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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둘씩둘씩 짝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도 둘씩둘씩 짝을 지어주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더 완전한 진리로 나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한 가지 진리를 이쪽저쪽에서 보도록 한 것입니다. 듣는 자들의 이해를 도운 것입니다. 본문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명확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빗대어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에 이해하고 싶다면 바람을 상상해 보세요.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놀랍습니다. 둘째, 성령으로 난 사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처럼 신비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나셨습니까? 우리는 바람과 같은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바람은 성령과 아주 흡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7:9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성령의 역사를 바람이 부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사도행전2:2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오순절 성령 강림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있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 언어에서 바람과 성령을 뜻하는 단어가 같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영이라는 말이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 영, 바람, 숨결,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영이 프뉴마입니다. 프뉴마는 바람, 숨, 호흡, 생기, 생명, 영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언어에서 바람과 영을 뜻하는 단어가 같은 까닭은 성령과 바람 이 둘 사이에 아주 흡사한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우리에게 바람처럼 오십니다. 예수님은 왜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을까요?
1. 바람의 자유
왜 하필 바람일까요? 바람은 성령님 안에 있는 풍성한 자유에 대한 형상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분다고 했습니다. ‘임의로’라는 말이 헬라어의 문자적인 뜻은 ‘원하는 곳으로’입니다. 바람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붑니다. 바람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바람을 줄로 묶어둘 수 있습니까? 바람을 방에 가두어둘 수 있습니까? 바람에게 불지 말라거나 아니면 더 세게 불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시진핑이라도 바람에게 중국 땅으로 불어오지 말라고 명령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앞으로 한 달 동안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자며 미국 국회가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유럽 연합에 가입된 모든 나라가 동의한다 해도 바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가 원하는 땅으로 원하는 때에 불 것입니다. 오히려 바람은 그들의 가결을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하늘 아래 어떤 선포나 어떤 결의로도 바람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바람은 스스로 내키는 대로 불고, 내키는 장소와, 내키는 때와 내키는 방식을 따라 불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바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바람은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바람은 결코 사람에게 매이지 않습니다. 바람은 그 무엇에도 막히거나 붙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은 자기 마음대로 붑니다. 이 세상 어떤 피조물도 바람처럼 자유로운 존재는 없습니다. 바람은 자유의 상징입니다. 시인 이기호 씨의 <바람의 자유>라는 시가 있습니다.
오늘은
바람의 자유가 부럽습니다.
떨어내지 못한 밤을 접어 낮으로 오는 동안
세상의 존귀한 것으로부터
우울 진 미천한 곳에 이르기까지
넉넉히 아우르며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바람의 자유가 부럽습니다.
••••••
여러분! 바람은 자유의 상징입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왜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을까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임의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자유자재로 부는 것처럼 성령님 또한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바람이 그 누구에게 매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님 또한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습니다. 성령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영이십니다. 다윗은 성령님을 자유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51:12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했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는 말씀을 우리말성경은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붙들어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KJV은 ‘당신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지키소서.’(and uphold me with thy free spirit)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령님은 자유의 영이십니다. 여러분! 절대적인 자유가 성령님 안에 있습니다. 참 자유가 성령님께 있습니다. 성령님께는 자유가 흘러넘칩니다. 성령님께는 자유가 강물 같이 흐릅니다. 성령님께는 자유가 폭포처럼 쏟아집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짜 자유입니다. 참 자유입니다. 세상이 주는 자유는 진짜 자유가 아닙니다. 가짜 자유입니다. 자유처럼 보일 뿐입니다. 자유를 가장한 가짜 자유입니다. 참 자유는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아, 나는 자유합니다. 나는 얽매인 것이 없습니다. 나는 성령님 없이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분 있으십니까? 제가 묻겠습니다. 정말 자유하십니까? 죄의 굴레, 돈의 굴레, 직장의 굴레, 쾌락의 굴레, 힘의 굴레, 습관의 굴레, 슬픔의 굴레, 고통의 굴레, 질병의 굴레, 육신의 굴레, 사람의 굴레 등 이 세상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셨습니까? 아니라면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이 계신 곳이 어디일까요? 꽃이 예쁘니까 꽃 위에 계실까요? 애완동물이 사랑스럽고 귀여우니까 애완동물 위에 계실까요? 큰 건물, 화려한 장소, 좋은 집 아니면 금 은 보석에 성령님이 계실까요? 아닙니다. 그런 곳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성령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심령에 계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들에게는 성령님이 주시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성령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람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임으로 붑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그러면 바람은 아무렇게나 불까요? 아닙니다. 바람은 부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바람은 자연의 법칙에 아래에서 붑니다. 바람에는 계절에 따라 부는 계절풍이 있습니다. 겨울바람, 봄바람, 여름바람, 가을바람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남동풍이 붑니다. 겨울에는 북서풍이 붑니다. 방위에 따라 불어오는 북풍, 남풍, 동풍, 서풍이 있습니다. 봄에는 동풍이 불고 가을에는 서풍이 붑니다. 낮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해풍이 불어옵니다. 밤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육풍이 붑니다. 높은 지역에 부는 바람이 있습니다. 얕은 지역에 부는 바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바람은 높은 지역에 많이 붑니다. 골짜기에 부는 바람이 있습니다. 골목에 부는 바람이 있습니다. 항상 바람이 부는 곳이 있습니다. 항상 바람이 없는 곳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 뒷산에 종종 올라갑니다. 항상 시원한 산들바람이 부는 언덕이 있습니다. 대부분 언덕에는 바람이 항상 있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면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줍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반대로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분지는 바람이 없습니다. 그런 곳은 항상 후덥지근합니다. 불쾌지수가 갑자기 상승합니다. 그곳을 지날 때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같은 산인데 시원한 곳이 있고 답답한 곳이 있습니다. 바람은 철저하게 자연 법칙 아래에서 붑니다. 이것이 바람입니다. 덥다고 바람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바람을 쐬려면 바람이 부는 언덕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이 곳은 분지입니다. 분지라 다른 곳 보다 더 덥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쐬려면 저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바람은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더 강하게 붑니다.
