슬픈 노래라는 말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우리 성경은 여호와여!”가 첫 단어이지만 원문은 깊은데서가 첫 단어입니다. 1절은 원문에서 세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의 첫 번째 단어가 깊은데서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부르짖었나이다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부르짖었나이다과거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는 과거로도 현재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원뜻을 살려서 번역하면 ‘(전에도) 부르짖었고 (지금도) 부르짖고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과거에서 지금까지 계속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은 계속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단어가 여호와여!”입니다.  

시편 130편의 첫 단어는 깊은데서입니다. 그래서 깊은데서라는 이 단어는 중요합니다. “깊은데서이 말은 시편 130편의 시인의 심상을 요약하는 단어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체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단어가 중요합니다. ‘깊은 데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없습니다.  

그러면 깊은 데는 어디를 가리킬까요? 깊은 데라는 말은 먼저 물속의 깊은 데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물 속 깊은 곳에 빠져 보셨습니까? 또 깊은 데는 깊은 웅덩이 또는 깊은 수렁과 같은 말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깊은 데는 물이 있으면 깊은 곳을 가리키고 없으면 깊은 웅덩이를 가리킵니다. 깊은 데는 물 속 깊은 데든 깊은 수렁이든 흑암의 장소, 어둠의 장소입니다. 깊은 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움이 지배하는 장소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깊은 데는 아무리 소리쳐도 메아리밖에 들리지 않는 침묵의 공간입니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자신의 간구의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절대 침묵의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데에 빠지면 두려움과 공포를 느낍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함정의 형태로 생겼습니다. 그래서 깊은 데는 무덤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에 죽음의 장소를 가리킵니다. 깊은 데는 절대적인 침묵과 흑암과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빠지면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몇 번은 깊은데 빠지는 경험을 합니다. 깊은데 빠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즘 가장 보편적인 것 중의 하나는 실직입니. 사람들은 실직이라는 깊은데 빠집니다. 이별이나 질병이라는 깊은데 빠집니다. 불편한 관계라는 깊은데 빠집니다. 가정의 불화로 깊은데 빠집니다. 그 밖의 자기만의 어려움으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깊은 데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깊은 데가 있습니다. 죄악의 수렁입니다. 실제로 죄악의 수렁에 빠져서 헤매기도 하지만 죄의식으로 깊은데 빠진 듯한 느낌을 갖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절망의 깊은 웅덩이에 빠졌다고 느껴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를 그리스도 앞에 비추어 보면 자신은 정말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깊은 죄의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깊은데는 환경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사람들이 처하는 원형적인 자리인 것입니다. 깊은데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깊은 곳은 하나님의 백성의 원초적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깊은데 빠집니다. 원래 사람은 깊은 데에 빠져 있습니다. 어쩌면 삶이 깊은 곳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깊은데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편 130편은 깊은데 빠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깊은데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깊은데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시편 기자는 아무한테나 살려달라고 마구잡이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깊은데 빠져 고통스러워하면서 분명한 외침의 대상이 있다. “여호와여!” 시인은 깊은데 빠져서 주께서는 들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30편 기자는 깊은데 빠졌을 때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깊은데 빠져 있으면 깊은데 빠진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깊은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멋진 성공을 가지고 멋진 어조와 멋진 태도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차려 입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성공한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하나님은 깊은데 빠져 있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신앙 공동체와 우리의 사회에 대해 끼친 과오들을 느끼고 깊은 절망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쩌면 피상적이고 얄팍한 기도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깊은 데에 빠져 있을 때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깊은데 빠졌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기자의 부르짖음은 깊은 데서부터 부르짖는 소리였습니다. 깊은데서 부르짖는 시편 기자의 소리는 간구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깊은 수렁에서 소리를 지르면 들릴까요? 깊은 물속에서 부르짖으면 소리가 들릴까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깊은데서 부르짖는 희미한 간구 소리를 하늘에게 계시는 여호와께서는 들으실까요? 시편기자는 깊은데서 죽어가면서 외치는 간절한 소리를 하늘에 계신 여호와께서 듣지 못할까봐 제발 자신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간청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시편기자는 자신이 깊은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여호와께서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나이다  

목청을 돋우어 반복적으로 악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여호와여! 깊은데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것은 여호와께서 깊은데 함께 하시거나 깊은데서 부르짖을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깊은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여호와께서 들으신다는 시인의 확신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가? 그것은 구약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출애굽 사건에서 나온 것입니다. 출애굽은 백성들이 깊은데서 부르짖을 때 생긴 사건입니다.  

