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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ok!
고대 그리스도의 시인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잠이란 모든 인간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잠은 인간만 이길까요? 잠은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을 다 이깁니다. 잠을 자지 않는 생물은 없습니다. 들짐승, 가축, 공중의 새, 심지어 잠이 필요 없을 것 같은 풀 한 포기도 밤에는 잠을 잡니다. 박쥐, 나무늘보는 하루에 20시간 잠을 잡니다. 가장 많이 자는 동물입니다. 가장 안자는 동물은 코끼리입니다. 하루에 3시간을 잡니다. 적게 자지만 안 자는 동물은 없습니다. 잠을 통해 만물은 안정을 취하고 성장합니다. 잠은 사람의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력을 회복시킵니다. 잠을 잘 자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잠을 잘 자고 싶어 합니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해스텐스(스웨덴) 침대 매장에 가면 3억짜리 침대가 있다고 합니다. 매트리스 하나에 1억 6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매트리스 하나가 중소 도시에 있는 아파트 한 채 값입니다. 예약을 하면 2시간 정도 잠을 자볼 수 있답니다. 10여전 전에는 사람들이 소파에 돈을 가장 많이 썼습니다. 지금은 침대에 돈을 가장 많이 씁니다. 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잠이 보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잠을 못자고 있습니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침대를 들여놨습니다. 눕기만 하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고급 이불을 깔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불면증으로 진료를 본 총 환자 수는 2011년 318,228명에서 2015년 456,124명으로 5년 사이 약 43.3%가 증가했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불면증 치료제로 잘 알려진 졸피뎀은 2018년에 118만 명이 복용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국민 44명 중 1명이 사용한 셈입니다. 졸피뎀 사용 환자 중 여성은 72만명(61.5%), 남성은 45만명(38.5%)이었습니다. 여성이 남성 보다 배 가까이 잠을 못자고 있습니다. 미다졸람(최면진정제)은 334만 명이 사용했습니다. 성인 3명 중 1명이 불면증이라고 합니다. 모두 마약류에 속하는 약들입니다. 잠을 못자는 사람들을 위해 병원에서 마약을 주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잠을 이루기 위해 200종 이상의 수면제를 개발했습니다. 매년 약 100만 파운드(450톤)의 수면제를 복용하기 위해 수십 억 달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진정한 잠을 얻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수면제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불면증은 병입니다. 잠이 없으면 시간이 많아 더 많은 일을 할 것 같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일도 많이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잠을 자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을 고통스러워합니다. 왜 잠을 못잘까요?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염려, 불안, 근심, 걱정, 두려움 때문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입니다. 불안의 시대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샬롬, 하나님의 평안을 축복합니다.
본문 말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왜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를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 볼 때 니고데모는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 때문에 고민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니고데모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1절)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도자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사회에 율법을 지키며 경건하게 사는 하시딤(hasidim은 히브리어로 '경건한 사람'을 뜻하는 하시드hasid의 복수)이라는 종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하시딤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또 다른 파당입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율법을 연구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생명을 걸고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하스모니안 왕조(이스라엘 마지막 왕조)의 비윤리적 행태를 보이면 목숨을 걸고 저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스모니안 왕조 중에 아리스토 불루스 1세가 죽었을 때 일입니다.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내 살로메는 자기 남편이 죽자 남편의 (첫 번째) 동생 얀네우스와 결혼을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살로메의 비윤리적인 행위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살로메는 바리새인 800명을 학살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존경해 마지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전국에 6,000명 정도가 형제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 행위는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엄격하게 종교행위를 했는지 알려줍니다. 빌립보서3:5-6에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613개 조항으로 세분해서 그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는지 바울은 스스로를 ‘흠이 없는 자’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아주 부자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오시기 100년 전부터 예수님 오신 후 70년까지 니고데모의 가문은 국가적으로 매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애국자 집안입니다. 니고데모는 역사에 등장할 정도의 큰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몰약과 침향 백 근을 가지고 와서 주님을 장사했습니다. 몰약과 침향은 아주 값비싼 물건입니다. 그것을 백 근이나 사 가지고 와서 주님을 장사지낼 정도면 그는 아주 부요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지도자이었습니다. 지도자라는 말이 개역 성경에 관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라는 말이 헬라어로 <아르콘>입니다. 아르콘은 ‘통치자, 주, 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에 주로 산헤드린 공회원을 지칭할 때 쓰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71명이 모여 입법, 사법, 행정의 권세를 휘두르던 당시의 국회였습니다. 지금 국회의원은 4년입니다. 하지만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은 평생직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교육을 많이 받은 학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을 정복한 자>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히브리 이름으로 아람어로 된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대 문화 뿐 아니라 헬라 문화까지 함께 접촉을 했던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히브리 이름과 헬라 이름, 두 가지를 다 붙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 학문의 최고봉이라 여겨졌던 헬라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습니다. 니고데모는 히브리 이름 보다 헬라 이름으로 알려지기를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헬라 교육까지 충분히 받았던 엘리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여러 가지 면에서 틀림없이 늙었을 것입니다. 부요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시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교육이란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런 젊고 가난하고 배우지 않은 예수님께 주저하지 않고 <랍비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A 제약회사 창업주는 장로입니다. 그 어머니는 권사입니다. 창업주는 어렵게 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갑질을 해서 언론에 보도가 된 적이 있습니다. B회사 사모님이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회적인 평판이 좋은 사모님입니다. 그런데 운전기사에게 갑질한 것 때문에 진통을 앓았습니다. 사람들이 의외라는 것입니다. 배우고 갖고 누리는 사람 중에 갑질 안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섬기라고 배운 크리스천도 갑질을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갖고 싶은 것은 다 갖춘 사람입니다. 부와 권세와 명예와 지성을 갖추었습니다. 거기다가 고매한 인격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갖출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완벽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는 말은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고 있는 한 밤중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니고데모가 한 번 더 나오는데 그를 성경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9)