여러분! 성령의 바람은 어떻게 불까요? 성령의 바람 또한 부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법칙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진리입니다. 진리의 법칙은 성경의 법칙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진리의 법칙, 성경의 법칙에 따라 붑니다. 요한복음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바람은 진리를 따라 붑니다. 이것이 성령의 바람이 부는 법칙입니다. 성령은 임의로 원하는 곳에 원하는 대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누구도 성령님의 자유를 통제하거나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나 불지 않습니다. 일정한 법칙에 따라 부십니다. 성령은 더러운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추한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방종의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은 순결한 영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에 따라 붑니다. 진리를 떠나서는 결코 성령의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가슴이 답답합니다. 뭔가에 얽매입니다. 사람, 돈, 직장, 관계, 쾌락에 붙들립니다. 영적인 분지에 빠집니다. 분지에 들어가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우리는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어 합니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는 방법은 영적 분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적 분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깊은 영적 분지로 들어갑니다. 더 깊은 분지에 숨습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곧 파탄납니다. 여러분! 영적 분지에 앉아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바람을 쐬려면 바람이 부는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높이 더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거룩한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진리가 선포되는 말씀의 언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시원한 성령의 바람이 붑니다. 성령의 바람이 얽매인 여러분의 영혼을 시원하게 해줄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 또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법칙입니다. 성령은 진리에 따라 붑니다. 또 성령은 기도의 법칙에 따라 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소리와 눈물로써 은혜를 간구하면 진리의 언덕에 커다란 축복의 바람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축복의 바람은 기도의 눈물이 있는 곳에 붑니다. 성령의 바람은 진리와 기도에 따라 움직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영적 언덕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 언덕에 올라와 그냥 내려가지 마세요. 이 언덕에서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세요. 이 언덕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찬양하세요. 이 언덕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힘 있게 부르세요. 여러분의 기도와 찬송과 말씀으로 우리 등대교회의 거룩한 언덕을 더 높여주세요. 여러분이 기도할수록 거룩한 언덕은 더 높아집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거룩한 언덕은 낮아질 것입니다. 황폐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씀과 기도의 언덕이 높아질수록 성령의 바람은 더 강하게 여러분에게 불어올 것입니다. 그 바람 속에 자유의 달콤함이 있습니다. 저는 이 언덕이 계속해서 더 높아지길 바랍니다.
<아4: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2. 바람의 신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람은 태풍처럼 강한 바람이 아닙니다. 아주 부드러운 미풍입니다. 산들바람입니다. 가까운 산에 올라가 보십시오. 부드러운 미풍이 몸을 감싸며 ‘휘이익’ 지나갑니다. 뺨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목덜미에 난 땀을 식혀줍니다. 그 바람은 나뭇잎을 쉴 새 없이 흔듭니다. 우리는 귀로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바람이 바로 옆을 지나갑니다. 어떤 때는 저 멀리 아득하게 지나갑니다. 바람 소리는 앞에서 뒤에서 그리고 저 멀리서 납니다. 그 소리는 낮에도 들리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도 들립니다. 우리는 귀로 바람 소리를 들으며 그 바람이 어떤 바람인지 생각합니다. 귀는 우리 몸의 기관 중 최고의 분별력을 가진 기관입니다. 우리는 귀로 육적인 일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선포되는 말씀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킵니다. 말씀이 곧 성령의 바람입니다. 그 말씀의 바람이 지금 이 시간에 우리 회중 사이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성령이 일으키시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바람 소리가 들리십니까? 그 바람 소리가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노크하고 있습니다. 그 성령의 소리가 여러분의 귀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 성령의 바람이 여러분의 영혼을 흔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깨셔야 합니다. 바람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성령의 바람 소리를 듣고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성령의 바람의 소리는 듣지만 구원은 받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냥 바람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바람 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여러분! 성령의 바람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아셔야 합니다.