<3:7-8>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이 깊은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다는 이 고백이야 말로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호와는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다음에 천사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시고 하늘에 그냥 앉아계시면서 자신의 일에만 분주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는 깊은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더욱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만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만드시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고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걸으시는 분이라고 노래했습니다.  

<51:9-10> 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여기 깊은이라는 말이 시편130편의 첫 단어인 깊은데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면서 어쩌다가 깊은데서 부르짖는 간구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깊은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바다 깊은데 들어오셔서 용과 싸우시고 바다의 괴물을 무찌르시고 바다 깊은데 길을 내어 자기 백성들을 건너가게 하신 분이십니다. 출애굽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들어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데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시편 기자는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의 비참한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잘 나가는 사람들의 소리만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그보다는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여호와는 어떤 분이시기에 하늘에서 내려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시는 것일까요? 시편130편 기자는 용서와 인애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여호와는 용서와 인자와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깊은데서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고 깊은데 길을 내시며 구속 얻은 자들이 깊은 데를 건너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후에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시면서 이 민족을 쓸어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가 중보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6-7>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  

그렇다면 여호와는 용서가 헤픈 분이신가요? 죄를 지어도 무조건 오냐 오냐 하는 분이신가요?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여기 지켜보다는 말의 원뜻은 기록하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십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지은 죄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주께서 사람의 죄를 기록하신다면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누구도 우리의 죄를 기록하시는 분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죄악을 살펴보시고 기록하시는 여호와 앞에 감히 설 수 없지만 여호와는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깊은데 빠졌을 때 여호와께 부르짖을 수 있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시편의 시인은  희망을 노래합니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아직은 깊은데 있습니다. 아침이 온 것이 아닙니다. 아직 깊은 데에 있습니다. 아직은 깊은데 있지만 깊은데서 부르짖는 여호와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내려와 통회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깊은데 길을 내시고 구속 얻은 자로 하여금 건너게 하시는 그 여호와를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신의 기다림을 아침을 기다리는 경비병, 파수꾼의 기다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길고 긴 어두움 속에서 경계를 서는 피곤한 파수꾼이 기다리는 것은 아침입니다.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아침은 파수꾼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면서 혹시 아침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파수꾼이 있을까요?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태양은 떠오르기 때문에 파수꾼은 어두운 밤을 지내며 새벽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자기 자신이 아침을 더 기다린다고 노래합니다. 유다가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예레미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3:19~23>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시편 기자의 확신의 모습에서 시편 기자의 아픔이 치유된 것을 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를 소망하라고 권면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고통에서 빠져 나와 소망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시편130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80m입니다. 갈릴리는 해발 200m 아래에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은 1000m 높은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산악지역입니다. 광야입니다. 험산준령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가려면 수많은 작은 산들을 넘어 깊은 골짜기를 지나 산꼭대기로 가야 합니다. 깊은 골짜기를 지날 때 산꼭대기에 있는 시온산을 바라보면서 순례자들은 이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1> 깊은데서 내가 나의 주님께 부르짖나이다 여호와여!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저 높이 있는 하늘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하고 있습니다. 순례의 길에는 평지가 있는가 하면 높은 산이 있고 깊은 골짜기도 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길에는 깊은 골짜기가 반드시 있습니다. 깊은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는 길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깊은데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애가를 불러야 합니다. 주님은 깊은 곳에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깊은 곳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으십니다.  

깊은데 빠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깊은데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깊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깊은데 빠져봐야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보다 더 깊은지 알게 됩니다. 깊은데 빠져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모릅니다. 땅이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깊은 데를 지나고 계십니까? 그 깊은 곳에서 찬양을 합시다. 깊이 들어갈수록 더 기뻐합시다. 골짜기가 험해질수록 주님의 이름을 더 크게 부릅시다. 주님은 그 깊은 곳에서도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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