성경 기자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유독 밤에 찾아온 사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기가 발달해 밤에도 많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전기가 발달하지 않아 대부분 일몰과 함께 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저녁도 아닌 한 밤중에 왜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요한복음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은 단어 하나하나를 메시지화 시켰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밤과 어둠이라는 말이 13번 나옵니다. 낮과 빛이라는 말은 26번 나옵니다. 요한은 밤과 낮, 어둠과 빛이라는 단어를 대조시키며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한복음13:30에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다락방을 나섰을 때가 밤이었다고 일부러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떠나 고기를 잡으러 밤에 나갔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한복음 21:3)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이나 어두움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입니다. 악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을 가리켜 밤 혹은 어두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왔다는 말은 니고데모가 지금 어둠에 속해 있다는 암시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니고데모는 빛에 속해 있다고 할 만한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부자였고 명예가 있고, 권세가 있었습니다.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의식까지 있는 사람입니다. 지식, 부, 권세, 명예, 능력, 거기다가 인격까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밤의 사람, 어둠의 사람, 암흑의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대 저택에 최고급 잠자리를 갖고 있음에도 그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한 줄기 빛이 비춰집니다. 그 빛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외면은 낮으로 살았지만 내면은 밤을 살고 있던 니고데모, 그에게 예수님은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발견했습니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 거듭났니?”라고 묻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수만 명이나 모이는 큰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입니다. 교계에 원로입니다. 사회에 인지도가 있는 목사님입니다. 이런 원로 목사님에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는 격입니다. “너 거듭났니?”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너 거듭나지 않았지?”, “너 구원받지 못했지?”
니고데모는 당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니고데모는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인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종교행위를 열심히 했습니다. 율법을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 아직 구원 못받았지?”, “너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구나!”, “너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그가 신주처럼 붙들고 있던 할례, 제사, 율법, 선한 행위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거듭나셨습니까? 구원받으셨습니까? 지금 죽으면 천국 가십니까? 이 질문에 우리는 1초의 망설임 없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일주일에 설교 한번 듣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반드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거듭남은 자신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노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완전히 근본적으로, ②다시 두 번째로, ③위로부터, 하늘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적인 생명을 받은 사람이 영적인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중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4절>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는 조건, 배경, 학식, 미덕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위로부터 태어났느냐? 영적으로 출생했느냐?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느냐?’에 관심을 갖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거듭남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믿음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믿음이 인생의 뿌리입니다. 여러분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습니까?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났습니까? 우리는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비 칵스의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는 “Fire from Heaven”(하늘로 부터 오는 불)입니다. 현대 사회는 컴퓨터의 발달로 사람이 점점 쉬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주 5일제 근무가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는 주 4일 근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주말에는 놀러가는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교회가 침체될 것입니다.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비 콕스는 교회는 성령 운동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혜로 인해 존재하고 부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도 감정의 문제도 의지의 문제도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교회의 뿌리는 하늘입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에 닿아 있는 존재들입니다. “프로는 날마다 기초를 다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훌륭한 코치들이 남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기본으로 돌아가라”입니다. 기초가 단단하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강건할 수 있습니다. 평안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순간에도 평안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편127편 2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염려, 불안, 두려움의 시대에 여러분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샬롬이 늘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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