이 바람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요? 쾌락의 소리일까요? 슬픔의 소리일까요? 죽음의 소리일까요? 아닙니다. 이 소리는 살리는 소리입니다. 생명의 소리입니다. 에스겔 37:9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죽음의 골짜기에 불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죽은 자들의 뼈에 닿았습니다. 그때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군대가 됐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그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믿음의 문을 여세요. 의심의 문, 불신의 문은 닫아 버리세요. 그래야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방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 바람이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합니다. 그 바람이 우리의 에너지를 넘치게 합니다. 그 바람이 우리를 생기 있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람의 소리를 들어도 그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기상학자들은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바람이 불어오는 방위나 지점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짚으며 ‘북풍은 이곳에서 처음 시작됐다.’, ‘남풍은 이곳에서 처음 시작됐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람은 자연현상으로 아직도 명확하게 수치로 계산될 수 있는 과학적인 해석이 완벽하지 않은 분야입니다. 단지 시험을 통해 근사치를 구할 뿐입니다. 아직까지 아무도 바람이 맨 처음 어디서 날갯짓을 시작했는지 어디서 잠을 자고 어디서 조용한지 모릅니다. 바람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바람도 어떻게 시작되는지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이 사람의 영혼에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이 말씀으로 우리를 어떻게 거듭나게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그 시작도 끝도 숨겨져 있습니다.
우주는 정말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그런데 그 우주처럼 신비로운 것이 우리 인체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소우주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주 보다 그 인체보다 더 신비로운 것이 우리 영혼입니다. 아직까지 누구도 영혼에 대해 이렇다 할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영역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서 어떻게 활동하셨는지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거듭남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저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령의 바람이 불도록 사용되고 있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저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설교 준비가 잘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마음이 아주 흡족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다고 생각한 설교에 사람들이 감화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설교 준비가 정말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많이 연구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잘 안돼요. 그러면 설교도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럴 때는 설교 후에 사람을 만나기 싫습니다. 그런데 그런 설교 후에 예상외의 반응이 일어납니다. 도대체 성령의 바람은 언제 어떻게 불어오는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들은 좋은 설교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닙니다. 우리 시대 좋은 설교가 없어서 교회가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지 않아서 교회가 어려운 것입니다. 좋은 설교, 명설교 찾지 마세요. 성령의 바람이 반드시 좋은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바람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람이 불어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바람의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바람의 끝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여름에 종종 보았던 일입니다. 장마철이 되면 마당에 물고기가 있습니다. 저의 집 근처에 물고기가 올라올 만한 개울이 없었습니다. 마을에도 개울은 없습니다. 그런데 장마철에 비가 오면 마당에 물고기가 떨어져 있습니다. 어른들은 구름이 실어왔다고 했습니다. 어른들의 말이 맞는다면 바람은 정말 신비로운 것입니다. 바람은 이 물고기들을 어디서 실어왔을까요? 저는 정말 신기했습니다. 저는 해마다 옥상에 이것저것을 심습니다. 밭을 일구다 보면 예전에 없던 풀이 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옥상은 8층 높이입니다. 이 씨앗이 어디서 왔을까요? 바람이 실어왔습니다. 교회 화장실 앞에 베란다가 있습니다. 바닥이 타일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 타일 틈새로 먼지가 끼었습니다. 어느 해에 보니 타일 사이에 조금 쌓인 흙에 커다란 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신기해서 그냥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키가 50센티까지 넘게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씨앗이 어디서 왔을까요? 바람이 실어왔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까요? 저는 확언합니다. 모릅니다. 몰라요.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우리 영혼을 씨를 실어 나르듯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곳이 어딘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천국의 비전입니다. 제 아내는 종종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산들바람으로 우리와 우리 교회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떨어지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천국의 비전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릅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실지 모릅니다. 어떤 축복된 결과를 실어 갈는지 모릅니다. 그 바람에 일임하십시오. 천국 비전에 불복종하지 마십시오.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을 이끄시는 대로 따라갈 준비를 하십시오.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거기서 그분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하나님의 비전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록되기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해 주셨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고전2:9, 사64:4)
오늘 말씀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자식은 부모를 닮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그를 거듭나게 하신 성령과 닮습니다. 성령은 믿는 자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세요. 말씀과 기도는 우리를 자유의 높은 창공으로 인도합니다. 그 길을 감으로 최상의 자유를 누리세요. 바람과 같은 자유를 누리세요. 바람이 자신을 소리로 알리듯 성령으로 난 사람은 소리로 알려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바람 소리를 내시고 계십니까? 산들바람, 미풍의 소리를 내십니까? 겨울바람, 칼바람 소리를 내십니까? 여러분에게서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이 산들바람, 미풍의 소리를 듣기를 바랍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신비가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의 생명이 숨겨져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생명의 비밀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믿는 자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높고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갈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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